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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피가 모여 만들어진 축구팀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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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축구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는 많은 축구팀이 있었고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리그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에 의해 대부분의 축구팀이 해산되었죠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독일은 소련의 동독과
미국, 영국, 프랑스의 서독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수도였던 베를린 역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축구팀은 다시 창단되었는데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동독과 서독이었기 때문에
축구 리그 역시 따로 운영되었습니다

 


1966년 동베를린을 연고지로 하는
FC 우니온 베를린이라는 축구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니온 베를린은 창단과 동시에 2부 리그에서 우승해
1부 리그로 승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이미 1부 리그에 베를린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포어베르츠 베를린, bfc 디나모)
우승을 하고도 1부 리그에 승격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또 좋은 성적을 거둬 유럽 대항전에 진출할 기회가 생겼지만
소련의 영향을 받는 팀에게 제재를 가하며
재정적 위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독일이 다시 통일되었을 때
축구 리그 역시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동독 리그에서 뛰던 축구팀은 서독에서 만든 리그로 들어가게 되었죠

당시에는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
2부 리그인 2. 분데스리가, 3부 리그인 오버리가로 운영되었습니다

우니온 베를린은 오버리가에서 시작했지만
1993년, 1994년 우승을 차지하며
오버리가에 있기엔 무대가 좁다는 걸 증명했지만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2부 리그로 올라가지 못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3부 리그인 레기오날리가로 가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문제를 해결하고
2부 리그에서 활약하던 우니온 베를린은
저조한 성적을 보이다 2004년 결국 3부 리그로 강등 당하고
2005년엔 4부 리그로 강등당하고 맙니다

특히 2004년엔 재정적 문제가 또 터지면서
리그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팀이 해체될 수 있는 수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니온 베를린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팬들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헌혈을 하면 문화상품권을 주거나 영화관람권을 줍니다

독일에서는 헌혈을 하면 돈을 준다고 합니다

팬들은 돈이 부족한 우니온 베를린을 위해 헌혈을 했고
받은 돈은 우니온 베를린에게 기부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만 약 20억 원 정도
우니온 베를린은 팬들의 피 덕분에 다시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었고
2008년엔 새롭게 만들어진 3부 리그인 3. 리가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노후화된 관중석 일부가 무너져 시즌을 시작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러자 이번에도 팬들이 나섰습니다
각자 삽을 들고 와 경기장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여가시간을 바쳤고 주말을 바쳤습니다

그 결과 우니온 베를린은 2009년 2부 리그로 올라갔고
2019년 팀 역사상 최초로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우니온 베를린의 팬들 중 일부는 자신의 피를 바쳐 지켜낸 팀이
1부 리그에서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없는 사망한 팬들을 기리기 위해
분데스리가 개막전에 그들의 사진을 가져와 함께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축구팬들은 잘 아시겠지만 분데스리가에는 어우뮌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차피 우승은 뮌헨이라는 뜻인데
분데스리가에 있는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이
초반에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 우승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59년 동안 31번 우승을 했고
현재 10년 연속 우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즌 우니온 베를린이
뮌헨의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뮌헨이 우승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번 시즌은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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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고의 검색 엔진 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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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검색 엔진

뭔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얻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인터넷 검색을 합니다

이때 어떤 검색 엔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조금은 다르게 나오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론 구글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네이버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그 이전엔 야후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인터넷이 없었을 땐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민감한 정보를 물어보거나
범죄자를 심문하는 경우 알려주지 않으려고 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상대의 입을 열기 위해
물리적 검색 엔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련된 사람을 심문해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부의 범죄자들은 입을 꾹 닫기 때문에
이들의 입을 열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엔 고문을 하는 것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죠

조선에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넓적한 몽둥이를 이용해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곤 했는데
이것을 형문이라고 불렀습니다

형문은 보기보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정강이를 맞다 죄인이 죽는 경우도 자주 있었죠


그래서 한번 때릴 때 30번 이상 때리면 안 됐고
형문을 다시 집행하기 위해선 3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만약 형문을 버티고 입을 열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낙형으로 넘어갔는데
낙형은 불에 달군 쇠를 몸에 지지는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낙형은 기원전 1600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중국의 고대 국가 은나라의 주왕이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극을 보면 쇠를 온몸에 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럴 경우 죄인이 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 시행될 때는 발바닥을 지졌다고 합니다


인간은 몸이 불에 탈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을 주는 낙형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끔찍할 수밖에 없었고
당하다 보면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1498년 9월 16일 연산군일기에는
형문을 버틴 죄인에게 낙형을 썼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는 내용이 있고

