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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수를 하는 것이며 오른손으로 하는 이유는 뭘까?(악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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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수를 하는 걸까

누군가 만났을 때 인사를 하는 방법은 참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손을 흔드는 인사가 가장 보편적이긴 하지만

눈을 보고 서로 웃는다던지

어깨동무를 하는 경우도 있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반가움을 더 많이 표현하고

만나서 기쁘다 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악수만한게 없는 것 같습니다

 

 

악수는 누군가와 만났을 때 하기도 하지만

운동경기를 하기 전 선수들끼리 페어플레이를 다짐하며 하기도 하며

 

어떤 계약을 한 뒤 하는 경우도 있고

큰 돈이 오고가거나

거래가 성사 되었을 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싸운 뒤 화해를 할 때 악수를 하기도 합니다

 

악수는 우리나라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행해지는 인사법이며

 

서로가 악수를 했다는 것은

그 상황이 꽤나 긍정적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악수는 왜 긍정적인 이미지가 된 것이며

왜 하필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는 것일까요?

 

악수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벽화에

서로가 악수를 하는듯한 모습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봐

이때부터 악수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금과 다르게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른손잡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기는 주로 오른손에 들고 있었죠

 

보통 오른손에 무기를 오른손에 방패를 들었습니다

 

이때는 침략전쟁이 많았던 때라 언제든 전쟁에 대비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늘 전쟁만 하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평화의 때도 있었는데

 

평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혹은 국가간 거래를 하기 위해 사신이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신이 왔을 때

기사가 무장을 하고 무기를 들고 있으면

언제 나를 찌를지 모른다 하는 생각때문에 긴장감이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 왔는데 오해가 생겨 평화가 깨져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죠

 

그래서 나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 라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기는 보통 오른손에 들고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 손에는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상대바 역시 무기가 없다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고

똑같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던 것이 악수의 기원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때 악수는 믿음, 평화의 의미였습니다

 

'당신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 라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죠

 

처음에는 악수를 할 때 손을 흔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악수를 하면서 손을 흔드는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죠

 

이것도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무기가 없다라는 표현이 발전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옷을 보면 소매부분이 길다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소매부분에 작은 총이나 단검 같은 무기를 넣어 다니곤 했습니다

 

단순히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른손을 내미는 것으로는

소매에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없었죠

 

그런데 이때 손을 흔들게 되면

소매에 감춰둔 무기가 떨어지게 될테니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악수를 할 때 손을 흔든다는 것은

상대가 소매에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용도이기도 했고

내 소매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지금처럼 여러가지 상황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 평화의 의미는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악수를 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었죠

 

과거에 여자는 기사가 되는 경우가 없었고

무기를 소지하는 것도 금지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여자와 악수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악수는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함이었는데

여자는 어차피 무기를 가질 수 없으니 굳이 악수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에 와서 여자와 악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여자가 먼저 악수를 청하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물들은 각자 서로에게 신뢰를 표현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역시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표현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나라마다 언어도 다르고 제스쳐가 의미하는 뜻도 다릅니다

 

하지만 악수만큼은 전세계가 공통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악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더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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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수능 과거시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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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상승의 기회 조선시대의 수능

시험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든

처음 보든 두번째 보든

 

그렇기 때문에 평소보다 실력이 더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의외로 실전에 강해 평소보다 실력이 더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험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수능이겠죠

 

그간 공부했던 것을 한번에 평가받고

이것으로 원했던 대학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시험이고 인생에 있어 커다란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줄여서 수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수능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93년입니다

수능은 그 해에 치뤄지지만 다음 해 대학 입학에 사용되기 때문에

이때 이름은 1994년도 수능이었습니다

 

수능 이전에도 시험을 통해 그동안의 노력을 평가했습니다

1981년에는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있었고

1968년에는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수능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시험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험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이전 국가인 조선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보지만

이때는 대학 입학이 아니라 관직을 얻기 위해 시험을 봤습니다

 

이 시험은 과목에 따라 인재를 선발한다고 해서

科(과목 과) 擧(들 거)

과거라고 불렀습니다

 

