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을까(일제강점기 이유)
은근한 잡다한 지식(은잡지)에는 여러분들의 뇌를 채워줄 지식, 정보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번 영상을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용이 평소보다 너무 길어서 1부 2부로 나눠야 할지
아니면 그냥 쭉 이어서 만들어야 할지
그동안 업로드 했던 은잡지 영상을 본다면 1부 2부로 나눠야 했지만
언제나 짧은 영상만 만들 것도 아니고
10분 넘어가는 영상도 재밌으면 많이 보니까 하는 생각에 그냥 나누지 않고
이어서 쭉 제작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쭉 따라서 오다보니 내용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그렇다고 중요한 내용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3월 1일은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나 특별한 날이지만
2019년 3월 1일은 더더욱 특별한 날입니다
일제강점기가 계속 되던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펼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죠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물론 99주년도 중요하고 98주년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이 있으니까요
뭐 어쨌든 일본은 왜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며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일까요?
동아시아라고 하면 동쪽에 있는 아시아 나라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이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아니라 청나라였죠
사실 청나라는 우물안 개구리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강한 수준은 아니었죠
하지만 청나라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존심이 강했고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본인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근대화를 진행시키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습니다
서양의 나라들은 비교적 덜 발단된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역을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죠
영국과 청나라 역시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청나라에게 모직물을 팔았으며
청나라는 영국에게 차를 팔았죠
하지만 청나라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영국의 모직물을 별로 사지 않았고 자신들이 자급자족 했습니다
영국은 근대화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청나라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마약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었고 청나라 국민들은 아편에 빠르게 중독됐습니다
청나라는 아편을 단속하기 시작했죠
마약상들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 아편을 팔길 원했고
결국 강제로 무역을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편때문에 일어난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840년의 일이죠
우물안 개구리였던 청나라는 영국에게 완패했으며
그 결과 강제로 무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자신들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방심해서 진 것이고 제대로 다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부에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근대화 운동은 186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역시 근대화를 진행중이었고
1868년부터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운동은 메이지유신이라고 부르죠
자존심이 강했던 청나라에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것으로 근대화를 진행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실패했지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성공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죠
우리나라도 역시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이었죠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나라들과 조약을 맺고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군대도 새롭게 창설했습니다
새로운 군대의 이름은 별기군이었죠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이 가르치는 일본식 신식 군대였습니다
별기군과 조선식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별기군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줬지만
구식 군대에는 좋지 않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월급을 13개월이나 밀리는 그야말로 조선판 열정페이를 강요했죠
심지어 밀린 월급을 쌀로 지급했는데
그마저도 불량 쌀을 지급하는 바람에 구식 군대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인물들과
민씨 일가, 그리고 별기군을 습격했죠
188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합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쪽 사람들을 말하며
이 당시 조선의 왕은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고
이들은 군란을 진압했죠
일본은 임오군란 때문에 일본 사람과 공사관이 피해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에 조선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보상을 약속하는 문서같은 것이었죠
이 조약을 제물포 조약이라고 합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중에는
일본 경비병이 조선에 들어온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습니다
과거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 무역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일부 사람들은 청나라가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강한 줄 알았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완패했기 때문이죠
청나라의 시대는 갔으니 청나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세력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마침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인 세력들에게 절호의 기회였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1884년에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부릅니다
갑신정변은 성공하는 듯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을 알아챈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청나라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일본은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죠
갑신정변은 12월 4일(양력)에 일어나 12월 6일에 끝났습니다
고작 3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은 더더욱 심해졌고
일본은 임오군란때처럼 비슷한 핑계를 대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에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지금 당장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지만
이후에 한쪽의 군대가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한쪽의 군대도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이 조약을 톈진조약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동안 조선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85년 텐진조약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대 혼란 상태였죠
양반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혼란 상태에서 다같이 조금 참고 조금 덜먹어야 했지만
자신들의 배는 빵빵하게 채워지길 원했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식량이 많이 나오는 곳)였습니다
식량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관리들은 더 많은 식량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농민들은 폭발했죠
농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고종은 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알아서 해결하지 않고 계속 외부의 힘을 빌린 것이죠
하지만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가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가 들어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죠
