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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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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2019년은 대한민국에게 꽤나 의미있는 해인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19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지 100주년이 된 해입니다

 

이번 영상을 제작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고작 1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렇게나 발전했구나

100년전에는 정말 힘들게 살았는데

그들이 있기에 100년 후 지금의 나는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구나

 

그리고 100년이 지나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등등

 

역사라는 것은 분명 학교다닐 땐 하품만 나오고 머리아픈 과목이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이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대한제국이 그 이전에는 조선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있을지도 모릅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역사적인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11일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은 3.1 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지난번에는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 29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역사가 끝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건을 말합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를 무단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해 시대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일본의 헌병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본 헌병은 치안 유지를 위해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결처분이란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 있으면

조사를 하지 않고 그 즉시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이 그냥 길을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너 범인인 것 같은데? 하면서 그냥 감옥에 가두는게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치활동이나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상황을 일본 헌병이 보게되면 그 즉시 제재를 가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선 해외로 나갈 필요가 있었고

만주(중국)와 연해주(러시아)쪽으로 많이 진출했습니다

 

만주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곤 했습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곳입니다

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상당히 많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봉오동 전투(홍범도)와 청산리 전투(김좌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중 한명인 이회영은

조선 최고의 부자 출신이었는데

재산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회영은 경술국치 이후에 집안의 재산을 급하게 처분했는데

이회영의 재산을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600억정도 된다고 합니다

명동일대가 전부 이회영 집안의 소유였다고 하네요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빠르게 처분했다는 점

그리고 처분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재산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의 재산은 600억 그 이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회영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오더라도 일본에게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쨌든 돈이 많다는 것은 큰 무기가 되니까요

 

하지만 이회영은 이것을 거절했고

안창하고 있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들어가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그 업적에 비해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현한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말할 때 절때 빠져서는 안되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세계에선 커다란 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은

러시아와 독일이 참전하면서 점점 커졌고

세계 여러나라가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뤘습니다

 

이것을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합니다

 

영국은 연합국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는데

과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연합국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연합국 소속이었든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란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가 결정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는 그들이 원한다면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실제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그냥 보기에 굉장히 좋은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 나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패전국인 동맹국 소속 나라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죠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가지를 처리하기 위해

동맹국과 연합국은 파리에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파리 강화 회의라고 합니다

 

파리 강화 회의역시 민족자결주의처럼 패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회의로

특히 독일을 많이 압박했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샤유 조약이 맺어지는데

조약의 내용이 독일에게 너무 가혹했던 탓인지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군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습니다

 

독립 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 소속인 김규식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돼 조선의 독립을 교구 했습니다

 

1919년 2월 1일에는 만주에서 무오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도 했고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서가 발표 됐습니다

 

이 시기에 국내에선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의 사망 원인이 일본의 독살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과거 고종이 업적이 어떻든 한 나라의 왕이고 황제였기 때문에

단순한 소문일지라도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상황이 강제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어서 반일감정은 더욱 커질수밖에 없었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 곳곳에서 독립활동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시작됐으며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3.1 독립 선언서가 발표됩니다

 

3.1 독립 선언서는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919년이 기미년이기 때문에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하필 3월 1일에 만세 운동을 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을까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원래 3월 3일에 독립 선언서 발표와 만세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장례식과 겹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하려고 했지만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들이 꽤 많았습니다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으로 기독교 사람들은 교회에 가야했죠

 

그래서 하루 더 앞당겨 3월 1일에 만세 운동과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한 것이죠

 

원래 3.1 운동은 탑골공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자칫 폭력적인 시위가 될까바 걱정했던 민족대표는

장소를 일방적으로 태화관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겐 어떠한 통보도 하지 않은채 말이죠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뒤

자수를 하고 자진 체포됩니다

 

3.1 운동을 이렇게 싱겁게 끝내버리려고 했다는 점과

이후에 친일파로 변질된 사람이 있다는 점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명칭과 업적이 비판 받기도 합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족대표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자발적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했습니다

 

3.1 운동은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3월 1일 단 하루만 한 것이 아니라 수개월동안 지속됐습니다

 

아무래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보니

만세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특히 제암리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최악의 만행중 한가지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뒤 무차별 사격과 함께 교회를 불태워버린 사건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석호필이라고도 불리는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에 의해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34번째 민족대표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죠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을 향한 국제 여론은 안좋아졌습니다

 

