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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친일파의 아들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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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먹여살린 친일파의 아들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르죠

이때 경복궁에 침입한 집단에는 조선군 훈련대도 있었는데
조선군 훈련대는 일본에 의해 창설된 부대로
훈련대대장은 조선 사람이었지만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파였습니다

당시 훈련대대장은 우범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범선 역시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조선인 중 하나였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1903년 고영근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인 아내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우장춘이었습니다




우범선이 살해당할 때 우장춘은 고작 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나빠져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1916년 도쿄의 한 전문대학에 들어가 농업을 전공하고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다른 종끼리 교배시키는 것을 교잡이라고 하는데
우장춘은 1935년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유채를 만들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갓을 만들어내고
양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에티오피아 겨자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우장춘의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다른 종끼리 교배를 시키는 경우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이것을 성공해 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시키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현재까지도 외국 교과서에 우장춘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장춘은 도쿄제국 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우장춘 이전에 조선인으로 농학박사를 취득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업적을 달성했지만 우장춘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45년 드디어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한 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분단의 슬픔을 뒤로한 채 어쨌든 우리나라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자원이 필요했고 인재가 필요한 시기였죠

그러던 중 우장춘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1947년 우장춘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우장춘을 우리나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장춘은 일본에 살며 비록 업적에 비해 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한국어도 못하는 그가 굳이 한국으로 올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우장춘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며
100만 엔의 생활비를 지급했는데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0만 엔은 10억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한국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의 기본이 되는 씨앗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우리나라의 농업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로 들어와
지금까지는 일본을 위해 일했지만
이제부터는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며
생활비로 받은 100만 엔을 연구에 필요한 책과
좋은 씨앗을 사는데 전부 써버립니다


일본에 있을 땐 학문적 연구를 중요시했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면서
우리나라 기후에 맞는 작물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한국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기도 하고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일파인 우범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해
상황은 더 극단적으로 흘러갔습니다

1953년에는 일본에 계신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뵙기 위해 일본에 가려고 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우장춘이 일본에 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우장춘은 한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연구소 근처에 우물을 하나 팠는데
이것을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을 담아
자유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우장춘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품질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결국 성과를 냈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당도가 높은 금싸라기 참외
여름철 평지에서도 자랄 수 있는 무를 만들어냈고

강원도에서 감자 산업, 제주도에서 감귤 산업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고추, 오이, 양파, 토마토 등 수많은 작물의 우수한 품종이
한국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배추하면 통통하고 뜯어도 뜯어도 잎이 계속 나오는
이런 모양의 채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길쭉하고 잎이 적은
이런 모양의 배추가 자랐습니다

우장춘은 이 배추를 개량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의 배추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식탁에 빠질 수 없는 김치는
우장춘의 업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가 식량난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우리나라 농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일본의 키하라 히토시이며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하며
농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이때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본 사람들이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이것이 잘못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1950년 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부터 1959년까지
우장춘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인정해 정부에서는 1959년 8월 7일
우장춘에게 훈장(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훈장을 받은 우장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줬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장은 조금 늦은 훈장이었습니다

1959년 8월 10일 우장춘은 십이지장에 생긴 문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치러진 첫 번째 사회장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우장춘이 살아있을 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이것을 거절할 정도로 우장춘은 권력보다
연구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장춘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항상 작업복과 고무신만 신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고무신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에는 우장춘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우장춘 기념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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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수백의 왜구를 물리친 고려의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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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몰살시킨 고려의 노비

바다 위에서 배를 공격하고
물자를 약탈하는 집단을 해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과거에는 해적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일본 해적에 의한 피해가 많았는데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죠

 

 


기록을 보면 1350년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42년 동안 보고된 것만 왜구의 침략은 500회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한 달에 한 번은 왜구가 침략해 물자를 약탈해갔다고 볼 수 있죠

왜구는 해적이기 때문에 해안가 근처를 주로 침략했지만
1350년 이후부터 침략 빈도가 늘어나더니
활동 범위를 내륙까지 늘렸습니다

그 결과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게 됐고
조세로 거둬드린 곡물을 옮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고려가 왜구의 방어를 잘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왜구는 물자를 약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는데

이들을 보호해야 할 군사들은 왜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 바빴다고 합니다

 


