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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고의 검색 엔진 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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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검색 엔진

뭔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얻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인터넷 검색을 합니다

이때 어떤 검색 엔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조금은 다르게 나오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론 구글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네이버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그 이전엔 야후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인터넷이 없었을 땐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민감한 정보를 물어보거나
범죄자를 심문하는 경우 알려주지 않으려고 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상대의 입을 열기 위해
물리적 검색 엔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련된 사람을 심문해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부의 범죄자들은 입을 꾹 닫기 때문에
이들의 입을 열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엔 고문을 하는 것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죠

조선에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넓적한 몽둥이를 이용해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곤 했는데
이것을 형문이라고 불렀습니다

형문은 보기보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정강이를 맞다 죄인이 죽는 경우도 자주 있었죠


그래서 한번 때릴 때 30번 이상 때리면 안 됐고
형문을 다시 집행하기 위해선 3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만약 형문을 버티고 입을 열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낙형으로 넘어갔는데
낙형은 불에 달군 쇠를 몸에 지지는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낙형은 기원전 1600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중국의 고대 국가 은나라의 주왕이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극을 보면 쇠를 온몸에 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럴 경우 죄인이 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 시행될 때는 발바닥을 지졌다고 합니다


인간은 몸이 불에 탈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을 주는 낙형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끔찍할 수밖에 없었고
당하다 보면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1498년 9월 16일 연산군일기에는
형문을 버틴 죄인에게 낙형을 썼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는 내용이 있고

1507년 1월 27일 중종실록에는
역시 형문을 할 때는 입을 열지 않다가
낙형을 하니 바로 입을 열었다는 내용


1612년 10월 28일 광해군일기에는
낙형을 했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낙형은 그야말로 당시에 사용된 최고의 검색 엔진이었던 것이죠



지금의 검색 엔진도 가끔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낙형 역시 최고의 검색 엔진이었지만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형은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 역시 낙형을 자주 사용했는데
어느 날 치료를 위해 뜸을 뜬 것도 이렇게 아픈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건 얼마나 아프겠냐며
죄인에게 동정심이 생길 수 있으니 낙형을 폐지하라고 말해
1733년 이후부턴 낙형은 공식적으론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서 역할을 했던 포도청에선
도적들을 심문하기 위해 여전히 사용하기도 했고

도망가거나 물건을 훔친 노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양반이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낙형은 살이 달궈지는 소리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지글이라고 불리고 있기도 한데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인권 문제로 없어진 검색 엔진이지만
아주 가끔 비공식적으로 다른 형태의 검색 엔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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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문에 만들어진 나치를 위한 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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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위해 만들어진 음료수

 

 

1886년 미국의 약사인 존 펨버턴에 의해 만들어진 코카콜라
만들어질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1888년 에이서 캔들러라는 사람이 코카콜라에 대한 권리를 인수하고
1892년 코카콜라 컴퍼니를 설립한 이후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당시 코카콜라는 미국에선 인기가 있었지만
아직 세계적인 음료는 아니었습니다

1923년 로버트 우드러프라는 사람이 코카콜라의 사장이 된 이후
세계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을 후원하게 되면서
코카콜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판매량이 많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나치당이 집권을 잡은
나치 독일 시기였는데(1933년)
히틀러 역시 코카콜라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직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카콜라는 여전히 독일에서 판매되었고
여전히 인기있는 음료였습니다

심지어 일부의 군인들은 수통에 콜라를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코카콜라 독일 지사의 지사장은 막스 카이트였는데
나치당이 집권한 독일에서 코카콜라를 계속 팔기 위해
나치식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41년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이
일본에게 기습 공격 당하게 되면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독일로 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했는데
이때 코카콜라의 재료가 되는 원액 역시 차단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참전 이후 독일에선 코카콜라를 먹을 수 없었죠



하지만 코카콜라에 대한 막스 카이트의 충성심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계속 일하길 원했고
독일에서 코카콜라를 만들길 원했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코카콜라를 원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수통에 코카콜라를 넣어 마시던 군인들이 많이 그리워했죠

이들은 어쩔수 없이 물을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물은 약품으로 정수한 물이라
맛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이트는 화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탄산음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전쟁으로 충분한 물자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먹다 남은 음식, 치즈를 만들고 남은 액체
과일 부스러기 같은 것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카이트는 여기에 사탕무 설탕, 탄산을 합쳐
코카콜라와 전혀 다른 음료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환타입니다

카이트는 음료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직원들과 회의를 했는데
좀처럼 적당한 이름이 나오지 않자
상상력을 좀 발휘해봐 라고 말했는데
상상력은 독일어로 Fantasie였고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한 직원이
Fanta라는 이름을 제안해 음료의 이름이 환타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환타는 찌꺼기로 만들어져
질이 좋지 않은 음료였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흐름이 좋지 않게 흘러갔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나치 군인들에게
힘을 주는 음료이기도 했죠

