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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오는 공깃밥은 왜 모두 똑같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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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깃밥은 왜 모두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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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드시고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저녁은 어떤걸 드셨나요?

 

야식을 먹을 예정인데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어떤걸 드실 예정인가요?

 

 

우리는 살아가는 모습이 각자 다르지만

늘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 이따가 뭐먹지

주변에 보면 음식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요리를 잘 하지 못하더라도

원하는 메뉴를 골라서 먹을 수 있습니다

 

어떤날은 찌개를 먹을 수도 있고

어떤날은 국밥을 먹을 수도 있고

어떤날은 백반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날은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어떤날은 탕이나 국을 먹을 수도 있죠

 

그런데 참 신기한게

어떤 음식을 먹든

음식과 함께 먹으려고 하는 공깃밥의 모습은 모두 똑같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깃밥에서 공기는

빌 공에 그릇 기자를 써서 빈 그릇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공깃밥은 빈 그릇에 들어있는 밥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든 주식인 쌀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우리나라는 베이비 붐이 불면서

출생률이 급상승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구도 급상승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식량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이때를 보릿고개라고 합니다

 

그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잘 자라는 쌀을 만들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통일벼인데

통일벼는 맛이 없고 병충해에 약하긴 하지만

기존의 쌀보다 더 높은 생산량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농사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보니

식량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정책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했죠

 

그래서 쌀에 잡곡을 섞어 먹도록 권하거나

밀가루를 먹도록 권하거나

쌀로 막걸리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식당에 표준 식단제를 실시하면서

식당에서 파는 밥의 양을 통제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밥을 많이 먹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그릇에 밥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이런 밥을 고봉밥이라고 하죠

 

1973년 이후 식당에서 고봉밥을 주는 것을 금지하면서

이때부터 고봉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불필요한 음식물 낭비를 막기 위해

표준 식단을 마련했는데

 

이때 밥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야 했으며

공기의 크기는 지름 11.5cm 높이 7.5cm를 넘어선 안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죠

 

그래서 정부는 공기의 크기를 지름 10.5cm 높이 6cm로 바꾸고

공기의 5분의 4정도만 밥을 담도록 규정했습니다

 

또 이런 규정을 위반할 경우 1회 적발에 영업 정지

2회 적발에 허가 취소가 되도록 했습니다

 

1981년 보건복지부장관에 의해 이 규정은 전국적으로 의무화 되었고

이때부터 모든 식당에서 판매하는 밥이 통일화 되었습니다

 

하필 스테인리스 그릇을 사용한 이유는

다른 그릇에 비해 녹이 잘 슬지 않고 위생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놋쇠로 만든 놋그릇을 많이 사용했지만

일제강점기때 일본군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스테인리스 그릇을 사용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쌀 생산에 무리가 없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관련된 규정이 사라졌지만

 

과거에 해오던 것이 아직까지 이어져

공깃밥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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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전쟁을 했지만 그냥 발려버린 사건(호주 에뮤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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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랑 전쟁했는데 패배한 사건

지구에는 많은 생명체가 살고있지만

현재 지구는 인간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와 함께 같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죠

 

그런데 우리는 발전을 원하고 더 넓은 땅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의 터전을 조금씩 조금씩 빼앗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터전을 지키려고 하겠죠

 

이것은 동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평가받는

제2차 세계 대전은 50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에 발생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은 2차 대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죠

 

호주는 1차 세계 대전때 뉴질랜드와 연합해 협상국 소속으로 참전했습니다

 

전쟁은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고

전쟁에 참여했던 호주 군인들은 호주로 돌아와 다시 평범한 일생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호주 정부는 이들에게 땅을 제공했고

이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공황때문에

사람들이 소비를 하지 않으니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농부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남아있는 농부들은 정부에게 지원금을 받아 밀을 재배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에뮤라는 동물이 등장하면서

호주 농부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그림은 호주의 국기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은 호주의 국장입니다

 

국장속 왼쪽에 있는 동물은 캥거루이고

오른쪽에 있는 동물이 바로 에뮤입니다

 

호주 하면 캥거루나 코알라같은 동물을 떠올리지만

에뮤 역시 호주를 대표하는 동물입니다

 

에뮤는 타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약간 다른 동물로

키는 2m정도 몸무게는 50kg, 달리는 속도는 시속 50km정도 된다고 합니다

 

인간중에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우사인 볼트의 순간 최고 시속이 42km라고 하니

얼마나 빠른지 상상할수도 없습니다

 

에뮤는 특이하게 초록색 알을 낳는

날지 못하는 새입니다

 

