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대신 모래로 양치했던 조선시대(양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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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양치를 했던 조선시대

우리가 매일 하는 양치질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지금처럼 칫솔에 치약을 묻히는 방식의 양치질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치약은 1890년대에 만들어졌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칫솔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칫솔과 치약의 가격이 너무 비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칫솔과 치약을 만들어냈으며
이때부터 양치질이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칫솔과 치약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양치질을 했을까요




과거에는 지금처럼 칫솔과 치약을 이용해 양치를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방법으로 양치질을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계란이나 굴 껍데기를 갈아 이를 닦았고
고대 로마에서는 오줌을 이용해 이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칫솔이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을 이용해
양치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럴듯한 모습의 칫솔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물 뼈나 나무에 돼지털을 박아 만들기도 했으며
좀 더 부드러운 말의 털을 이용해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균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버드나무 가지를 이쑤시개처럼 만들어
치아 사이에 낀 음식물을 빼내는 형식으로 양치질을 했습니다

버드나무의 가지를 양지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버드나무를 이용해 양치를 하는 것을 양지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에 이 단어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지가 치로 바뀌었고
이런 행위를 양치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왕과 양반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평민들은 지푸라기를 이용해 칫솔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소금을 이용해 양치질을 했습니다

지금은 소금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과거에는 소금은 아주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소금이 아니라
모래를 이용해 양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만들어지는 모든 치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치약의 성분으로는 연마제, 불소, 향료, 보존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마제는 이에 붙어있는 플라크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당시 모래가 바로 연마제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이때 너무 굵은 모래를 쓰면 잇몸이 상하거나
이가 손상될 수 있어 고운 모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에서 만든 칫솔과 치약이 들어오게 되면서
양치질에 대한 방법이 현대처럼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돈이 없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나 모래를 이용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1950년대 락희공업사에서
럭키치약이라는 치약을 만들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양치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발명한 것은 11살짜리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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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 아이스크림은 11살 꼬마가 발명했다?

더운 여름 아이스크림을 한입 하는 것만큼
커다란 만족감을 주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 아이스크림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처음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처럼 냉동 보관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아주 귀한 간식이었습니다

 

이후 냉장고가 보급화 되면서
아이스크림 역시 값이 내려가게 되었고
누구나 즐겨먹을 수 있는 최고의 간식이 되었죠

그리고 이때부터 여러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중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은 미국의 11살짜리 소년이 발명했다고 합니다

 

youtu.be/J-qWBmfzNoI

1905년 미국에서는 자신의 취향대로 음료수를 만드는
DIY 음료수가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프랭크 에퍼슨이라는 소년 역시
이런 유행에 맞춰 음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프랭크 에퍼슨은 물에 레모네이드 가루를 넣고
막대를 이용해 열심히 저었습니다


무엇이 이 소년의 관심을 끌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 무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DIY 음료수는 소년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날밤 캘리포니아는 아주 추웠다고 합니다
소년이 남겨둔 DIY 음료수는 밤새 바깥에 남겨지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얼게 되었죠



다음날 바깥으로 나온 소년은 얼어있는 음료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녹이거나 아니면 그냥 버리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소년은 얼음을 꺼내 핥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얼음은 아주 맛있었고
이것을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기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아이스크림
막대 아이스크림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소년의 나이는 고작 11살이었죠


소년은 자신의 성인 에퍼슨과
고드름을 뜻하는 아이시클을 합쳐
이 얼음을 엡시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923년 특허를 신청한 뒤 본격적으로 판매를 했습니다

이후 프랭크 에퍼슨의 자녀가
이름을 엡시클에서 팝시클로 바꾸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우리가 즐겨 먹는 막대 아이스크림이 된 것이죠

 

참고로 콘 아이스크림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던 엑스포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사람이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합니다

이때 엑스포가 여름에 열렸는데 그 덕분에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려
아이스크림을 담을 그릇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와플을 팔던 옆 가게에서 와플을 구해와
아이스크림을 와플 위에 얹어줬는데
이것이 바로 콘 아이스크림의 탄생인 것이죠

때로는 의도치 않았던 이런 행동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왜 거세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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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들은 왜 거세를 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왕 곁에서 업무를 보고
궁궐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을 담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통 내시라고 부르죠

사극을 보면 내시는 수염이 없고
얇은 목소리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데

내시들은 거세를 하기 때문에
남성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일을 하는 것과 남성호르몬이 어떤 관련이 있길래
이들은 거세를 했던 것일까요?

