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한국을 사랑한 친일파의 아들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한국을 먹여살린 친일파의 아들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르죠

이때 경복궁에 침입한 집단에는 조선군 훈련대도 있었는데
조선군 훈련대는 일본에 의해 창설된 부대로
훈련대대장은 조선 사람이었지만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파였습니다

당시 훈련대대장은 우범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범선 역시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조선인 중 하나였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1903년 고영근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인 아내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우장춘이었습니다




우범선이 살해당할 때 우장춘은 고작 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나빠져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1916년 도쿄의 한 전문대학에 들어가 농업을 전공하고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다른 종끼리 교배시키는 것을 교잡이라고 하는데
우장춘은 1935년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유채를 만들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갓을 만들어내고
양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에티오피아 겨자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우장춘의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다른 종끼리 교배를 시키는 경우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이것을 성공해 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시키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현재까지도 외국 교과서에 우장춘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장춘은 도쿄제국 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우장춘 이전에 조선인으로 농학박사를 취득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업적을 달성했지만 우장춘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45년 드디어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한 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분단의 슬픔을 뒤로한 채 어쨌든 우리나라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자원이 필요했고 인재가 필요한 시기였죠

그러던 중 우장춘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1947년 우장춘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우장춘을 우리나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장춘은 일본에 살며 비록 업적에 비해 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한국어도 못하는 그가 굳이 한국으로 올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우장춘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며
100만 엔의 생활비를 지급했는데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0만 엔은 10억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한국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의 기본이 되는 씨앗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우리나라의 농업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로 들어와
지금까지는 일본을 위해 일했지만
이제부터는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며
생활비로 받은 100만 엔을 연구에 필요한 책과
좋은 씨앗을 사는데 전부 써버립니다


일본에 있을 땐 학문적 연구를 중요시했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면서
우리나라 기후에 맞는 작물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한국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기도 하고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일파인 우범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해
상황은 더 극단적으로 흘러갔습니다

1953년에는 일본에 계신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뵙기 위해 일본에 가려고 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우장춘이 일본에 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우장춘은 한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연구소 근처에 우물을 하나 팠는데
이것을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을 담아
자유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우장춘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품질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결국 성과를 냈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당도가 높은 금싸라기 참외
여름철 평지에서도 자랄 수 있는 무를 만들어냈고

강원도에서 감자 산업, 제주도에서 감귤 산업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고추, 오이, 양파, 토마토 등 수많은 작물의 우수한 품종이
한국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배추하면 통통하고 뜯어도 뜯어도 잎이 계속 나오는
이런 모양의 채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길쭉하고 잎이 적은
이런 모양의 배추가 자랐습니다

우장춘은 이 배추를 개량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의 배추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식탁에 빠질 수 없는 김치는
우장춘의 업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가 식량난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우리나라 농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일본의 키하라 히토시이며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하며
농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이때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본 사람들이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이것이 잘못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1950년 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부터 1959년까지
우장춘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인정해 정부에서는 1959년 8월 7일
우장춘에게 훈장(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훈장을 받은 우장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줬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장은 조금 늦은 훈장이었습니다

1959년 8월 10일 우장춘은 십이지장에 생긴 문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치러진 첫 번째 사회장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우장춘이 살아있을 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이것을 거절할 정도로 우장춘은 권력보다
연구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장춘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항상 작업복과 고무신만 신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고무신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에는 우장춘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우장춘 기념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