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보다 참혹했던 사건 조선 경신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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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요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먹기 위해 산다 쪽입니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도 너무나 많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다 먹을 때까지는 죽고싶지 않네요
저는 영생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모든 생물은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먹지 못하면 영양분이 생기지 못하고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이정도만 되도 다행인데 계속 먹지 못하면 굶주림에 죽게되는 경우도 있죠
https://www.youtube.com/watch?v=4c-HNx58cjs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습닏
집에서 빗소리를 듣고 시원한 날씨가 되는 것은 좋지만
습기가 너무 많아서 찝찝한 날이 되기도 하고
밖에 나가야 하는 경우 우산이 있어도 젖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다면 좋을 것 같지만
식물은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곡식이나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되겠죠
채식을 못하면 육식을 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동물들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동물들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식물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농사도 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을 흉년이라고 하며
흉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비가 오지 않아도
저장해 놓은 식량도 많이 있고 인공 식량도 많이 있기 때문에
기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자연에만 의지해야했던 과거라면 어떨까요?
1670년대 조선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를 할 수 없었고
심각한 기근이 오면서 굶주림 때문에 100만명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경술년인 1670년에서 신해년인 1671년 사이에 발생했기 때문에
경술년과 신해년의 앞글자를 따서 경신 대기근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끝나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먹을 게 없어서 인육을 먹는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이들을 처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기근의 조짐은 1690년 음력 1월부터 보였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유성이 많이 떨어지고 운석이 떨어지는 곳도 있었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우주 먼지가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먼지가 태양을 가려 낮이지만 어둡고 추운날이 계속 됐습니다
그리고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 됐는데
햇무리와 달무리는 원래 구름이 많으면 관측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구름이 많으면 비가 올 확률이 높기 때문에
햇무리와 달무리가 관측 된다면 다음날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발생된 햇무리와 달무리는 구름이 아닌
우주 먼지에 의해 발생된 것이었죠
그래서 비는 오지 않았고 추운날만 계속 됐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지진이 관측되기도 했으며
충청도와 평안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더니
결국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죠
음력 3월이 되자 슬슬 모내기를 준비해야 했지만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내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과 다르게 저장된 식량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이때 조선의 왕은 현종이었는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우제는 총 8번을 지냈지만
기우제 동안에는 비는 내리지 않았고
눈이 내리거나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피해를 줬습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되기 때문에 농사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눈에 의해 어린 식물들이 얼어버릴 수 있으며
우박이 오면 식물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봄에 내리는 눈이나 우박은 농사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박이나 눈이 잠깐 내린 것이 아니라
음력 4월, 5월, 6월에도 내렸으니
1670년의 농사는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봐도 무방했죠
우박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농사가 망해버린 상황에
메뚜기 떼와 참새 떼가 덮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은 물론
나무의 도토리나 밤도 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음력 5월 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제 내리던 비는 오늘도 내렸고 내일도 내렸고 내일 모레도 내일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계속 내려 가뭄 이후에는 홍수가 조선을 덮쳐버렸습니다
특히 호남지방의 홍수 피해가 컸는데
호남지방은 조선의 곡창지대로 식량이 많이 있는 곳중 하나였습니다
홍수로 인해 사람뿐만 아니라 소들도 많이 죽었는데
이때 하필 구제역도 터지면서 수만마리의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에 도움을 주는 소들을 고맙게 생각해 도축을 금지 했었습니다
소고기를 먹는 것은 나라에서 금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먹을게 너무 없어서 소의 도축을 일시적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고기로 대기근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애초에 소고기를 자주 먹지 않던 사람들이라 갑자기 몸에 소고기가 들어와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고
이미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탈이 나니 몸은 낫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구제역 때문에 소가 많이 병들었는데 그런 소를 먹게 되면서
위험한 상황이 계속 됐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으로 죽어간 1670년
1671년에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죠
심지어 대기근의 영향은 궁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창덕궁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과 궁녀들에게도 전염병이 퍼지나
현종은 거처를 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궁궐에도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많은 관리들이 궁을 탈출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현종은 사직서를 수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사직서를 수리해줬다고 합니다