그리고 과일이나 곤충, 곡식을 즐겨먹습니다

 

호주 농부들은 정부의 권유에 밀을 키우게 되었고

곡식을 좋아하는 에뮤에게

호주 농부들이 키워놓은 밀은

아주 맛있게 차려진 밥상과도 같았습니다

 

이때 호주는 토끼들과 전쟁을 치루느라

토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농장에 울타리를 쳐놨는데

2m가 되는 에뮤에게 이런 울타리 따위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에뮤는 농부들이 가꿔놓은 밀을 맛있게 먹어치웠습니다

이때 농장을 습격한 에뮤는 한두마리가 아니라

2만마리정도 되는 거대한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에뮤가 밀을 조금 남기고 돌아갔다면

그 뒤에는 뚫린 울타리에 토끼들이 들어와

밀을 모조리 쓸어갔습니다

 

안그래도 대공황때문에 힘든데

에뮤까지 난리를 피우니

호주 농부들은 더이상 살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농부들은 처음에 마을에 있는 작은 경찰서나 소방서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2만마리나 되는 에뮤를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했습니다

 

이후 농부들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조지 피어스를 찾아갑니다

이쯤 되니 군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죠

 

호주 정부는 상황이 난감했습니다

에뮤는 호주의 국조인데 국조를 학살하게 된다면

분명 다른 나라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국민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호주 정부는 국민들을 택했고

대대적인 에뮤 소탕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호주 농부들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기 때문에

그 당시 사용했던 기관총의 위력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전에 기관총을 투입할 것을 제안했죠

 

조지 피어스는 기관총을 사용하는 대신

농부들이 군인들의 숙박과 음식을 책임져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현역 군인들의 좋은 사격연습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정부가 좋은 대응을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진 촬영사와 함께

기관총 2정 탄약 1만발을 들고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작전은 원래 1932년 10월 31일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11월 2일로 연기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작전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때 사용된 기관총은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1차 대전때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위력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2만마리의 에뮤가 있긴 하지만

인간에겐 총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빠르게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죠

 

그렇게 첫날 기관총을 가져가 에뮤 무리에 다가가 발사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에뮤를 많이 죽이지 못했습니다

 

에뮤는 몸에 비해 다리와 머리가 얇기 때문에

이곳을 맞히기 힘들어 몸을 맞혀야 했는데

몸은 깃털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덕분에 뚫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에뮤는 너무 빨라서 조준을 하는 것 따라잡는 것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기관총을 사용한 것 자체가 작전 실패였는지도 모릅니다

 

기관총은 무겁기 때문에 빠른 에뮤를 따라잡는데 한계가 있었고

소리가 너무 요란해 한번 쏘기 시작하면

주변에 있는 에뮤들이 모두 도망가버리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 4일 이들은 에뮤를 잡기 위해

이번에도 기관총을 들고 나갑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에뮤 사냥을 시작했지만

하필 총에 탄피가 끼는 바람에 모여있던 에뮤들이 모두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12마리의 에뮤를 잡는데 성공했으니까요

 

이쯤되니 이제는 하나의 단순한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에뮤는 계속 곡식을 먹어치웠고

농부들의 삶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떨어습니다

 

이제 누군가 하나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끝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에뮤와 인간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이것을 에뮤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을 하는동안 에뮤는 좀 더 발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뮤중에서 가장 커다란 에뮤가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고

리더가 인간을 감시하는 동안

에뮤들은 분산 배치돼 피해를 최소화 했습니다

 

호주군은 빠른 에뮤를 잡기 위해

트럭에 기관총을 설치해 에뮤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지만

 

한 에뮤가 트럭에 몸통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트럭이 고장나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에뮤 리더에 의한 전술인지

하나의 에뮤가 생각한 것인지

그냥 우연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뮤는 호주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적이었습니다

 

에뮤는 분대를 나눠 인간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분대가 공격을 받으면

하나의 분대는 곡식을 먹었고

 

그 분대가 공격을 받으면

다른 분대가 곡식을 먹었습니다

 

결국 국방부 장관은 11월 8일 철수를 명령하게 됩니다

 

에뮤와 전투에서 단 한차례도 승리하지 못한채 말이죠

 

언론은 이런 상황을 빠짐없이 보도했고

호주군은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누가봐도 이 전쟁은 에뮤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호주군은 에뮤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만약 에뮤를 길들여 군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어느 육군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에뮤는 계속 곡식을 먹었고

농부들의 삶은 계속 나빠졌습니다

 

결국 농부들은 다시 국방부 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11월 12일 군대가 다시 출격했고