 


흔히 내시로 표현되는 이런 복장의 인물은
내시가 아니라 환관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환관이 내시 업무를 같이 하게 돼
내시가 곧 환관인 것처럼 표현되긴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분명 구분되는 존재였습니다


이 당시 내시는 왕과 함께 다니며 여러가지 업무를 봤는데
왕을 보좌하는 역할까지 함께 해야했기 때문에
무술시험도 봤다고 합니다

또한 궁궐 밖에 나가 민심을 살피거나
죄인을 이송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내시라고 하면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지만
고려시대의 내시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환관처럼 거세를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환관은 남북국 시대에(통일신라와 발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통일신라 흥덕왕 때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환관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강족과 전쟁을 해서
포로들을 환관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강족은 티베트족의 조상이 되는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중국이 상나라(은나라)일 때 이들이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데
상나라가 기원전 17세기 ~ 11세기에 존재했던 나라니
환관의 역사는 약 3000천년 이상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나라의 기록을 보면
환관을 남자의 생식기 모양과 칼 도(刀)자를 같이 그려 표현했는데
이런 기록을 보면 이 당시 환관들도 거세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때 거세를 한 이유는
남자들이 국가와 가족을 지키지 못했으니
남자의 상징인 생식기를 잘라
'니들은 남자도 아니다' 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대를 잇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때는 환관이 10만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하니
환관에 대한 의존도가 많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관은 중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 터키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같은 나라에서도 존재했지만
특이하게 일본은 환관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환관들 역시 거세를 했는데

전제 군주 국가에서 왕은 일부다처제
즉 수많은 부인이 있었는데

혹시나 궁에서 일하는 환관이 후궁과 바람이 나지 않을까
하는 이유 때문에 거세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환관 역시 같은 이유로 거세를 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환관을 활발하게 임명하지 않았지만
고려의 18대 왕인 의종 때부터
환관이 슬금슬금 치고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무신정권으로(1170~1270)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가
원간섭기에(1259~1356) 접어들면서 세력이 다시 강해졌습니다

또 원나라에 환관을 보내기도 했으며
원나라게 갔던 환관이 사신으로 돌아와
고려에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환관은 강제적으로 거세를 당하거나
선천적으로 고자인 경우도 있었지만
부모나 형제 혹은 스스로가 권력을 잡기 위해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태조 이성계가 환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환관과 내시부를 통합하면서

환관은 내시, 내시는 고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환관은 음식 만드는 것을 관리하거나
의약 처방에 관한 일을 맡거나
책이나 재화를 관리하는 일 처럼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전반적인 업무를 주로 담당했습니다


이것은 환관이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아무래도 왕과 가장 가깝게 지내다보니
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환관중에서 가장 높은 직책인 종2품의 상선은
수라상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환관이 있었으니
정4품의 대전내관이라도 불리는 상전입니다


왕의 명령이나 먹는 음식, 상태 같은 것들을 기록하는 곳이 승정원인데
이곳에서 기록을 하는 사람들을 승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승지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정4품 환관의 역할이었죠

