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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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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

감자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여러가지 요리에 사용되며
모두 맛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쪄 먹어도 맛있고
볶아 먹어도 맛있고
빵을 만들거나 튀김을 만들어 먹어도 맛있습니다

그런 만큼 감자를 재료로 한 과자도 정말 많이 있죠

여러 종류의 감자 과자 중
얇게 썰어 칩 형태로 만드는 감자칩은
놀랍게도 진상 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1824년 뉴욕에 있는 사라토가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조지 스펙은
크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850년대 고향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토랑에 손님이 와서
감자튀김을 주문하게 됩니다

 


그는 평소처럼 감자를 요리해
손님에게 전달해 줬지만
손님은 감자가 너무 두껍고 축축하니
다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크럼은 주방으로 돌아가 감자를 다시 요리 했습니다
그는 감자를 처음보다 더 얇고 바삭하게 만들어
손님에게 전달합니다

하지만 손님은 이번에도 감자가 너무 두껍고 축축하다고 말합니다


화가 난 크럼은 이번에는 감자를 말도 안되게 얇게 썰어버리고
소금을 왕창 뿌려 먹을 수 없도록 음식을 만든 뒤
손님에게 전달합니다

크럼은 진상 손님을 골려 주기 위해 음식을 만들었지만
놀랍게도 손님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후 사라토가 마을에는 이 음식이 유명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얇은 감자칩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얇은 감자칩은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가 되었고
지역 이름을 따 사라토가 칩이라고 불렸습니다

1860년대 크럼은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고
사라토가 칩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라토가 칩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우리가 맛있게 먹는 감자칩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럼이 감자칩을 만들어내기 전
1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요리책을 보면
이미 감자칩을 만드는 요리 방법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1817년에 출판된 영국인 윌리엄 키치너의 책을 보면
감자를 얇게 썬 뒤 튀기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감자칩의 최초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감자를 얇게 써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꽤 어려운 요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후 슬라이스 칼이 등장하면서
감자칩의 난이도가 내려갔고
대규모로 만들 수 있는 장치가 도입되면서
감자칩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감자칩을 봉투에 담아 판매하던 것이
감자칩 과자의 최초가 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로는 감자칩 안에 소금을 따로 넣어줬고
1950년대부터는 소금이 묻어 있는 감자칩이 판매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감자칩이지만
크럼의 사라토가 칩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진상 손님과 크럼에 의해 감자칩이라는 음식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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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한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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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말고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

불은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위험한 것입니다

인류가 불을 처음 발견한 뒤로
화재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소방서가 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도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소방서가 없었던 시절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불의 역사가 아주 오래된 만큼
소방서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됐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6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는
한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426년 2월 15일 조선의 왕이 세종일 때
수도인 한성부(한양)에서 큰 화재가 발생합니다

이때 조선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단 하루 만에 집 2200채가 불타버렸고
재가 돼버려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명피해만 32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성부의 총 가옥 수는 약 2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화재로 2200채가 타버렸으니
10% 이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이 화재를 한성 대화재 혹은 한양 대화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명령을 내려야 했던 세종은 한성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 훈련 행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강무라고 하는데

1426년 2월 13일 세종은 강무를 위해
첫째 아들인 문종과 함께 강원도로 떠났습니다


사실 아내인 소헌왕후 역시 강원도로 같이 떠날 예정이었지만
금성대군을 임신하고 있었던 때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니
소헌왕후는 그야말로 만삭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한성부에 남겨진 소헌왕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화재 진압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는데

돈과 식량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종묘와 창덕궁이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불은 당일에 꺼지는 듯 보였으나
다음날 다시 번지면서 추가로 집 200채를 더 태운 뒤
사그라들었습니다

1426년 2월 16일 세종은 한성부에 화재가 난 것을 보고받았고
2월 19일 한성부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종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성부를 보고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2월 15일 화재가 발생하기 전
다른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흉년 피해 때문에 굳이 떠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한성부에서 가까운 경기도 지역으로 가려고 고민을 하기도 했고
강원도로 가는 중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돌아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한성부에 자신이 도착했을 때
신하들이 굳이 예의를 갖추지 말라고 전했으며
문밖에 나와 마중을 하지 말고 궁에서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하기 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줄 것을 명령했고
도착하자마자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화재가 또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을 적당히 철거해 간격을 띄웠으며
우물을 파 물을 저장하도록 했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을 붙잡아 고발하면 보상을 줬으며
만약 그 사람이 천민이라면 양민으로 옮겨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도
방화에 의한 화재가 끊이지 않았고
방화와 함께 도둑질도 많이 늘어나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1426년 2월 26일 세종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데
불을 금한다는 뜻으로 이곳을 금화 도감이라고 불렀습니다(禁火都監)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 그리고 조선 최초의 소방서입니다

