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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율 무려 100% 어마무시했던 조선시대의 사채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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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율 100%? ㅎㄷㄷ 했더 조선시대 사채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일에 큰돈이 필요할 때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곤 합니다

이것을 대출 혹은 사채라고 말하는데
은행에서(1금융, 2금융) 돈을 빌리면 대출이라고 표현하고
대부 업체나 불법사업체에서 돈을 빌리면 사채라고 표현합니다

 


대출이든 사채든 중요한 건 이자가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출 이자율 평균은 5% 정도 된다고 합니다

대부 업체의 경우 업체마다 다르지만
법정 최고 이자율인 20%를 넘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법사업체의 경우엔
20%를 훨씬 넘어섭니다


조선시대에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사업을 급채, 방채, 흥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은 식리(殖利)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을 식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조선에서는 식리가 엄청나게 유행했습니다

나라에서 직접 사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들 양반들 심지어 스님들까지

돈을 좀 가지고 있다 하면 너도나도 식리에 뛰어들었는데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사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라에서 하는 식리는 공채라고 불렀으며
개인이 하는 식리는 사채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공채는 일반적으로 이자율이 20%
사채는 이자율이 50%였다고 합니다

식리의 이자를 이식이라고 했는데
50%가 넘어가는 이자는 장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자율 50%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일부의 식리는 이자율이 무려 100%였습니다

만약 내가 1만 원을 빌리면 갚아야 할 돈은 2만 원이 되는 셈이죠

게다가 1년 뒤에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이자를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1만 원을 빌렸는데 4만 원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심하게 괴롭히거나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으며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한 뒤 시체를 다른 곳에 버리고
그 사람이 자살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식리인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갚으려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직접 이자율을 정해주기도 했는데
왕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습니다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은 공채의 이자가 3%를 넘지 못하도록 했으며
19대 왕인 숙종과 21대 왕인 영조는
공채, 사채 구분 없이 모두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자가 아무리 쌓여도 원금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일리 혹은 자모상모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3년까지만 이자를 받고
그 이후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죠


대한제국 때에는 법으로 정한 최고 이자율은 20%였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금액마다 달랐지만 20~30%였습니다

외환위기(IMF)가 발생했을 때는 잠시나마 이자 제한을 폐지했고
2002년 다시 이자 제한을 부활시키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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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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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

 

기원전 207년부터 스파르타 왕의 자리에 올랐던 나비스는
부자들에게 재산을 빼앗아
많은 노비를 해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자신의 재산을 선뜻 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의 부자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재산을 주지 않기도 했죠


그래서 나비스는 재산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를 본뜬 장치를 이용했죠

이 장치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얼굴 부분을 아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공들였다고 합니다


장치에는 값비싼 옷을 입혀놨으며
두 팔은 최대한 벌려 고정시켜놨는데
얼핏 보면 마치 안아주려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비스는 재산을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 술을 잔뜩 먹인 뒤
자신의 아내를 소개해 준다고 말하며
아내를 닮은 장치가 있는 방으로 유인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장치를 안으려고 하면
고정이 풀려 장치가 그 사람을 끌어안게 되는 형태였는데

이 장치에 안긴 사람은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장치의 몸에는 날카로운 쇠못이 촘촘하게 박혀있었습니다
누군가 장치를 안으려고 하면 장치가 그 사람을 끌어안았고
장치에 박혀있는 쇠못에 찔리도록 설계되었던 것이죠

나비스는 이런 식으로 부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나비스 아내의 이름은 아페가였는데
여기에서 이름을 따 나비스가 사용한 이 장치를 나비스의 아페가
혹은 아이언 아페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페가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의해 전해져 내려왔는데
실제 장치는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아페가가 실존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한 철제 관을 이용해
범죄자들을 고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장치를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들어가기 충분한 크기이며
내부에 쇠못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는데
사람을 관에 넣고 문을 닫으면
쇠못이 사람을 찌르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주요 부위에는 쇠못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다 서서히 죽어가는 끔찍한 장치였죠

 


아이언 메이든은 과거에 사용됐다고 알려진
아이언 아페가와 비슷한 형식이었기 때문에
아이언 아페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필립 지벤키스는
1515년 독일에서 위조 화폐를 만든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아이언 메이든을 사용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아이언 메이든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벤키스는 1700년대 후반에 활동하던 철학자였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은 아이언 메이든 역시 실존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이언 메이든에 대한 다른 기록이 전혀 없고
현재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은 대부분이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죠


중세 유럽에서는 범죄자들에게 머리와 다리 부분이 뚫려있는
나무로 만든 통을 공공장소에서 입도록 하는 형벌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수치의 통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에 모욕감과 굴욕을 주는 형벌이었죠

또 수치의 통과 비슷하지만 팔 부분이 뚫려있는 것도 있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으며
이 형벌을 주정뱅이 망토라고 불렀습니다

 


주정뱅이 망토는 통을 입고 거리를 걸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에게 썩은 음식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합니다

아이언 메이든은 수치의 통이나 주정뱅이 망토를 착각해
지벤키스가 만들어낸 가상의 장치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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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형벌 도구였던 내가 현대에선 사랑받는 운동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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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찌한 형벌 도구였던 내가 현대에선 사랑받는 운동기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실내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런닝머신

헬스장에 없어서는 안 될 운동기구 중 하나로
운동을 하면서 티비를 볼 수 있다는 큰 장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구이기도 하죠

런닝머신 자체가 이미 영어지만
미국에서는 런닝머신을 트레드밀(treadmill)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트레드(tread)는 밟다라는 뜻을
밀(mill)은 방아를 찧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런닝머신과 트레드밀은 뭔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런닝머신은 1800년대 초반 영국 교도소에 있던
형벌도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기구라고 합니다



180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죄수들에게
사형당할 것인지 국외추방당할 것인지
교도소에 갈 것인지를 선택하게 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교도소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 같지만
당시 교도소의 환경은 그리 좋지 못하기도 했고
중노동 법이 있어 교도소에 있는 동안 노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목숨을 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죄수들이 교도소행을 선택했고
늘어나는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818년 영국의 기술자 윌리엄 큐빗은
발판이 있는 커다란 바퀴, 물레방아와 비슷한 기구를 만들어냅니다


발판을 밟으면 바퀴가 굴러가는데 제자리에서 구르기 때문에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기구였습니다

기구가 만들어진 이후 노동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기구 발판을 밟아 바퀴를 굴려야 했습니다

죄수들이 바퀴를 굴리면 바퀴가 굴러가는 동력을 이용해
물을 퍼올리거나 곡식을 빻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구를 트레드밀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트레드밀은 죄수 입장에서 굉장히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매일 6시간 동안 바퀴를 굴려야 했는데
이것을 매일 1500~4000m를 등반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걸어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죄수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고
영국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어
만들어진지 10년 만에 50개 이상의 교도소에서 사용되었고
미국에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도 높은 트레드밀 노동을 견디지 못한 죄수들이
하나 둘 사망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898년 죄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새로운 법이 만들어져
점점 쓰이지 않게 되다 1902년 완전히 금지시켜
영국에서는 더 이상 트레드밀을 형벌도구로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트레드밀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듯 했으나
1952년 워싱턴 대학의 로버트 브루스와 웨인 퀸튼 교수에 의해
평평한 롤러 형태의 의료기구로 재탄생하게 되었는데
폐나 심장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돼 실내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개인용 운동기구인 오늘날의 런닝머신이 되었습니다

과거 죄수를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이제는 운동기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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