또한 누군가 왕에게 보고를 할 때도 승정원을 거쳐야 했는데
승정원에서 검토를 한 뒤 곧바로 왕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승지가 다시 환관에게 전달한 뒤
환관이 왕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승전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정보를 빼내거나 조작하는데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었고
그런 덕분에 가진 권력을 남용하거나
관료들이 아부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은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
라는 글귀를 나무패에 새겨 환관들 목에 걸도록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관은 기본적으로 왕과 대화가 통해야 했기 때문에
대학, 논어, 맹자, 중용 같은 사서나
소학, 삼강행실정도는 기본적으로 익히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해
관련된 시험을 매달 치뤘으며
1년에 네번 근무평가를 해
통과하지 못하면 승진에 불이익을 줬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중죄인을 다섯가지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묵형
코를 베는 의형
발을 자르는 비형
생식기를 없애는 궁형
사형시키는 대벽

이것을 오형이라고 부르죠

중죄인을 이렇게 다스렸다는 것은
이런 형벌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에서 환관이 되기 위해선 생식기를 잘라야 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행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환관은 꽤나 인기있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만큼 생식기를 자르지 않고 환관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승진을 하기 위해선 몸에서 잘려 나간 음경과 음낭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꼼수를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환관이 되기 위해선 고환만 없으면 됐기 때문에
생식기 즉 음경까지 자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스스로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고환을 자르는 방법으로는
어린 아이일 때 명주실을 감아
피가 통하지 않게 만들어 저절로 썩게 만든 뒤 잘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세를 하고나면 남성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에
수염이 나지 않고 엉덩이와 다리쪽에 지방이 늘고
변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성호르몬이 없는 덕분에
당시 평균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었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중기까지는 고환을 직접 자르지 않고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려 사고로 거세가 된 사람들을 환관으로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환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환관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고환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환관이 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 소양을 평가받기도 했으며

특히 인내력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왕과 가장 가까이서 지내다보니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되는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는데
혹시 적군에게 잡혔을 때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 나올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테스트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궁궐까지 쳐들어왔을 때
왕과 함께 빠르게 도망가야 했기 때문에
비밀 통로를 통해 왕을 업고 탈출하는 연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런 시험에서 탈락한다면
환관이 되지도 못하고 평생을 고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환관은 고환이 없어 정자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식을 만들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들도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뒤 아이를 입양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일부 사대부 가문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환관과 일부러 결혼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부의 성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환관은 고환이 없기 때문에 성욕이 줄어들긴 하지만
여전히 음경은 남아있기 때문에 발기가 가능했습니다

당연하게도 환관은 궁궐내에서 연애
즉 사내연애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궁녀들과 가까이서 지내다보니
연애감정이 싹트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발각되면 쫓겨나거나 사형을 당하기 때문에
이들의 연애는 몰래몰래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환관과 후궁이(왕의 첩)
사랑을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환관은 언제나 왕 옆에서 지내기 때문에
24시간 궁궐에 있을 것으로 생각이들지만

일부의 환관을 제외하곤 출퇴근을 했습니다

또한 다른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월급을 받았죠



참고로 환관의 월급은 궁녀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궁녀는 궁에서 살기 때문에
출퇴근을 하는 환관은 궁녀에 비해 부유한 삶은 살 수 없었습니다

환관은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으며
일을 하지 않아도 국가에서 연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환관이 되면 잘라낸 고환을 항아리 담아 궁궐에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것은 자신이 죽을때까지 잘 간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고나면 항아리에서 고환을 꺼내 다시 봉합한 뒤 장례를 치뤘는데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몸이니
다시 봉합해 부모님에게로 돌아간다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해야만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내시라고 하면 얕잡아보고
웃음거리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시라고 하더라도 꽤 높은 곳 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왕을 위해 희생하는 충신도 많이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환관으로 보내졌던 김사행은
고려 공민왕때 다시 돌아와 환관 생활을 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선택을 받아 환관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조선 초 내시부의 제도를 정비한 것이
바로 김사행입니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에게 죽어가면서도
팩폭을 날렸던 김처선


연산군을 몰아낼 때 공신에 오른 6명의 환관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을 도운 24명의 환관이 있습니다

이런 환관 제도는 1884년 갑신정변때부터 숫자를 서서히 줄이다가
1894년에 시작된 갑오개혁때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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