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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급함! 저를 대신해서 군대 가주실 분 찾아요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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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구 저를 대신해서 군대 갈 사람 구함 사례 합니다!!

 

혹시 저를 대신해서 군대에 다녀오실 분 계시나요?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겠죠

군대는 누군가 대신 가줄 수 없을뿐더러
이런 공고를 올리면 저는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공고가 심심치 않게 올라왔습니다

https://youtu.be/Xg-aiTwwEZQ

 


조선은 크게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네 가지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 양반, 중인, 상민을 양인이라 불렀는데
16살~60살의 양인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1500년대 이후부터는
양반들은 군대에 가지 않도록 제도가 바뀌어
군인의 대부분이 농민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농사를 지을 사람이 부족해져
집안의 식량뿐만 아니라 나라의 식량이 부족해지자 
군대에 가는 대신 베와 무명을 바치도록 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포목 혹은 군포라고 불렀으며
보통 면포 2필을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군대에 가거나 포목을 바치는 행위를 군역이라고 불렀습니다



군대에 간다는 것은 이 시기에도 의무였고 강제적이었기 때문에
해당되는 사람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여러 가지 방법이 이야기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스님이 되면 군역을 면제시켜줬는데
이것 때문에 스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후에는 인증받은 스님만 면제시켜주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 군대를 대신 가줄 사람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런 행위를 대립이라고 했으며
이렇게 대신 군대에 간 사람을 대립군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립군은 시대에 따라 나라에서 금지하기도 하고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1447년 세종은 대립을 막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고
1663년 현종은 재해를 복구하는데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립군을 쓰기도 했습니다

대립군을 고용하는 비용은 면포 1필, 쌀 반가마니 가치 정도였는데


대립군이 유행하자 벼슬아치가 일하는 곳인 관아
지금의 시청 같은 곳에서 중간 상인과 결탁해
수수료를 받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400년대에는 면포 8필로
1500년대에는 60필까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돈이 없는 사람은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고
군대에 가면 농사를 짓지 못하니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중종은 고용 비용을 면포 3필로 제한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대립군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700년 이세정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종을 대립군으로 보냈는데
종이 과거시험장을 관리하는 일을 하도록 힘쓴 뒤
자신이 그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일부의 대립군은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임금만 받아 가기도 했으며
군인이 부족해 대립군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자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립군에 대한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포목의 양을 1필로 줄이기도 하고
군대 환경을 개선하기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균역법(1750년)이라고 합니다


균역법은 시행됐을 당시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군역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어 대립군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본인의 군대 문제는 본인이 해결하는 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제는 사라져버린 문제가 많은 대립군이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공을 세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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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테스트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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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테스트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는
1904년 프랑스 교육부로부터
정규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을
구분하는 방법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테오도르 시몬과 함께 이런 학생들을 구분하기 위해
지능을 테스트할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질문은 나이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식이었습니다

https://youtu.be/lfd78L3FRq4


예를 들어 6살 학생에게는 이런 그림을 보여주며
어떤 얼굴이 더 예쁜 얼굴인가 고르도록 했고
7살 학생에게는 이런 그림을 보여주며
그림에 이상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물어봤습니다

또 선을 똑같이 따라갈 수 있는지
두 그림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그림을 기억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토대로 학생들의 정신연령을 수치화했는데
나이에 맞는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정신연령이 낮은 것으로
통과하면 정신연령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것을 비네-시몬 테스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16년 미국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은
비네-시몬 테스트를 개정해

창의력, 기억력, 수학 능력, 언어 능력 같은 것들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테스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Q 테스트이며

이 테스트로 나온 정신연령에 자신의 나이를 나누고 100을 곱하면
테스트를 한 사람의 지능 지수 즉 IQ가 나오게 됩니다


알프레드 비네가 과거 테스트를 만들었던 이유는
정규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추가 교육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능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이나 생활 방식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터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능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되어 있고
심지어 이것은 유전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유전자 중
우수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전자를 구분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
자손을 번식시켜야 한다는 이론이 우생학입니다