고종은 이것을 완벽하게 무시했습니다
감히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데 어디 일본의 군대가 들어온단 말인가
이런식으로 말하면서 말이죠
고종의 요청대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고종의 예상과 단리 일본의 군대는 바로 다음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농민들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일을 간섭하길 원하지 않았고
곧 모내기를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와 빠르게 합의 했습니다
사건이 종료되면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일본의 군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계속 머무를 구실을 찾고 있었죠
일본은 자신들이 알아본 결과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군대를 물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을 함께 개혁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며 요청을 무시했죠
이에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해버리고
고종에게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제시켰습니다
이것에 분노한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청일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도중에 일본은 조선을 서서히 변화시켰습니다
청나라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나라로 말이죠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조금씩 넣었습니다
이것을 갑오개혁이라고 합니다
청일전쟁 역시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강한줄 알았던 청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이것 때문에 진행중이던 양무운동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청나라에게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전쟁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습니다
청나라가 일본에게 보상을 하는 것과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죠
일본은 요동반도 진출에 성공하게 됐고
자신들의 목적인 만주지역까지 진출하길 원했습니다
만주 위쪽에는 러시아가 위치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일본이 점점 위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그냥 보고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양 강대국들과 한번에 싸울 수 없는 일본이기에
어쩔수없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죠
이것을 삼국 간섭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정부는 서서히 친러세력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자신들이 힘들게 영향력을 넣어놨더니
갑자기 러시아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시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사변 이후 친러세력의 힘은 줄어들었고
친일세력의 힘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도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고종은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세력을 몰아냈지만
이제 조선은 친일이 아니라 친러세력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건을 쭉 보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외부의 힘을 빌렸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주 약한 나라라는 것을 스스로 알려버린 셈이죠
경복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것을 대한제국 선포라고 하며 189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자신을 왕이 아닌 황제라고 불렀죠
러시아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쪽으로 영토를 넓히길 원했습니다
일본 역시 대한제국을 계속 노리고 있었죠
하지만 러시아를 혼자서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더이상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일본과 동맹을 한 것입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한 것이죠
누가 대한제국을 먹느냐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죠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앞섰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한다면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군인과 물자가 제때 도착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인과 물자가 도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러시아를 기습공격 했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을 갖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904년의 일이며 이것을 러일전쟁이라고 부르죠
일본의 계획이 좋았던 것일까요
많은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겼던 청일전쟁에 비해
러일전쟁은 일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자신들의 히든 카드인 발트함대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했지만
당시 일본의 함대도 아주 강했고 일본의 전략이 너무 좋았어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대패했고
이것으로 러일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러일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국력이 한계에 다달았죠
다행히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청일전쟁때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이라고 말했죠
러시아 내부 사정도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근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때 노동자들의 비폭력 시위도 많이 일어나고 있었죠
그런데 러시아 정부에서 노동자들을 사살해버리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국 모두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보상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중재 아래 러시아와 조약을 맺습니다
1905년의 일이며 이때 맺어진 조약을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하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도, 보호를 승인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것이 우니라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자기들끼리 이렇게 정했다는 것입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허락해준 셈입니다
러일전쟁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은 여전히 위태위태 했습니다
일본은 돈이 필요했고 자원이 필요했고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미국과 러시아가 승인까지 해준 시점이었기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이후 일본도 대한제국을 식민지배 한 것이죠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나게 됩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파견된 일본 대사관들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찬성을 받아내는데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조약입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됐습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보고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언제나 대륙 진출을 꿈꿨죠
일본의 목표는 만주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청나라 전체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조선은
일본이 먼저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언제나 기회를 보던 일본은 여러가지 사건을 핑계로
조선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들의 군대를 보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완전히 자기들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대륙 진출이라는 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배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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