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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조각상에 있는 성기는 왜 모두 작게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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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조각상에 있는 그것은 왜 다 작을까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는
수학, 과학, 철학 등 여러 가지 문명이 발전하던 때였습니다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그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뛰어난 예술 작품도 많이 만들어졌죠

문명이 많이 발전했다곤 하나
현대적인 기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조각상을 보면
디테일이나 비율 같은 것들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당시 예술가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런데 그때 만들어진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아니 굳이 자세히 보려고 보지 않아도
중심부에 있어서 눈에 잘 띄는 그것

남자 조각상에 있는 성기는
이상하게 아주 작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비율을 맞춰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었으면서
왜 이곳은 이렇게 작게 만든 것일까요

youtu.be/E-kvhR4Qyc0


기원전 450년에 만들어진 제우스의 조각상
기원전 350년에 만들어진 아폴론의 조각상
기원전 200년에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

그 당시 만들어진 남자의 조각상을 보면
하나같이 작은 성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율을 중요시하게 여기던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보면
조각상의 성기는 모순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작은 성기가 각광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상적인 남성의 모습은
밝은 피부, 적은 말수, 넓은 어깨, 빛나는 가슴, 큰 엉덩이
그리고 작은 성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반면 큰 성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문란하고 색욕에 찌들었으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때는 과학과 철학이 많이 발달하던 시절이라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이 인기가 많았는데

조각상으로 만들어지는 사람 또는 만들어지는 신이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큰 성기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혹시 실제로 큰 성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각에는 아주 작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작은 성기를 이상적으로 생각한 데는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흑인은 물론 여자들까지 차별을 당하던 때였죠

백인 남성만이 그중에서도 그리스인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흑인의 검은 피부와 신체적 특징은
아름답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것
조롱의 대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커다란 성기를 가지고 있는 흑인은
어리석고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았는데

그리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숭배하는 대상의 성기가 크다면
그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일부러 조각을 만들 때 성기를 더 작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는
장난과 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티로스의 조각을 보면
까만 피부에 발기된 성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큰 성기가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였는지 어느 정도 예측이 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조각상 역시
이런 영향을 받아 성기가 작게 표현되었습니다

1500년대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대표적인 예술 작품이죠

오늘날에는 큰 성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표현되진 않지만
여전히 조각상에 성기를 작게 만드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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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스파이에 의해 탄생한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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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파이에 의해 탄생한 과일

겨울에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과일이라고 하면
딸기가 있습니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먹기 쉽고
단맛과 상큼한 맛이 공존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일이죠

과일이라고 하면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의외로 딸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물론 산딸기까지 생각한다면 아주 길겠지만
딸기 하면 떠오르는 그 딸기
우리가 자주 먹는 딸기는 200년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딸기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프랑스 스파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딸기라고 하면 이렇게 생긴 과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런 딸기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딸기라고 하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산딸기를 부르는 말이었죠

고대 로마인들은 딸기를 우울증 치료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열매가 작고 지금의 딸기처럼 맛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식용보다는 관상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딸기 재배는 1368년
프랑스인이 야생의 딸기
즉 산딸기를 정원으로 옮겨와 심으면서 시작됐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자라는 야생 딸기는 프라가리아 버지니아라고 불렀는데 
버지니아는 열매는 작지만 향기가 풍부한 덕분에
1600년대 유럽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1712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는
남미 칠레에서 자라는 야생 딸기인 프라가리아 칠로엔시스를 연구하기 위해
칠레로 파견되었죠

칠로엔시스는 다른 야생 딸기보다 열매가 더 크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유럽에서는 키울 수 없는 딸기였습니다


프레지에는 이 딸기를 매일매일 연구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도 해안가에 나가 종자를 채집했으며
끊임없이 기록했죠

그런데 프레지에가 매일 해안가에 나가 딸기를 연구했던 이유는
딸기 이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아니 딸기는 그냥 핑계였다고 말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네요

 


당시 칠레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런 덕분에 칠레에는 스페인 군대가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때 스페인의 국왕은 펠리페 5세였고
프랑스의 국왕은 루이 14세였습니다

그런데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로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루이 14세가 스페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토를 하나로 합치기 위해
자신의 손자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선포했던 것이죠

 


물론 이 과정에서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주변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했던 사건이 있긴 했지만
결국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국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고

마침 스페인이 칠레를 식민 지배하고 있으니
칠레에 스파이를 보내 스페인 군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 했습니다

이때 보내진 스파이가 바로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입니다



즉 프레지에는 딸기 전문가나 식물학자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보낸 군인이었던 것이죠

프레지에는 매일 밖으로 나가 딸기를 연구하는 척 하면서
스페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가 쓴 기록물을 보면 모두 딸기와 관련된 기록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군사 암호로 된 스페인 정보였습니다

1714년 프레지에는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돌아올 때 칠레 딸기 종자를 같이 가져왔습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칠레 딸기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하게 됐고
이것을 바탕으로 칠레 딸기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또 프레지에는 같이 가져온 딸기 종자를 심어 키워보려는 노력도 했지만
토양과 기후가 맞지 않아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식물학자들과 함께 딸기를 키우기 위해 연구를 했고
영국인 필립 밀러가 칠레 야생 딸기인 칠로엔시스와
미국 야생 딸기인 버지니아를 교배시켜


유럽에서도 잘 자라는 새로운 딸기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딸기인 프라가리아 아나나사입니다

1800년대부터 이 딸기는 세계에 퍼지게 되었으며
1800년대 후반 동양에 전해졌고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만약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해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지 못했더라면

루이 14세가 스파이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스파이가 딸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런 딸기를 먹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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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대신 모래로 양치했던 조선시대(양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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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양치를 했던 조선시대

우리가 매일 하는 양치질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지금처럼 칫솔에 치약을 묻히는 방식의 양치질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치약은 1890년대에 만들어졌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칫솔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칫솔과 치약의 가격이 너무 비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칫솔과 치약을 만들어냈으며
이때부터 양치질이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칫솔과 치약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양치질을 했을까요




과거에는 지금처럼 칫솔과 치약을 이용해 양치를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방법으로 양치질을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계란이나 굴 껍데기를 갈아 이를 닦았고
고대 로마에서는 오줌을 이용해 이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칫솔이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을 이용해
양치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럴듯한 모습의 칫솔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 뼈나 나무에 돼지털을 박아 만들기도 했으며
좀 더 부드러운 말의 털을 이용해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균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버드나무 가지를 이쑤시개처럼 만들어
치아 사이에 낀 음식물을 빼내는 형식으로 양치질을 했습니다

버드나무의 가지를 양지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버드나무를 이용해 양치를 하는 것을 양지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에 이 단어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지가 치로 바뀌었고
이런 행위를 양치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왕과 양반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평민들은 지푸라기를 이용해 칫솔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소금을 이용해 양치질을 했습니다

지금은 소금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과거에는 소금은 아주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소금이 아니라
모래를 이용해 양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만들어지는 모든 치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치약의 성분으로는 연마제, 불소, 향료, 보존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마제는 이에 붙어있는 플라크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당시 모래가 바로 연마제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이때 너무 굵은 모래를 쓰면 잇몸이 상하거나
이가 손상될 수 있어 고운 모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에서 만든 칫솔과 치약이 들어오게 되면서
양치질에 대한 방법이 현대처럼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돈이 없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나 모래를 이용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1950년대 락희공업사에서
럭키치약이라는 치약을 만들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양치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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