과거시험이 처음 시작된 것은 중국의 수나라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의 4대왕인 광종때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인 통일신라 원성왕때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있긴 했지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채용하는데 참고하는정도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본격적인 과거시험은 958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시험은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을 한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시대의 과거시험은 크게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구분됐습니다

 

製(지을 제) 述(펼 술)과는 문학적 재능을 보는 시험

明(밝을 명) 經(경서 경)과는 유교에 대한 이해도를 보는 시험

雜(섞일 잡)과는 기타 여러가지 능력을 보는 시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와 다르게 무관을 뽑는 무과는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16대 왕인 예종때 강예재를 설치하면서

무관을 뽑아 군사력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133년 문치주의를 중요시하던 문신들에 의해

강예재는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의 수능은 1년에 딱 한번만 실시됩니다

과거시험 역시 초반에는 한번만 실시 됐지만

이후에 여러가지 단계가 도입되면서

총 3번의 시험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향시, 감시, 예부시라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에 한번 치뤄지는 것이었지만

1년에 한번 치뤄지기도 했고 2년에 한번 치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날짜를 정해놓고 치루진 않았습니다

 

과거시험을 감독하던 감독관을 지공거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시험 감독 이외에도 시험을 채점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이 제법 큰 역할이었습니다

 

지공거가 관리하는 시험에서 합격한 수험생을 문생이라고 불렀는데

지공거와 문생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지공거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합격시키고 제자를 길렀습니다

자신이 합격시켰던 문생이 이후에 지공거가 되면

자신의 제자를 그 지공거가 합격시키고

지공거가 된 문생은 다시 제자를 기르고

문생은 지공거가 되고 그 제자를 또 합격시키는 부정부패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지공거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왕이 직접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리하는 복시가 실시되기도 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는

과거 과거시험에 있었던 문제점을 하나 둘 고쳐나갔습니다

 

무관으 뽑기 위해 무과를 다시 개설하기도 했으며

1차 시험인 초시(향시)

2차 시험인 복시(회시)

3차 시험인 전시

총 3단계로 진행되는 과거삼층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때 전시는 왕이 직접 관리하는 시험으로

과거 지공거의 힘이 너무 커져 왕권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감독관을 여러명 두는 복수시관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고려시대와 다르게 지공거의 힘은 많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전국 8도에서 치뤄졌지만

2차 시험인 복시는 한양에서 치뤄졌습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양에 몰렸지만

복시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문과 33명 무과 28명 뿐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사람들이 과거시험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그러다보니 경쟁률이 2000:1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천인을 제외한 양인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통해 신분상승을 노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죠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지는데

소과는 200명을 뽑았고 대과는 33명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소과에 합격하기만 하더라도

양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법 많은 평민들이 소과에 합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게 되면 관직을 얻는것이 아주 어렵거나

낮은 직책을 받게 되지만

병역을 면제시켜주는 특권이 주어져서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시험을 준비하거나 치루는데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평민들이 과거시험을 보는 것은 마냥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보통 5살때부터 준비했는데

외워야 하는 한자의 개수가 너무 많기도 하고

과거시험 자체가 어려워서 30대 중반은 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평균적으로 30년 이상 공부를 해야 합격했던 것이죠

 

이때는 농경사회라 한명한명의 노동력이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가족중 한명이 농사가 아닌 공부를 한다면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한양에 가야했는데

이때는 자동차나 대중교통이 없었기 때문에

한양까지 가는데 많은 돈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시험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간 들였던 돈을 또 들여야 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 시험에 도전했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과거시험에 많이 도전했습니다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죠

 

평민들이 합격하는 비율도 제법 높았습니다

어쩔때는 합격률이 50%가 넘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낮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 관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관직이 주어지더라도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출신 학교에 따라 승진을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것이죠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번이 원칙이었지만 비정기적으로 특별 시험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한번 탈락한 사람들이 특별 시험을 노리기 위해

서울에 눌러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지금처럼 절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시험을 봤던 사람이

예상 문제를 만들어 기출문제집을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집을 초집이라고 불렀는데