원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사건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사건을 주도한 아리타 중위를 재판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징계는 고작 30일 근신처분이었고

살인, 방화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독립 선언서 발표와 3.1 운동으로

세계 여러나라들에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혹은 독립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고종 황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을 이끌어줄 조직적인 단체(정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상하이)에 모였고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라고 말하며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러시아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힘이 분산되어있으면 좋지 않다는 의견과

상해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미국, 프랑스같은 세계 강대국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게 됩니다

 

상해는 조계지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죠

 

1919년 9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민국이 된 것입니다

 

미록 이것은 임시정부였지만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수립된 민주정부였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을 분리하는 삼권분립까지 하면서

민주주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해서

일제강점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말이죠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이 조금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언론사가 창간되기도 했고 조선을 지배하는 정책들이 완화되기도 했죠

 

그래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를 문화통치기간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진짜 대한민국의 역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던 때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던 때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를 말할 때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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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을까(일제강점기 이유)


은근한 잡다한 지식(은잡지)에는 여러분들의 뇌를 채워줄 지식, 정보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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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영상을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용이 평소보다 너무 길어서 1부 2부로 나눠야 할지

아니면 그냥 쭉 이어서 만들어야 할지


그동안 업로드 했던 은잡지 영상을 본다면 1부 2부로 나눠야 했지만

언제나 짧은 영상만 만들 것도 아니고

10분 넘어가는 영상도 재밌으면 많이 보니까 하는 생각에 그냥 나누지 않고

이어서 쭉 제작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쭉 따라서 오다보니 내용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그렇다고 중요한 내용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3월 1일은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나 특별한 날이지만

2019년 3월 1일은 더더욱 특별한 날입니다


일제강점기가 계속 되던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펼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죠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물론 99주년도 중요하고 98주년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이 있으니까요


뭐 어쨌든 일본은 왜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며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일까요?



동아시아라고 하면 동쪽에 있는 아시아 나라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이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아니라 청나라였죠


사실 청나라는 우물안 개구리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강한 수준은 아니었죠


하지만 청나라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존심이 강했고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본인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근대화를 진행시키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습니다


서양의 나라들은 비교적 덜 발단된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역을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죠


영국과 청나라 역시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청나라에게 모직물을 팔았으며

청나라는 영국에게 차를 팔았죠


하지만 청나라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영국의 모직물을 별로 사지 않았고 자신들이 자급자족 했습니다


영국은 근대화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청나라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마약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었고 청나라 국민들은 아편에 빠르게 중독됐습니다


청나라는 아편을 단속하기 시작했죠

마약상들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 아편을 팔길 원했고

결국 강제로 무역을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편때문에 일어난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840년의 일이죠



우물안 개구리였던 청나라는 영국에게 완패했으며

그 결과 강제로 무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자신들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방심해서 진 것이고 제대로 다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부에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근대화 운동은 186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역시 근대화를 진행중이었고

1868년부터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운동은 메이지유신이라고 부르죠


자존심이 강했던 청나라에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것으로 근대화를 진행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실패했지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성공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죠



우리나라도 역시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이었죠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나라들과 조약을 맺고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군대도 새롭게 창설했습니다

새로운 군대의 이름은 별기군이었죠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이 가르치는 일본식 신식 군대였습니다


별기군과 조선식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별기군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줬지만

구식 군대에는 좋지 않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월급을 13개월이나 밀리는 그야말로 조선판 열정페이를 강요했죠


심지어 밀린 월급을 쌀로 지급했는데

그마저도 불량 쌀을 지급하는 바람에 구식 군대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인물들과

민씨 일가, 그리고 별기군을 습격했죠


188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합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쪽 사람들을 말하며

이 당시 조선의 왕은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고

이들은 군란을 진압했죠


일본은 임오군란 때문에 일본 사람과 공사관이 피해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에 조선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보상을 약속하는 문서같은 것이었죠


이 조약을 제물포 조약이라고 합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중에는

일본 경비병이 조선에 들어온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습니다


과거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 무역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일부 사람들은 청나라가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강한 줄 알았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완패했기 때문이죠

청나라의 시대는 갔으니 청나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세력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마침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인 세력들에게 절호의 기회였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1884년에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부릅니다


갑신정변은 성공하는 듯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을 알아챈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청나라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일본은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죠



갑신정변은 12월 4일(양력)에 일어나 12월 6일에 끝났습니다

고작 3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은 더더욱 심해졌고

일본은 임오군란때처럼 비슷한 핑계를 대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에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지금 당장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지만