군인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환타를 좋아했는데
전쟁으로 식자재가 부족한 상황속에서
환타를 설탕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다시 독일에 있는
코카콜라 공장을 가동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열악한 환경속에서 환타를 만들고 있는
막스 카이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코카콜라의 대표인 로버트 우드러프는 이것에 감명해
막스 카이트를 코카콜라 유럽 책임자로 승진시켜줬습니다

하지만 환타는 나치에게 힘이 되기도 했고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음료, 나치를 상징하는 음료였기 때문에
생산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다 1950년 코카콜라의 라이벌인 펩시가 새로운 음료를 출시하자
경쟁을 위해 이탈리아 오렌지를 이용해 1955년 환타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환타 역시 인기를 끌었고
이후에 여러 가지 맛의 환타가 만들어졌습니다

환타를 만든 막스 카이트는 나치식 경례를 하고
환타를 나치 군인들에게 공급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나치 독일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다는 점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
전쟁 기간동안 환타를 팔아 번 돈은
나치가 아닌 미국에게 넘겼다는 점 때문에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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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친일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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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먹여살린 친일파의 아들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르죠

이때 경복궁에 침입한 집단에는 조선군 훈련대도 있었는데
조선군 훈련대는 일본에 의해 창설된 부대로
훈련대대장은 조선 사람이었지만
일본에 충성하는 친일파였습니다

당시 훈련대대장은 우범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범선 역시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조선인 중 하나였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1903년 고영근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인 아내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우장춘이었습니다




우범선이 살해당할 때 우장춘은 고작 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나빠져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1916년 도쿄의 한 전문대학에 들어가 농업을 전공하고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다른 종끼리 교배시키는 것을 교잡이라고 하는데
우장춘은 1935년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유채를 만들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갓을 만들어내고
양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해 에티오피아 겨자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우장춘의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다른 종끼리 교배를 시키는 경우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이것을 성공해 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시키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현재까지도 외국 교과서에 우장춘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장춘은 도쿄제국 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우장춘 이전에 조선인으로 농학박사를 취득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업적을 달성했지만 우장춘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45년 드디어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한 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분단의 슬픔을 뒤로한 채 어쨌든 우리나라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자원이 필요했고 인재가 필요한 시기였죠

그러던 중 우장춘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집니다

그래서 1947년 우장춘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우장춘을 우리나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장춘은 일본에 살며 비록 업적에 비해 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며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한국어도 못하는 그가 굳이 한국으로 올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우장춘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며
100만 엔의 생활비를 지급했는데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0만 엔은 10억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우장춘은 한국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의 기본이 되는 씨앗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우리나라의 농업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로 들어와
지금까지는 일본을 위해 일했지만
이제부터는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며
생활비로 받은 100만 엔을 연구에 필요한 책과
좋은 씨앗을 사는데 전부 써버립니다


일본에 있을 땐 학문적 연구를 중요시했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면서
우리나라 기후에 맞는 작물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한국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기도 하고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일파인 우범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해
상황은 더 극단적으로 흘러갔습니다

1953년에는 일본에 계신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뵙기 위해 일본에 가려고 했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우장춘이 일본에 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우장춘은 한국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연구소 근처에 우물을 하나 팠는데
이것을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을 담아
자유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우장춘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품질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결국 성과를 냈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당도가 높은 금싸라기 참외
여름철 평지에서도 자랄 수 있는 무를 만들어냈고

강원도에서 감자 산업, 제주도에서 감귤 산업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고추, 오이, 양파, 토마토 등 수많은 작물의 우수한 품종이
한국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배추하면 통통하고 뜯어도 뜯어도 잎이 계속 나오는
이런 모양의 채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길쭉하고 잎이 적은
이런 모양의 배추가 자랐습니다

우장춘은 이 배추를 개량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의 배추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 식탁에 빠질 수 없는 김치는
우장춘의 업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가 식량난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우리나라 농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일본의 키하라 히토시이며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하며
농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이때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본 사람들이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이것이 잘못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1950년 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부터 1959년까지
우장춘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인정해 정부에서는 1959년 8월 7일
우장춘에게 훈장(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훈장을 받은 우장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줬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장은 조금 늦은 훈장이었습니다

1959년 8월 10일 우장춘은 십이지장에 생긴 문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치러진 첫 번째 사회장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우장춘이 살아있을 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이것을 거절할 정도로 우장춘은 권력보다
연구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장춘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의 자리에 있었지만
항상 작업복과 고무신만 신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고무신 박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장춘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에는 우장춘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우장춘 기념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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