이때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사직서를 14번이나 제출했지만
현종은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의 사직서만은 수리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종은 경덕궁에서 생활을 하다가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궁궐 밖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닏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고
집안에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도둑질을 해가거나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해쳐 옷을 훔쳐 입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먹을게 너무 없어서
자신의 자식을 삶아 먹거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굶어 죽는 사람들의 비율을 조금 줄여보고자
진휼소를 마련해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흉년이었던 탓에
굶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진휼소의 쌀로는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휼소에서 밥을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부부가 함께 밥을 기다리다가 남편이 죽었음에도
밥을 다 먹은 이후에 슬퍼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세금을 쌀로 걷고 땅이 적은 사람들의 세금을 조금이나마 감면 해주는
대동법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마을의 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호패법이나 오가작통법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없었고
약 1000만명정도로 추정된느 조선의 인구 중
약 100만명정도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공식적으로 516만명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것은 호적에 등록된 인구만 말하는 것으로
상당히 많은 머슴이나 노비는 제외된 숫자입니다
조선 인구가 500만인데 사망 인구가 100만이라면
조선 인구의 20%가 죽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조선 인구의 20%가 죽은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망 인구 역시 100만명이다 아니다 라는 말이 많지만
지방 관리들이 자신의 실적때문에 사망 인구를 축소해서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어
100만명 혹은 그 이상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 이후 조선은 인구를 회복하나 했지만
을해년인 1695년에서 병자년인 1696년 사이에 대기근이 또 일어나
약 15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을해년과 병자년의 앞글자를 따 을병 대기근이라고 말합니다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의 피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임진왜란(1592~1598)보다 더 참혹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신 대기근때 먹을게 너무 없어서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했고
과거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던 사건인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있기도 했습니다
또 1637년 2월 24일에는 오랑캐라고 부르던 나라에게
조선의 왕인 인조가 직접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 비석을 세우는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지 말자는 의견이 많이 있었죠
하지만 을병 대기근 때는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경신 대기근이었지만
그나마 한양의 상황은 조금 나았습니다
여기서 조금 나았다는 것은 사망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비에 아주 조금 적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양은 왕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은 지원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한양에는 진휼소나 구휼체제가 잘 운영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때는 지금처럼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는데
경신 대기근 이후로 또 대기근이 올까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렸는데
한양(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집중 된 것이 이때부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때는 얼어죽는 사람의 숫자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후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온돌이 보급화 되기도 했습니다
온돌은 만드는데도 유지하는데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양반들도 일부의 방에만 사용했는데
때마침 경신 대기근 이후 값싼 온돌이 발명되면서
온돌을 보급화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돌이 보급화 되면서 사람들이 나무 땔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산이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 이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나마 미 개척지인 만주쪽으로 향했는데
이때 청나라와 조선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은 영토의 경계를 확실하게 정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1670년에서 1671년에 일어났던 경신 대기근과
1696년에서 1695년에 일어났던 을병 대기근의 원인은
이상 기후 현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상 기후 현상은 13세기 초에서 17세기 말까지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관측 됐습니다
알프스의 빙하가 확장돼 목초지가 줄어들기도 했으며
폴란드는 대홍수를 겪었고
영국의 템스강이 얼어붙은 사건
중국의 감귤 농장이 망해버린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봄, 여름이 왔지만 이상하게 추운 현상이 계속 됐기 때문에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부르기도합니다
소빙하기는 태양의 활동이 감소해 흑점이 줄어들고
지구로 들어오는 열이 1도는 낮아졌기 때문에 생겼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구의 온도가 1도만 높아져도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지구의 온도가 1도만 낮아져도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소빙하기는 500년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예측에 의하면 2020년~2030년사이에 소빙하기가 또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자연에 의지해야만 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비축해둔 식량도 많고 비가 조금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참사는 모르겠지만 대기근의 참사만큼은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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