루이스 터먼 역시 우생학을 지지했는데
자신의 IQ 테스트를 이용해 낮은 지능이나 지적장애를 찾아내
이것이 더 이상 유전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IQ 테스트를 진행해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만
장교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해줬으며

1920년대에는 IQ 테스트 결과가 낮은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단종법이라고 하죠

나치 독일 역시 IQ 테스트 결과가 낮은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또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IQ 테스트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결과를 조작해 백인은 우월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IQ 테스트가 과학적인 것으로
진리인 것으로 여겨졌고
사람간 차별을 두는식으로 악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IQ 테스트는 정말 과학적인가
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이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능은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게다가 더 우월한 유전자라는 건 없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IQ가 모든 능력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생학은 완전히 폐기된 이론이 되었으며
IQ 테스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현재는 참고하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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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명을 죽인 치사율 50%의 질병을 극복시킨 기적의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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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율 50% 질병을 극복시킨 기적의 치료법

 

https://youtu.be/GmccOUVTn-g

 

1817년 콜레라라는 질병이 인도에서 시작돼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로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1차 콜레라 대유행이라고 부르죠


1826년에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캐나다, 미국까지 퍼져나가
굉장히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2차 콜레라 대유행이라고 부릅니다

콜레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1837년부터 1975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계속 유행했는데
이때 사망한 사람 숫자만 수천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콜레라는 더러운 물이나 음식을 먹었을 때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병으로

구토나 설사가 계속 나오게 되는데
이것 때문에 몸의 수분이 빠르게 빠져나가
몇 시간 만에 탈수로 사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선 역시 콜레라의 유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콜레라를 괴질이라고 불렀으며
1821년 조선의 왕이 순조일 때 크게 유행해
수십만 명이나 사망했다고 합니다

콜레라의 치사율은 치료하지 않을 경우 50%나 되는데
당시에는 콜레라에 대한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걸렸다 하면 둘 중 한 명은 사망하게 되는
굉장히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832년 스코틀랜드의 의사 토마스 라타가
콜레라 환자를 치료하던 중
이들은 수분을 빠르게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분을 보충하는 것이 콜레라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토마스 라타는
어떤 식으로 보충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농도를 가진 두 개의 용액이 있을 때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수분이 이동하는 현상을
삼투 현상이라고 합니다

콜레라에 의해 구토나 설사가 나와서 몸의 수분이 부족해지면
혈액의 농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이때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평범한 물을 주입한다면
혈액과 농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삼투 현상이 빠르게 일어나
혈액 속의 적혈구가 터져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체액과 같은 농도의 물을 넣어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물과 나트륨이 합쳐진 식염수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식염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토마스 라타는 물과 나트륨을 합친 용액을 직접 만들어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사용한 방법은
항문을 통해 대장에 용액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몸이 알아서 수분을 흡수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방법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가 다음에 사용한 방법은
혈관에 직접 용액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병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수액이라는 치료 방법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방법은 누구도 시도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보장되지도 않았고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토마스 라타는 용기를 냈고 나이가 많은 콜레라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환자에게 다른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라타는 그녀의 혈관에 용액을 주입했고
상태를 지켜봤습니다


30분 정도 흐르자 환자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창백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손발이 따뜻해지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콜레라에 의해 사망 직전에 있던 환자가
단 30분 만에 되살아난 것이죠

혈관에 직접 용액을 넣는 수액이 처음 시도되고
처음 성공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토마스 라타의 이런 치료법은 꽤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인류는 콜레라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물과 나트륨의 완벽한 비율을 찾지 못해
결국 사용되지 못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83년 영국의 의사 시드니 링거에 의해
식염수를 만드는 비율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1930년 미국의 의사 알렉시스 하트만에 의해 발전되어
여러 상황에 사용하는 지금의 수액이 만들어졌습니다

수액은 토마스 라타 혼자서 만들었다고 할 순 없지만
그의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콜레라는 치사율 50%를 기록하던 끔찍한 병에서
수액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가벼운 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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