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흉악 범죄가 폭증하자 국가가 나서서 한 일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범죄와의 전쟁

 

2023년 3월 3일 죽전역 칼부림 사건
7월 21일 신림역 칼부림 사건
8월 3일 성남 AK플라자 칼부림 사건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는 칼부림 예고 글들


최근 우리의 안전과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최근에 일어난 칼부림 사건은
특정 인물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찌르기 때문에
나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와 두려움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공권력이 더 강하게 나서
범죄와의 전쟁이라도 선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로 인해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3저 호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때 술집, 도박장, 단란 주점, 성매매 업소 같은
유흥업소가 많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런 유흥업소는 조폭들이 주로 관리했기 때문에
조폭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도 했죠

조폭들이 활동하다 보니 범죄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성매매에 필요한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를 했으며

강도강간의 건수도 엄청나게 폭증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커졌고
국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범죄자를 소탕할 것을 국민들에게 직접 밝혔습니다

이것을 10.13 특별선언이라고 하며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특별선언 이후 1990년에만 4천 명의 경찰을 충원했으며
순찰차를 늘리고 유흥업소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수갑, 포승줄, 경찰봉 같은 도구의 사용 범위를 확대했으며
외근 경찰관 전원에게 총기를 지급했습니다

또 집행유예 조건을 강화했으며
흉악범에 대한 처벌 역시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1년 만에 800명 정도의 조폭이 구속돼
조폭의 활동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강도, 폭력범 60만 명을 검거, 2만 명 정도를 구속하면서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같은 5대 범죄 발생률이 2.7% 감소
검거율은 7.4% 증가했습니다

이것으로 많은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77%가 범죄와의 전쟁을 잘한 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경찰의 힘이 강해지고 실적을 강요하다 보니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기도 했으며
고문을 해 없는 범죄 사실을 자백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 경찰청의 자료에 따르면
범죄와의 전쟁 이후 5대 범죄는 감소했지만
신형 범죄와 충동 범죄는 늘었다고 합니다

또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기 전인 1989년부터
조폭들을 소탕하기 위해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은 실제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유는
진짜로 범죄자들을 소탕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989년 지금은 기무사가 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반정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을 사찰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청명 계획이라고 하죠

여기에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990년 당시 이등병이었던 윤석양이라는 사람에 의해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정부의 주도로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것 때문에
당시 노태우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한 상태였죠

바로 이것을 잠재우기 위해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범죄와의 전쟁이 정말 범죄율을 감소시켰냐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흉흉해진 세상 때문에 불안이 커진 지금
이전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이자율 무려 100% 어마무시했던 조선시대의 사채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이자율 100%? ㅎㄷㄷ 했더 조선시대 사채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일에 큰돈이 필요할 때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곤 합니다

이것을 대출 혹은 사채라고 말하는데
은행에서(1금융, 2금융) 돈을 빌리면 대출이라고 표현하고
대부 업체나 불법사업체에서 돈을 빌리면 사채라고 표현합니다

 


대출이든 사채든 중요한 건 이자가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출 이자율 평균은 5% 정도 된다고 합니다

대부 업체의 경우 업체마다 다르지만
법정 최고 이자율인 20%를 넘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법사업체의 경우엔
20%를 훨씬 넘어섭니다


조선시대에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사업을 급채, 방채, 흥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은 식리(殖利)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을 식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조선에서는 식리가 엄청나게 유행했습니다

나라에서 직접 사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들 양반들 심지어 스님들까지

돈을 좀 가지고 있다 하면 너도나도 식리에 뛰어들었는데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사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라에서 하는 식리는 공채라고 불렀으며
개인이 하는 식리는 사채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공채는 일반적으로 이자율이 20%
사채는 이자율이 50%였다고 합니다

식리의 이자를 이식이라고 했는데
50%가 넘어가는 이자는 장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자율 50%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일부의 식리는 이자율이 무려 100%였습니다

만약 내가 1만 원을 빌리면 갚아야 할 돈은 2만 원이 되는 셈이죠

게다가 1년 뒤에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이자를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1만 원을 빌렸는데 4만 원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심하게 괴롭히거나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으며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한 뒤 시체를 다른 곳에 버리고
그 사람이 자살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식리인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갚으려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직접 이자율을 정해주기도 했는데
왕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습니다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은 공채의 이자가 3%를 넘지 못하도록 했으며
19대 왕인 숙종과 21대 왕인 영조는
공채, 사채 구분 없이 모두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자가 아무리 쌓여도 원금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일리 혹은 자모상모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3년까지만 이자를 받고
그 이후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죠


대한제국 때에는 법으로 정한 최고 이자율은 20%였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금액마다 달랐지만 20~30%였습니다

외환위기(IMF)가 발생했을 때는 잠시나마 이자 제한을 폐지했고
2002년 다시 이자 제한을 부활시키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

 

기원전 207년부터 스파르타 왕의 자리에 올랐던 나비스는
부자들에게 재산을 빼앗아
많은 노비를 해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자신의 재산을 선뜻 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의 부자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재산을 주지 않기도 했죠


그래서 나비스는 재산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를 본뜬 장치를 이용했죠

이 장치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얼굴 부분을 아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공들였다고 합니다


장치에는 값비싼 옷을 입혀놨으며
두 팔은 최대한 벌려 고정시켜놨는데
얼핏 보면 마치 안아주려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비스는 재산을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 술을 잔뜩 먹인 뒤
자신의 아내를 소개해 준다고 말하며
아내를 닮은 장치가 있는 방으로 유인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장치를 안으려고 하면
고정이 풀려 장치가 그 사람을 끌어안게 되는 형태였는데

이 장치에 안긴 사람은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장치의 몸에는 날카로운 쇠못이 촘촘하게 박혀있었습니다
누군가 장치를 안으려고 하면 장치가 그 사람을 끌어안았고
장치에 박혀있는 쇠못에 찔리도록 설계되었던 것이죠

나비스는 이런 식으로 부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나비스 아내의 이름은 아페가였는데
여기에서 이름을 따 나비스가 사용한 이 장치를 나비스의 아페가
혹은 아이언 아페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페가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의해 전해져 내려왔는데
실제 장치는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아페가가 실존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한 철제 관을 이용해
범죄자들을 고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장치를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들어가기 충분한 크기이며
내부에 쇠못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는데
사람을 관에 넣고 문을 닫으면
쇠못이 사람을 찌르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주요 부위에는 쇠못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다 서서히 죽어가는 끔찍한 장치였죠

 


아이언 메이든은 과거에 사용됐다고 알려진
아이언 아페가와 비슷한 형식이었기 때문에
아이언 아페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필립 지벤키스는
1515년 독일에서 위조 화폐를 만든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아이언 메이든을 사용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아이언 메이든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벤키스는 1700년대 후반에 활동하던 철학자였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은 아이언 메이든 역시 실존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이언 메이든에 대한 다른 기록이 전혀 없고
현재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은 대부분이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죠


중세 유럽에서는 범죄자들에게 머리와 다리 부분이 뚫려있는
나무로 만든 통을 공공장소에서 입도록 하는 형벌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수치의 통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에 모욕감과 굴욕을 주는 형벌이었죠

또 수치의 통과 비슷하지만 팔 부분이 뚫려있는 것도 있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으며
이 형벌을 주정뱅이 망토라고 불렀습니다

 


주정뱅이 망토는 통을 입고 거리를 걸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에게 썩은 음식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합니다

아이언 메이든은 수치의 통이나 주정뱅이 망토를 착각해
지벤키스가 만들어낸 가상의 장치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