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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부모님을 버리고 오는 고려장 진짜 존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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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모님을 버렸을까

과거 우리나라에는 부모님의 나이가 많아지면
부모님을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
그곳에 버리고 오는 풍습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고려장이라고 부르죠

우리를 낳아준 부모님을 버리고 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씁쓸한 풍습입니다

고려장은 이름처럼 고려 시대에 있었던 장례 풍습이고
다행히도 지금은 없어진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려에 이런 풍습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본에 의해 왜곡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1882년에 쓰인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의 책
은둔의 나라 한국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책에 보면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습이라는 고려장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다고 나옵니다

 


그리피스는 우리나라에 총 두 번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차 방문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책이 나온 뒤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1차 방문 시기는 책이 나오기 전이어야 할 텐데
학계에서는 그리피스가 우리나라에 오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며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책을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조선의 잔칫상이라고 하며
하나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조선의 잔칫상처럼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그리고 고려장에 대한 기록은
1919년 미와 타마키의 책 전설의 조선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동화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책인데
각각 불효식자,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고려장에 대한 같은 내용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산에 올라
할아버지를 버리고 지게도 함께 버리고 왔는데
어린 아들이 지게를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왜 지게를 가지고 왔냐고 물으니
아들은 아버지가 늙으면 똑같이 버려야 해서 지게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크게 뉘우치고 할아버지를 다시 데리고 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효자전이라는 책에 나오는 중국 설화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즉 일본이 우리나라의 이야기라며 책에 쓴 내용은
우리나라의 풍습이 아니라 중국의 설화라는 것이죠

 


게다가 우바스테야마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동일한 설화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만들었던 이유는
우리 민족에게 열등감을 주기 위함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있는 무덤을 파헤쳐
값비싼 물건을 가져가기 위함이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918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세워진 나라인 고려는
불교 국가이면서 유교사상에 정치이념을 둔 국가였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기본적으로 부모님께 잘하는 효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도 효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법을 만들어 불효자를 처벌하기까지 했죠

 


고려에 전반적인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고려사를 보면
부모나 남편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면 징역 1년
상이 끝나기 전에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으면 징역 3년에 처한다고 나옵니다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무덤 근처에 살며
무덤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을 여묘 혹은 시묘살이라고 하는데


직접 시묘살이를 한 사람에게는 정문(旌門)이라는
효자를 표창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직급을 높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에서
나이 든 부모를 버리고 오는 고려장 같은 풍습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조금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신빙성 있는 여러 기록을 살펴봐도
고려장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고려를 떠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려장이라는 것은 없는 풍습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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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온 특수부대 대통령 암살 사건(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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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됩니다

3년이 흐른 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은 잠시 휴전 상태로 들어가게 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휴전된 때부터 현재까지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견제하고 도발하며
적화통일에 대한 야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1968년 1월 21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규 부대에 속하지 않으면서
게릴라 위주의 전투를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빨치산이라고 합니다

1965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동맹 조약인
한일기본조약으로 한국, 미국, 일본 동맹 체제가 완성되자
북한은 초조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북한의 국가 원수였던 김일성은
항일빨치산전술을 근거로 

우리나라에 투입될 빨치산을 키워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1967년 4월 제124군부대가 탄생하게 되죠

제124군부대는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300명씩 분산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같은 것들을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총 8개의 기지로 나누어지는데
제6기지에서 서울, 경기도 지역 침투를 담당했습니다


1968년 1월 2일 북한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민족보위성에서
1월 21일에 우리나라에 침투하라는 작전 지시가 내려옵니다

제6기지는 5개 조로 나누어져
청와대,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를 습격하려 했습니다



처음에는 25명이 우리나라에 침투하는 것이었지만
1968년 1월 13일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31명이 5개 조로 나누어져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당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암살하고
우리나라를 혼돈에 빠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기관단총, 권총, 대전차용 수류탄, 방어용 수류탄, 단도를 장비한 채
1968년 1월 17일 6.25전쟁 이후 그어졌던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넘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1월 18일 새벽 임진강 쪽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월 19일 새벽 파평산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1월 19일 낮에 서울로 오기 위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산을 넘던 중
그곳에 있던 나무꾼 4형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무전으로 북한에 물어봤지만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해 나무꾼 형제를 살려준 뒤
다시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1월 20일 나무꾼의 신고를 받은 국군이 파평산을 포위했지만
이들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고 앵무봉을 거쳐 비봉에 도착한 뒤 하룻밤을 보내고
1월 21일 서울 시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이 처음 검문을 받은 곳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자하문 초소입니다
여기서 검문을 받을 때 자신들이 방첩대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방첩은 기밀이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말하는데
방첩대원이라고 하면 기무사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검문을 받는 도중 수상함을 느낀 경찰이 무전을 했고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었던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출동해
북한군과 경찰 간의 대치가 시작됩니다