수험생들이 유교 경서를 공부하지 않고

초집에만 너무 의지해 큰일이라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학교 공부는 소홀히 하고 학원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죠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현수막을 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방방의식이라는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방방의식은 나라에서 직접 열어주는 경우도 있었으며

마을 단위로 축하파티를 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섯명의 아들이 과거시험에 모두 합격하면

축하의 의미로 부모에게 벼슬을 내리고 재물을 주는

오자등과가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당시에는 과거시험이 아니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시험에 도전했고

합격하기 위해 여러가지 부정행위를 사용했습니다

 

옆사람의 답안지를 베끼거나(고반)

의견을 나눠 답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고(설화)

시험장에 다른사람이 대신 들어오거나(입문유린)

이름을 바꿔 제출하기도 했고(절과)

서로 암호를 정해 정답을 말해주는 방법이나(음아)

밖에 있는 사람에게 답안지를 전달받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외장서입)

 

이런 행위는 기본적으로 감독관을 매수하고 진행됐기 때문에(혁제)

 

들켜도 그냥 넘어가기도 했으며

대놓고 부정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커닝 페이퍼가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종이에 글을 써 돌돌말아 콧구멍 속에 숨겨 들어오거나(의영고)

붓 속에 숨겨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협서)

 

중국에서도 과거시험을 치룰 때 부정행위가 판을 쳤다고 합니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독방에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바꿨더니

속옷을 커닝 페이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협대)

 

지금은 전자기기를 이용하는 부정행위가 많이 일어나긴 하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나 봅니다

 

수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뤄지기 때문에

점심에 밥을 먹기 위해선 도시락을 챙겨가야 합니다

 

과거시험 역시 긴 시간동안 치뤄졌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 도시락을 챙겨가야 했는데

주로 닭고기와 과일을 많이 싸갔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외부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비라도 오게 되면 시험이 중단되었는데

이때는 비가 그칠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변이나 대변을 보기 위해선

개인 요강을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능은 정답이 정해져있는 객관식이나 주관식으로 출제되지만

과거시험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논술 형태였습니다

 

조선의 과거시험 문제를 몇가지 소개해보겠습니다

 

태종 - 올바른 신하를 얻기 위한 방법은?

세종 - 효율적인 인재 양성 방법은?

성종 - 흉년 대비책은 무엇인가

연산군 - 오랑캐 제어 방법은?

 

이런 것처럼 현실적인 상황을 묻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조 - 최신 유행하는 음악에 관하여 논하라

중종 - 술의 폐해를 논하라

광해군 -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것처럼 감성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신분에 상관없이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만

그 덕분에 유교 이외에 다른 학문은 쓸모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은 판단할 수 있지만

인성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악인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관의 경우 이론은 잘 알지만

실전에서 학문을 응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시험이 정말 유능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수단인가? 하는 의문이 있기도 했습니다

 

토익 점수는 높지만 외국인과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죠

 

시간이 흘러 근대화의 바람이 불자

조선에서도 뒤늦게 유교 이외에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실용적인 과학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4년 갑오개혁때 과거시험은 폐지되었고

새로운 방법으로 관리를 뽑는 선거조례나 전고국조례가 시행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인재를 선발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수능,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등

과거시험과 비슷한 방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 한번의 시험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평가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단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과거의 과거시험처럼 노력만으로 성공을 보장한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이것이 가장 공정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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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시작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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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언제부터 싸우기 시작했을까

현실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민국은 民(백성 민) 國(나라 국)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니까 우리 맘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그것은 안됩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주인 행세를 하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각 분야에 전문가를 투표를 통해 뽑아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도록 맡기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도록 말이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곤 합니다

 

특히 그저 자기의 의견이 맞다며

말싸움을 하다 결국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싸우려고 정치인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이런 싸움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XJGeqRdwp6U

 

고려는 국교를 불교로 삼았지만

고려 후기로 가면서 유교 중심

그러니까 성리학 중심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은

그당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세력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길 원했습니다

 

이때 선택받은 세력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세력을 점점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리학 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길 원했죠

 