과거의 패배를 교훈삼아 다른 작전으로 에뮤를 소탕했습니다

 

이들은 12월 10일까지 총 1만발의 탄약을 소비해

1000마리의 에뮤를 잡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군대는 철수하게 되고

국방부 장관은 에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했지만

 

아직 1만 9000마리의 에뮤가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과 전쟁에서 승리한 에뮤에게

훈장을 줘야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호주군은 에뮤를 소탕하지 못했고 농부들은 계속 고통받았습니다

 

1934년, 1943년, 1948년 농부들은 다시 국방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호주 농부들은 에뮤를 가축화 시키는데 성공했고

더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으로

모든 사건을 마무리짓게 됩니다

 

물론 더 많은 군인들 더 많은 무기를 투입했다면

에무와 전쟁에서 쉽게 승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토끼와의 전쟁

그리고 여우나 낙타의 개체수를 줄이지 못했던 것을 보면

호주는 이번에도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들은 많은 군대를 투입해 에뮤 소탕에 실패하게 된다면

또다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죠

 

이쯤되니 정말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호주는 인간이 살면 안되고

자연 그대로 동물들이 살 수 있도록 둬야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에뮤 전쟁은

결코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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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그 시작은 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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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띄어쓰기 처음 시작은 외국인?

한글에 존재하는 모든 맞춤법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렵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맞춤법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이 틀리는 맞춤법중 하나가 되, 돼의 구분인데

되, 돼는 하, 해를 넣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안되겠다의 경우 안하겠다로 바꿔보면 말이 되지만

안해겠다로 바꿔보면 말이 안되기 때문에 안되겠다가 맞고

 

안돼요의 경우 안하요로 바꿔보면 말이 안되지만

안해요로 바꿔보면 말이 되기 때문에 안돼요가 맞습니다

 

왠, 웬 역시 많이 틀리는 맞춤법중 하나인데

왜인지를 줄여서 왠으로 사용하고

어쩐일을 웬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왠지는 왜인지이니까 왠지가 맞고

웬일은 어쩐일이니까 웬일이 맞습니다

 

 

띄어쓰기 역시 어려운 맞춤법이긴 하지만

어떻게 띄우느냐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규칙을 잘 지켜 사용해야 합니다

 

이불안감뭐냐 라는 문장의 경우

이 불안감 뭐냐 라고 띄어쓰면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를

이불 안감 뭐냐 라고 띄어쓰면 이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어그거실화 역시

어 그거 실화 라고 띄어쓰면 그건 진짜 실화라는 이야기를

어그 거실화 라고 띄어쓰면 거실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죠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3년에 완성해

1446년에 반포한 뒤로 지금까지 잘 쓰이고 있는 우리의 문자입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는 세로쓰기를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만들어졌던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책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로 읽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보면 띄어쓰기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어 역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으니

어찌보면 이런 현상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은 지금과 다르게 과거에는 강대국이었으니

그들의 영향을 분명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어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죠

 

한글에 띄어쓰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77년 존 로스라는 목사에 의해서입니다

 

존 로스는 선교사 일을 위해 조선에 왔지만

한글에 큰 매력을 느끼고 그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존 로스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했고

그 당시 영어에는 띄어쓰기가 있었기 때문에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띄어쓰기가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때 존 로스가 만든 책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보면

띄어쓰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어는 가로쓰기를 사용했으니

아마도 그는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다보니 띄어쓰기를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띄어쓰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역시 한글에 큰 매력을 느끼고 띄어쓰기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호머 헐버트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고종에게 신임을 얻어 외교 관련 업무를 도왔다고 합니다

 

호머 헐버트는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했고

더 편한 한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1896년 출간된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도입해

누구나 글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고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면서

띄어쓰기가 정식으로 도입될 수 있었습니다

 

띄어쓰기는 분명 어려운 문법입니다

 

여기에서 띄어써야하는지 붙여써야 하는지 그 기준이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 다르고 예외적인 단어가 있기 때문이죠

 

못됐다라는 문장은 심보가 나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못 됐다라고 띄어쓸 경우 무언가 되지 못했다 라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7대 원장인 이상규 원장조차

글을 쓸 때 띄어쓰기가 자신없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띄어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띄어쓰기가 도입된 이후로

한글을 더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글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 이후로 여러 사람에 의해 한글은 계속 발전 돼 왔습니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언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댕댕이, 커엽다처럼 야민정음에 의해 한글이 파괴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문화, 한글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단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글을 잊지 않고 계속 사용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한글은 계속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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