이때 멀리서 서울 시내버스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는데
북한군은 이것이 국군이 탄 버스라고 생각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선제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민간인도 공격을 했는데
자하문 초소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1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그리고 국군 장병과 민간인 30여 명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공비 31명 중 28명은 사살되었으며
두 명은 다시 북한으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
나머지 한 명은 투항했는데 투항한 사람의 이름은 김신조입니다

김신조는 1월 22일 새벽에 체포되었는데
나오면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투항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체포된 뒤 김신조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며
남은 공비 소탕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임무가 박정희의 목을 따는 것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1월 21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1.21 사태라고 부르거나
살아남은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같은 시기 베트남에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북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 미국, 일본이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파병을 보내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김신조 사건의 목적은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임무 실패라고 할 수 있지만

김신조 사건으로 내부 경계를 더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돼
남베트남에 파병을 보내지 못해
약속했던 것처럼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이기게 되었으니
어쨌거나 김신조 사건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신조 사건 이후 우리나라는 북한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고
또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여러 가지 대비를 하게 됩니다

먼저 간첩을 구별해 내기 위해 전 국민이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번호는 110101-100001이었고
박정희의 아내인 육영수는 110101-200002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릴라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군과 5분대기조,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됩니다

이번 사건을 복수하기 위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이른바 실미도라고 불리는 684부대가 만들어집니다


군대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으며
여기에 맞춰 당시 현역이었던 병사들의 전역일도 미뤄졌습니다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씩 늘어났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김신조는 귀순하여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했으며
김재현으로 개명한 뒤 목사로 살다 지금은 은퇴했다고 합니다

추가로 김신조 일행이 산에서 나무꾼 형제를 만났을 때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후에 이 암호를 풀어보니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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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곤장 맞는 알바를 했던 사람들 매품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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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곤장 맞을 사람 구해요

누군가 와서 돈을 줄 테니 대신 징역을 살아달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현실성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금액에 따라 진지하게 고민하실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판소리 소설 흥부전에 등장하는 흥부는
형인 놀부에게 쫓겨난 뒤 가족들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때도 밥을 먹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흥부는 이런저런 돈이 되는 일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형벌인 곤장
죄인을 묶어놓고 넓은 나무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체벌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매를 맞는 경우가 없지만

그 이전에 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곤장이 그렇게 심한 형벌은 아니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특수하고 엄한 형벌이었습니다

곤장은 고작 10대만 맞아도 엉덩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맞는 도중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운 좋게 곤장을 맞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하반신이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종 때부터는(1685년) 30대 이상 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곤장을 맞다 죽을 정도였으니
나이 든 사람에게는 더욱 끔찍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든 아버지 대신 아들이 곤장을 맞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부모의 형벌을 대신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양반 대신 노비가 맞기도 했고
이후에는 돈을 주고 대신 맞아줄 사람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이것은 아르바이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렇게 대신 곤장을 맞아주는 사람들을 매품팔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설 흥부전을 보면
삼십 냥을 줄 테니 대신 매를 맞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부는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30대를 맞고 삼십 냥을 벌어올 것을 다짐하기도 하죠

물론 의뢰인이 석방되는 바람에
흥부는 매를 맞지 않았고 돈도 벌지 못하긴 했습니다



잡다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도
매품팔이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매품팔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다섯냥을 받고 매를 맞으러 왔다고 합니다

곤장을 때리는 사람은 그가 자주 오는 것이 너무 얄미워
평소보다 세게 때렸더니
매품팔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고 다섯 냥을 줄 테니 살살 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곤장을 때리는 사람은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세게 때렸는데
매품팔이는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해
다섯 냥을 더 줄 테니 제발 살살 때려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다섯 냥을 벌기 위해
열 냥을 주고 매도 맞고 온 것입니다

이런 기록을 봤을 때
조선에서는 대신 매를 맞아주며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해지던 매질이 모두 곤장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곤장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행해지기 때문에
일거리가 되기엔 횟수가 부족했습니다

사극을 보면 매우 쳐라 라고 말하며 곤장을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부분이 장형으로
곤장과 비슷하지만 조금 약한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장형 역시 죽을 위험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죠

 


넓은 나무판으로 때리는 곤장과는 다르게
장형은 얇은 막대기로 때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형은 60대, 70대, 80대, 90대, 100대로 나누어 형을 집행할 수 있으며
돈으로 형을 대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10대에서 50대까지는 태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돈으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매품팔이들은 장형이나 태형을 맞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매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받은 돈을 모두 가져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품팔이들은 자주 맞기도 하고
어쨌거나 살아나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살살 맞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때리는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목숨 값으로 보면 한없이 낮은 금액이지만
이들이 계속 매를 맞았던 이유는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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