하지만 이러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고려는 이미 망했으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 중심의 급진 개혁파와

 

고려라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조금씩 바꿔가야 한다는

정몽주 중심의 온견 개혁파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당하면서

온건 개혁파는 몰락하게 되고

 

급진 개혁파에 의해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집현전에서 연구한다고 해서

관학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官(벼슬 관) 學(배울 학) 파

 

하지만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7개 왕인 세조가 된 뒤 집현전이 폐지 돼

관학파의 세력이 약해지거나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참여했던 일부 훈구파 세력들은

계유정난 성공 이후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훈구파라고 부르고 있죠

 

勳(공 훈) 舊(오래 구) 파

 

반면 조선 개국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

몰락한 온건 개혁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나름대로 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속세를 벗어나 산속에 있다고 해 사림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士(선비 사) 林(수풀 림)

 

권력을 잡은 훈구파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챙겼습니다

특히 부정부패를 이용해 토지를 많이 소유하게 되었죠

 

사림파들은 다시 한양으로 진출하길 원했지만

훈구파가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이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계속해서 공부를 한 덕분에

 

그리고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

너무 커져버린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선택하게 되면서

사림파는 하나 둘 한양으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삼사라고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많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삼사는 조선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사헌부는 벼슬아치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거나 탄핵을 시키는

지금의 검찰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사간원은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의견을 내는

지금의 감사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홍문관은 문서를 처리하고 사적(역사책)을 관리하는

폐지된 집현전의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삼사는 하나의 세력을 견제하기 아주 적절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죠

 

훈구파는 이렇게 커져가는 사림파를 그대로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번의 사건을 통해 사림파를 견제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화라고 합니다

 

士(선비 사) 禍(재앙 화)

 

무오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기묘년인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을사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를 입는 과정에서도 사림파의 세력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가

문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치주의를 펼치면서

사림파는 드디어 조선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향촌의 서원을 통해 후계자를 계속 양성했지만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훈구파는

하나 둘 시간이 지나 늙어가거나

사림파에 흡수 되었습니다

 

이제 사림파가 조선을 잘 이끌어 갔다면 좋았겠지만

사림파 내에서 또 분열이 생기며 두 세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요즘의 회사에는 채용을 담당하는 인사과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조입니다

 

이조에서 사람을 뽑는 역할을 했던 것이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이었는데

이 둘은 사람을 저울질 한다고 해서

 

銓(사람가릴 전) 한자를 사용해 이조 전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조 전랑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사람을 뽑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이조 전랑이 되는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삼사는 반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조 전랑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

여러 부서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는 통청권

과거시험에 탈락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곧바로 채용할 수 있는 낭청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을 남용한다면

자기편이라고 생각이 되거나

자신에게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할 수 있었고

자리 역시 세습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번 권력을 잡으면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조선의 9대 왕인 성종 이후 관행으로 하던 것이 굳어지면서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죠

 

문제가 된 것은 이조 전랑이었던 오건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지만

심의겸이 이것을 반대하면서 부터입니다

 

물론 이때는 반대가 있었어도 김효원이 이조 전랑에 자리에 오르긴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김효원이 후임을 정해야 할 때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적절하다는 추천을 받게 되지만

이것을 김효원이 반대하면서

 

하나였던 사림파는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이황의 영향을 받은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이이의 영향을 받은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단순하게

경복궁을 기준으로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고

심의겸이 집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갈라졌다고 해서 붕당이라고 합니다

 

朋(벗 붕) 黨(무리 당)

 

물론 이전에도 크고 작은 의견 다툼은 있었겠지만

붕당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

이때부터가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붕당은 하나의 세력이 독재하는 것을 막고

영양가 있는 토론을 통해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 세력의 의견을 무작정 반대하는 식으로 변질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

자기가 속한 당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붕당 역시 막을 내렸고

 

이후부터 하나의 세력이 조선의 정치를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시작되면서

여당과 야당으로 나눠지는

조선시대의 붕당과 비슷한 정치 형태로 바뀌게 됐죠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발전하고 기술도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처럼 자기 자신들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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