1507년 1월 27일 중종실록에는
역시 형문을 할 때는 입을 열지 않다가
낙형을 하니 바로 입을 열었다는 내용


1612년 10월 28일 광해군일기에는
낙형을 했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낙형은 그야말로 당시에 사용된 최고의 검색 엔진이었던 것이죠



지금의 검색 엔진도 가끔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낙형 역시 최고의 검색 엔진이었지만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형은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 역시 낙형을 자주 사용했는데
어느 날 치료를 위해 뜸을 뜬 것도 이렇게 아픈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건 얼마나 아프겠냐며
죄인에게 동정심이 생길 수 있으니 낙형을 폐지하라고 말해
1733년 이후부턴 낙형은 공식적으론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서 역할을 했던 포도청에선
도적들을 심문하기 위해 여전히 사용하기도 했고

도망가거나 물건을 훔친 노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양반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낙형은 살이 달궈지는 소리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지글이라고 불리고 있기도 한데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인권 문제로 없어진 검색 엔진이지만
아주 가끔 비공식적으로 다른 형태의 검색 엔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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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문에 만들어진 나치를 위한 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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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위해 만들어진 음료수

 

 

1886년 미국의 약사인 존 펨버턴에 의해 만들어진 코카콜라
만들어질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1888년 에이서 캔들러라는 사람이 코카콜라에 대한 권리를 인수하고
1892년 코카콜라 컴퍼니를 설립한 이후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당시 코카콜라는 미국에선 인기가 있었지만
아직 세계적인 음료는 아니었습니다

1923년 로버트 우드러프라는 사람이 코카콜라의 사장이 된 이후
세계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을 후원하게 되면서
코카콜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판매량이 많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나치당이 집권을 잡은
나치 독일 시기였는데(1933년)
히틀러 역시 코카콜라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직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카콜라는 여전히 독일에서 판매되었고
여전히 인기있는 음료였습니다

심지어 일부의 군인들은 수통에 콜라를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코카콜라 독일 지사의 지사장은 막스 카이트였는데
나치당이 집권한 독일에서 코카콜라를 계속 팔기 위해
나치식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41년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이
일본에게 기습 공격 당하게 되면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독일로 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했는데
이때 코카콜라의 재료가 되는 원액 역시 차단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참전 이후 독일에선 코카콜라를 먹을 수 없었죠



하지만 코카콜라에 대한 막스 카이트의 충성심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계속 일하길 원했고
독일에서 코카콜라를 만들길 원했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코카콜라를 원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수통에 코카콜라를 넣어 마시던 군인들이 많이 그리워했죠

이들은 어쩔수 없이 물을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물은 약품으로 정수한 물이라
맛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이트는 화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탄산음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전쟁으로 충분한 물자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먹다 남은 음식, 치즈를 만들고 남은 액체
과일 부스러기 같은 것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카이트는 여기에 사탕무 설탕, 탄산을 합쳐
코카콜라와 전혀 다른 음료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환타입니다

카이트는 음료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직원들과 회의를 했는데
좀처럼 적당한 이름이 나오지 않자
상상력을 좀 발휘해봐 라고 말했는데
상상력은 독일어로 Fantasie였고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한 직원이
Fanta라는 이름을 제안해 음료의 이름이 환타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환타는 찌꺼기로 만들어져
질이 좋지 않은 음료였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흐름이 좋지 않게 흘러갔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나치 군인들에게
힘을 주는 음료이기도 했죠

군인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환타를 좋아했는데
전쟁으로 식자재가 부족한 상황속에서
환타를 설탕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다시 독일에 있는
코카콜라 공장을 가동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열악한 환경속에서 환타를 만들고 있는
막스 카이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코카콜라의 대표인 로버트 우드러프는 이것에 감명해
막스 카이트를 코카콜라 유럽 책임자로 승진시켜줬습니다

하지만 환타는 나치에게 힘이 되기도 했고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음료, 나치를 상징하는 음료였기 때문에
생산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다 1950년 코카콜라의 라이벌인 펩시가 새로운 음료를 출시하자
경쟁을 위해 이탈리아 오렌지를 이용해 1955년 환타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환타 역시 인기를 끌었고
이후에 여러 가지 맛의 환타가 만들어졌습니다

환타를 만든 막스 카이트는 나치식 경례를 하고
환타를 나치 군인들에게 공급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나치 독일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다는 점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
전쟁 기간동안 환타를 팔아 번 돈은
나치가 아닌 미국에게 넘겼다는 점 때문에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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