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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귀신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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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

여러분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저는 귀신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귀신의 존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마냥 없다고 말하기는 또 애매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과학 기술이 많이 발전한 덕분에
발생하는 괴이한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는
귀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막기 위한 대비책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죠

그중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방법도 있는데
1486년 조선에서는 귀신을 잡기 위해
대포를 사용하려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성종실록을 보면 1486년 11월 10일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창손의 집과 호조 좌랑이었던 이두의 집 그리고 성 안에
귀신이 나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귀신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옮기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나타나 음식을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유문충의 집에는 쥐가 나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괴이한 현상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지만
예조 판서 유지가 이것을 언급하며
기양하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서 기양은 화는 물러나고 복은 오길 바라며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유지는 최근 귀신이 자주 나타나니
무언가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며 임금에게 이야기했던 것이죠



보통 귀신이 나타나면 귀신을 퇴치하는 작업을 하거나
귀신의 원한을 풀어줘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합니다

유문충은 절을 하는 쥐를 보고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해 쌀을 주고 물러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넘기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엉이가 들어온 게 뭐 놀랄 일인가 싶겠지만
조선시대에는 부엉이가 우는 것을 불길하게 여겼고
부엉이가 울면 화를 풀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지내는 제사를 해괴제라고 하죠

 


정창손 역시 집에 귀신이 나타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종 역시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없어진다고 말하며 유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유지의 의견에 반대했지만
유지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화포를 이용해 귀신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판서는 지금으로 따지면 장관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지는 예조판서였으니 교육부 장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창손의 직책인 영의정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교육부 장관이 회의를 하는데
교육부 장관이 국무총리 집에 귀신이 나오니 대포를 한번 쏴보자며
대통령에게 건의를 해본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선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쿨하게 거절했죠


그렇다면 유지는 왜 이런 의견을 낸 것일까요

예전부터 음기를 가진 귀신은 양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양기의 기운이 가장 강한 것은 불이기 때문에
화포를 이용해 귀신을 몰아내고자 한 게 아닌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지는 1453년 단종 때부터 벼슬을 시작했으며
세조를 거처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계속 벼슬을 이어온
제법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1482년 유지가 병조판서였을 때
신정이 차첩을 위조한 것을 알고도 숨겨준 죄로
탄핵당하기도 했었습니다

 


여기서 신정은 병조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름이고
차첩은 관리를 임명하는 문서를 말합니다

즉 유지의 부하 직원이 공문서를 위조해 사람을 뽑았는데
이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죠

어쩌면 유지에게 이 사건은 꽤나 굴욕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482년 유지의 징계를 논하는 자리에 정창손이 있었는데
아마 유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소심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런 발언을 한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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