1372년 강릉 지역에 어김없이 왜구가 침략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군사들은 도망갔고
마을 사람들은 왜구에게 죽게 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강릉에는 관노로 있었던 이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옥은 고려 말 고려의 개혁을 꿈꿨던 신돈의 최측근인
이춘부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돈은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의 신뢰를 받게 되었고
신돈의 최측근이었던 이춘부는 신돈의 입지가 올라가게 되면서
출세의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1371년 반란을 꿈꾼다는 혐의로 신돈은 처형당하게 되고
최측근이었던 이춘부 역시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이옥은 귀양당해 관노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옥은 활을 굉장히 잘 다뤘으며
과거 벼슬에 있었을 때 용맹함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강릉에 왜구가 침략하자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이옥은 강릉을 지키기 위해 왜구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활을 잘 쏜다 하더라도
혼자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옥은 독특한 전략을 생각해냅니다

 


결국 여러 명을 상대하기 위해선 충분한 화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리 숲에 들어가 나무에 화살을 꼽아두었죠

이옥은 침략한 왜구와 싸우다
도망치는 척 숲으로 유인했고
준비한 화살을 모두 사용한 뒤에는
나무에 꼽아둔 화살을 이용해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일본은 길이가 긴 장궁을 사용하기로 유명합니다
장궁의 위력은 뛰어나지만
길기 때문에 기동력에서 단점을 보여줍니다

숲으로 들어온 왜구는 장궁 때문에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이옥이 준비한 전략에 완벽하게 당해 몰살되었습니다

귀양당한 노비 한 명이 왜구로부터 강릉을 지내켜낸 것이죠

이것을 이옥의 강릉전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릉을 침략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왜구가 고려를 침략할 때
해적선이 적게는 20척, 많게는 400척까지 왔다고 합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척에 20명~40명까지 탄다고 하니
이옥 혼자 상대한 왜구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이옥은 왜구를 무찌른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관직으로 복귀했으며
이옥의 활 기술과 전략은 좋은 교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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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기 위해 피를 마시고 피로 목욕을 했던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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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목욕을 즐긴 연쇄살인마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바토리 가문

그런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576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스테판 바토리) 역시 마찬가지이죠


그에게는 바토리 언너라는 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언너는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외삼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것과 함께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1575년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15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헝가리의 귀족인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을 했는데

1604년 페렌츠 백작이 전쟁을 하다 사망하는 바람에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헝가리의 차흐티체라는 성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사망하는 바람에
커다란 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페렌츠 백작이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44살이었는데
조금씩 시작되는 노화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르제베트의 시녀가 시중을 들다 실수를 했고
화가 난 에르제베트는 시녀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때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시녀의 뺨에서 피가 났고
피는 에르제베트에게 조금 튀게 되었죠

 


에르제베트는 곧바로 피를 닦아냈는데
이상하게 피를 닦아낸 부분이
조금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의 피가 노화를 막아주고
젊음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일자리를 준다는 핑계를 대며
마을의 젊은 여자들을 성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뽑아냈습니다

처음엔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는 정도였지만
이윽고 더 많은 피가 필요해진 에르제베트는
코나 입술을 자르기 시작했고
결국엔 데리고 온 여자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뽑아낸 피는 마시거나 목욕을 했습니다
피를 온몸에 바르고 또 바르며
젊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죠

마을의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에르제베트는 이름 있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녀가 많이 필요하나보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1610년 에르제베트가 여전히 피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헝가리 당국은 뒤늦게 에르제베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는 죄르지 투르조라는 사람이 맡았는데
그가 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있는 여자 한 명과
아직 살아있는 여자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죄르지 투르조는 곧바로 에르제베트와
그녀를 따르던 하인 4명을 체포했고
살인 행위와 피의 목욕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에르제베트가 살해한 여성의 수는
600명이 넘었습니다

하인 4명 중 3명은 그녀의 행위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사형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진 않았고
자신이 머물던 성인 차흐티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범죄 행위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 아닌가 생각 될 수 있지만
창문도 없어 빛 조자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이라
당시 귀족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성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다
1614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역사상 다시없을 잔혹한 연쇄 살인마로 기억될 뻔했지만
1980년대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517년에 있었던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는 루터파와 칼뱅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터파와 칼뱅파는 같은 기독교지만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죠


바토리 가문은 칼뱅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죄르지 투르조는
아이러니하게 루터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하인들의 자백과 그녀의 일기장 때문이었습니다


일기장에는 그녀의 범죄 행위가 적혀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될 수 있는 이 일기장은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하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백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바토리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1610년 에르제베트가 재판을 받은 해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인 바토리 가보르는 암살을 당할뻔했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였던 바토리 지그몬드는
역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바토리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루터파를 지지하는 죄르지 투르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피로 목욕을 했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피에는 피브린이라는 물질이 있어
몸 밖으로 나오면 금방 굳어지는 데다
피비린내라고도 부르는 것처럼 악취를 풍깁니다

몇 방울 떨어트려 목욕을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피 자체로 목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르제베트가 정말 살인을 했는지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
이제 와서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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