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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기 위해 피를 마시고 피로 목욕을 했던 귀족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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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목욕을 즐긴 연쇄살인마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바토리 가문

그런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576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스테판 바토리) 역시 마찬가지이죠


그에게는 바토리 언너라는 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언너는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외삼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것과 함께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1575년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15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헝가리의 귀족인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을 했는데

1604년 페렌츠 백작이 전쟁을 하다 사망하는 바람에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헝가리의 차흐티체라는 성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사망하는 바람에
커다란 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페렌츠 백작이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44살이었는데
조금씩 시작되는 노화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르제베트의 시녀가 시중을 들다 실수를 했고
화가 난 에르제베트는 시녀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때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시녀의 뺨에서 피가 났고
피는 에르제베트에게 조금 튀게 되었죠

 


에르제베트는 곧바로 피를 닦아냈는데
이상하게 피를 닦아낸 부분이
조금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의 피가 노화를 막아주고
젊음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일자리를 준다는 핑계를 대며
마을의 젊은 여자들을 성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뽑아냈습니다

처음엔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는 정도였지만
이윽고 더 많은 피가 필요해진 에르제베트는
코나 입술을 자르기 시작했고
결국엔 데리고 온 여자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뽑아낸 피는 마시거나 목욕을 했습니다
피를 온몸에 바르고 또 바르며
젊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죠

마을의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에르제베트는 이름 있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녀가 많이 필요하나보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1610년 에르제베트가 여전히 피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헝가리 당국은 뒤늦게 에르제베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는 죄르지 투르조라는 사람이 맡았는데
그가 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있는 여자 한 명과
아직 살아있는 여자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죄르지 투르조는 곧바로 에르제베트와
그녀를 따르던 하인 4명을 체포했고
살인 행위와 피의 목욕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에르제베트가 살해한 여성의 수는
600명이 넘었습니다

하인 4명 중 3명은 그녀의 행위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사형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진 않았고
자신이 머물던 성인 차흐티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범죄 행위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 아닌가 생각 될 수 있지만
창문도 없어 빛 조자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이라
당시 귀족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성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다
1614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역사상 다시없을 잔혹한 연쇄 살인마로 기억될 뻔했지만
1980년대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517년에 있었던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는 루터파와 칼뱅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터파와 칼뱅파는 같은 기독교지만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죠


바토리 가문은 칼뱅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죄르지 투르조는
아이러니하게 루터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하인들의 자백과 그녀의 일기장 때문이었습니다


일기장에는 그녀의 범죄 행위가 적혀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될 수 있는 이 일기장은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하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백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바토리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1610년 에르제베트가 재판을 받은 해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인 바토리 가보르는 암살을 당할뻔했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였던 바토리 지그몬드는
역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바토리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루터파를 지지하는 죄르지 투르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피로 목욕을 했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피에는 피브린이라는 물질이 있어
몸 밖으로 나오면 금방 굳어지는 데다
피비린내라고도 부르는 것처럼 악취를 풍깁니다

몇 방울 떨어트려 목욕을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피 자체로 목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르제베트가 정말 살인을 했는지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
이제 와서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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