이후에 한쪽의 군대가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한쪽의 군대도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이 조약을 톈진조약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동안 조선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85년 텐진조약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대 혼란 상태였죠



양반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혼란 상태에서 다같이 조금 참고 조금 덜먹어야 했지만

자신들의 배는 빵빵하게 채워지길 원했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식량이 많이 나오는 곳)였습니다

식량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관리들은 더 많은 식량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농민들은 폭발했죠


농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고종은 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알아서 해결하지 않고 계속 외부의 힘을 빌린 것이죠


하지만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가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가 들어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죠


고종은 이것을 완벽하게 무시했습니다

감히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데 어디 일본의 군대가 들어온단 말인가

이런식으로 말하면서 말이죠


고종의 요청대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고종의 예상과 단리 일본의 군대는 바로 다음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농민들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일을 간섭하길 원하지 않았고

곧 모내기를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와 빠르게 합의 했습니다


사건이 종료되면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일본의 군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계속 머무를 구실을 찾고 있었죠


일본은 자신들이 알아본 결과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군대를 물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을 함께 개혁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며 요청을 무시했죠


이에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해버리고

고종에게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제시켰습니다



이것에 분노한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청일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도중에 일본은 조선을 서서히 변화시켰습니다

청나라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나라로 말이죠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조금씩 넣었습니다


이것을 갑오개혁이라고 합니다



청일전쟁 역시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강한줄 알았던 청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이것 때문에 진행중이던 양무운동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청나라에게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전쟁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습니다

청나라가 일본에게 보상을 하는 것과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죠


일본은 요동반도 진출에 성공하게 됐고

자신들의 목적인 만주지역까지 진출하길 원했습니다


만주 위쪽에는 러시아가 위치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일본이 점점 위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그냥 보고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양 강대국들과 한번에 싸울 수 없는 일본이기에

어쩔수없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죠


이것을 삼국 간섭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정부는 서서히 친러세력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자신들이 힘들게 영향력을 넣어놨더니

갑자기 러시아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시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사변 이후 친러세력의 힘은 줄어들었고

친일세력의 힘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도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고종은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세력을 몰아냈지만

이제 조선은 친일이 아니라 친러세력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건을 쭉 보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외부의 힘을 빌렸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주 약한 나라라는 것을 스스로 알려버린 셈이죠



경복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것을 대한제국 선포라고 하며 189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자신을 왕이 아닌 황제라고 불렀죠


러시아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쪽으로 영토를 넓히길 원했습니다


일본 역시 대한제국을 계속 노리고 있었죠


하지만 러시아를 혼자서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더이상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일본과 동맹을 한 것입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한 것이죠


누가 대한제국을 먹느냐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죠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앞섰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한다면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군인과 물자가 제때 도착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인과 물자가 도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러시아를 기습공격 했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을 갖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904년의 일이며 이것을 러일전쟁이라고 부르죠



일본의 계획이 좋았던 것일까요

많은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겼던 청일전쟁에 비해

러일전쟁은 일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자신들의 히든 카드인 발트함대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했지만

당시 일본의 함대도 아주 강했고 일본의 전략이 너무 좋았어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대패했고

이것으로 러일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러일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국력이 한계에 다달았죠


다행히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청일전쟁때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이라고 말했죠



러시아 내부 사정도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근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때 노동자들의 비폭력 시위도 많이 일어나고 있었죠


그런데 러시아 정부에서 노동자들을 사살해버리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국 모두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보상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중재 아래 러시아와 조약을 맺습니다


1905년의 일이며 이때 맺어진 조약을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하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도, 보호를 승인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것이 우니라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자기들끼리 이렇게 정했다는 것입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허락해준 셈입니다



러일전쟁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은 여전히 위태위태 했습니다


일본은 돈이 필요했고 자원이 필요했고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미국과 러시아가 승인까지 해준 시점이었기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이후 일본도 대한제국을 식민지배 한 것이죠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나게 됩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파견된 일본 대사관들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찬성을 받아내는데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조약입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됐습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보고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언제나 대륙 진출을 꿈꿨죠


일본의 목표는 만주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청나라 전체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조선은

일본이 먼저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언제나 기회를 보던 일본은 여러가지 사건을 핑계로

조선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들의 군대를 보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완전히 자기들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대륙 진출이라는 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배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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