금화 도감에서 일하는 소방수 중 소화 작업을 하는 사람을
금화군(禁火軍)이라고 불렀고
물을 긷고 나르는 사람을 급수비(汲水婢)라고 불렀습니다

금화 도감에 소속된 사람들은
지금의 소방수와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화재에 약한 초가집 지붕을 기와로 바꾸는 작업도 같이 했습니다

세종이 금화 도감을 설치한 이후
화재에 대한 대응이 확실히 빨라졌으며
효과적인 진압도 가능해졌습니다


금화 도감이 만들어지기 전 1422년에는
성을 수리하는 성문 도감(城門都監)을 만들기도 했는데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의 역할이 많이 겹쳤기 때문에

1426년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을 하나로 합쳤고
이것을 수성 금화 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화재 예방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성 안에 드므라는 것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안쪽에 들어가면 드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물을 담아놨습니다

과거에는 화재를 일으키는 귀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귀신은 아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죠


귀신이 화재를 일으키기 위해 궁에 들어왔다가
물이 담겨 있는 드므를 보게 되면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일 것이고

드므에 무서운 귀신이 있다고 착각해
화재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므를 설치해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후 1467년 조선의 왕이 세조일 때
금화군은 불을 멸하라 라는 의미로
멸화군(滅火軍)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50명으로 구성된 멸화군은
불을 끄는 것보다 불이 번지지 않게 하는데 더 중점을 뒀습니다


이들은 도끼와 쇠갈고리를 들고 다니며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트려 불길이 번지지 않게 했고

불이 많이 크지 않다면 물에 적신 천을 이용해
불을 껐습니다

멸화군의 활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멸화군 창설 이후 조선의 화재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1637년 조선의 왕이 인조일 때
쓸데없는 곳이라 하여 폐지되면서

세종이 만들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인 금화 도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근대화된 소방 장비가 들어오게 되면서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소방서인
경성소방서가(종로소방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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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왜 하필 귀신을 잡는다고 하는 걸까(해병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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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왜 하필 귀신을 잡는다고 할까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군인으로 구성된 국가 조직을 군대하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군대는 크게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해군 소속에 있는
해병대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죠

해병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은 귀신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귀신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귀신을 잡을 순 없겠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무섭고 강한 것들이 정말 많이 있는데
해병대는 왜 하필 귀신을 잡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해병대는 해군 소속의 전략기동부대로
1949년 4월 15일 진해 해군 덕산비행장에서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초대 사령관은 신현준이었는데
만약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바다를 통해 병력을 빠르게 진입시킬 수 있다면
초기에 진압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를 해서
해병대가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우리나라는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작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6월 27일 대전으로 피난을 갑니다

 


같은 날 유엔은 6.25전쟁에 유엔군 참전을 승인했고
7월 5일 북한군과 유엔군의 첫 전투가 오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유엔군 역시 북한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고
북한은 한강방어선, 금강방어선을 뚫고 빠르게 남하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 남은 방어선은 낙동강방어선뿐
이곳이 무너지면 그대로 북한에 의해 적화통일이 되는 것이었죠




북한은 이렇게 남하하면서 제주도까지 점령할 수 있었지만
해군이 그리 강하지 않아 제주도나 울릉도 같은 섬은
나중에 점령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많이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유엔군이 참전한 뒤로는 압도할 수 있는 병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군과 해군은 북한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이런 병력을 이용해
전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과
우리나라 군대는 인천에 상륙한 뒤 승리를 거듭하며
9월 28일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는데
이때 해병대가 아주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8월 17일에 있었던 통영상륙작전에서도 승리를 했으며
1951년 6월 4일 미국 해병도 실패했던 작전인
도솔산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도솔산 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에게
무적해병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게 됩니다

1951년 8월 31일에는 김일성고지(924고지) 및 모택동고지(1026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한국 해병대의 강인함은 미국에도 전달됐으며
통영상륙작전에 대한 취재를 온 미국의 마거릿 히긴스 기자가
한국의 해병대는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해병대는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하지만 히긴스 기자가 정말 이런 기사를 썼는지에 대한 증거는
지금까지 확인되고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승에서는 더 이상 적이 없는 무적해병이기 때문에
귀신을 대입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이죠

대부분의 어원이 그렇듯 귀신잡는 해병대 역시
유래를 정확하게 찾을 순 없었지만

우리나라 해병대가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고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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