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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수백의 왜구를 물리친 고려의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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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몰살시킨 고려의 노비

바다 위에서 배를 공격하고
물자를 약탈하는 집단을 해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과거에는 해적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일본 해적에 의한 피해가 많았는데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죠

 

 


기록을 보면 1350년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42년 동안 보고된 것만 왜구의 침략은 500회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한 달에 한 번은 왜구가 침략해 물자를 약탈해갔다고 볼 수 있죠

왜구는 해적이기 때문에 해안가 근처를 주로 침략했지만
1350년 이후부터 침략 빈도가 늘어나더니
활동 범위를 내륙까지 늘렸습니다

그 결과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게 됐고
조세로 거둬드린 곡물을 옮기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고려가 왜구의 방어를 잘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왜구는 물자를 약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는데

이들을 보호해야 할 군사들은 왜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 바빴다고 합니다

 


1372년 강릉 지역에 어김없이 왜구가 침략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군사들은 도망갔고
마을 사람들은 왜구에게 죽게 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강릉에는 관노로 있었던 이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옥은 고려 말 고려의 개혁을 꿈꿨던 신돈의 최측근인
이춘부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돈은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의 신뢰를 받게 되었고
신돈의 최측근이었던 이춘부는 신돈의 입지가 올라가게 되면서
출세의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1371년 반란을 꿈꾼다는 혐의로 신돈은 처형당하게 되고
최측근이었던 이춘부 역시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이옥은 귀양당해 관노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옥은 활을 굉장히 잘 다뤘으며
과거 벼슬에 있었을 때 용맹함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강릉에 왜구가 침략하자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이옥은 강릉을 지키기 위해 왜구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활을 잘 쏜다 하더라도
혼자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옥은 독특한 전략을 생각해냅니다

 


결국 여러 명을 상대하기 위해선 충분한 화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리 숲에 들어가 나무에 화살을 꼽아두었죠

이옥은 침략한 왜구와 싸우다
도망치는 척 숲으로 유인했고
준비한 화살을 모두 사용한 뒤에는
나무에 꼽아둔 화살을 이용해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일본은 길이가 긴 장궁을 사용하기로 유명합니다
장궁의 위력은 뛰어나지만
길기 때문에 기동력에서 단점을 보여줍니다

숲으로 들어온 왜구는 장궁 때문에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이옥이 준비한 전략에 완벽하게 당해 몰살되었습니다

귀양당한 노비 한 명이 왜구로부터 강릉을 지내켜낸 것이죠

이것을 이옥의 강릉전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릉을 침략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왜구가 고려를 침략할 때
해적선이 적게는 20척, 많게는 400척까지 왔다고 합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척에 20명~40명까지 탄다고 하니
이옥 혼자 상대한 왜구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이옥은 왜구를 무찌른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관직으로 복귀했으며
이옥의 활 기술과 전략은 좋은 교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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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기 위해 피를 마시고 피로 목욕을 했던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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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목욕을 즐긴 연쇄살인마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바토리 가문

그런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576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스테판 바토리) 역시 마찬가지이죠


그에게는 바토리 언너라는 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언너는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외삼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였던 것과 함께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1575년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15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헝가리의 귀족인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을 했는데

1604년 페렌츠 백작이 전쟁을 하다 사망하는 바람에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헝가리의 차흐티체라는 성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사망하는 바람에
커다란 성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페렌츠 백작이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44살이었는데
조금씩 시작되는 노화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르제베트의 시녀가 시중을 들다 실수를 했고
화가 난 에르제베트는 시녀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때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시녀의 뺨에서 피가 났고
피는 에르제베트에게 조금 튀게 되었죠

 


에르제베트는 곧바로 피를 닦아냈는데
이상하게 피를 닦아낸 부분이
조금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의 피가 노화를 막아주고
젊음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일자리를 준다는 핑계를 대며
마을의 젊은 여자들을 성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뽑아냈습니다

처음엔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는 정도였지만
이윽고 더 많은 피가 필요해진 에르제베트는
코나 입술을 자르기 시작했고
결국엔 데리고 온 여자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뽑아낸 피는 마시거나 목욕을 했습니다
피를 온몸에 바르고 또 바르며
젊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죠

마을의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에르제베트는 이름 있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녀가 많이 필요하나보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1610년 에르제베트가 여전히 피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헝가리 당국은 뒤늦게 에르제베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는 죄르지 투르조라는 사람이 맡았는데
그가 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있는 여자 한 명과
아직 살아있는 여자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죄르지 투르조는 곧바로 에르제베트와
그녀를 따르던 하인 4명을 체포했고
살인 행위와 피의 목욕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에르제베트가 살해한 여성의 수는
600명이 넘었습니다

하인 4명 중 3명은 그녀의 행위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사형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에르제베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진 않았고
자신이 머물던 성인 차흐티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범죄 행위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 아닌가 생각 될 수 있지만
창문도 없어 빛 조자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이라
당시 귀족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성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다
1614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역사상 다시없을 잔혹한 연쇄 살인마로 기억될 뻔했지만
1980년대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517년에 있었던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는 루터파와 칼뱅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터파와 칼뱅파는 같은 기독교지만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립할 수밖에 없었죠


바토리 가문은 칼뱅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죄르지 투르조는
아이러니하게 루터파를 지지했습니다

에르제베트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하인들의 자백과 그녀의 일기장 때문이었습니다


일기장에는 그녀의 범죄 행위가 적혀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될 수 있는 이 일기장은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하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백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바토리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1610년 에르제베트가 재판을 받은 해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인 바토리 가보르는 암살을 당할뻔했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왕자였던 바토리 지그몬드는
역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바토리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에르제베트를 조사했던 루터파를 지지하는 죄르지 투르조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피로 목욕을 했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피에는 피브린이라는 물질이 있어
몸 밖으로 나오면 금방 굳어지는 데다
피비린내라고도 부르는 것처럼 악취를 풍깁니다

몇 방울 떨어트려 목욕을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피 자체로 목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르제베트가 정말 살인을 했는지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
이제 와서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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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악의 화형 도구 팔라리스의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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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화형 도구

인류 역사상 최악의 화형 도구

과거 사형이 빈번하게 집행되던 때에는
죄인을 죽이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특히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은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던 사형 방법이었죠

 

 


다른 형벌도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화형은 불이 붙는 순간부터 사망할 때까지
통증이 계속 느껴지기 때문에
특히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지중해에 존재하는 시칠리아라는 섬에는
아크라가스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팔라리스라는 엄청난 폭군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식인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신생아를 주로 먹었다고 합니다

팔라리스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누구도 반란을 꿈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범죄자를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도구를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팔라리스는 조각가인 페릴라우스에게
황소 모양의 동상을 만들 것을 의뢰했고

페릴라우스는 청동으로 황소를 만들었습니다

황소는 실제 황소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안쪽이 텅 비어있어 사람이 들어가기 충분했습니다

 


황소는 단순히 범죄자를 가두는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범죄자를 가둔 뒤 황소 아래에 불을 피워
천천히 태워 죽이는 용도였습니다

황소 안에서 사람이 익어가면 연기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코를 통해 나오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익어가는 동안 굉장히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입을 통해 나오도록 설계했습니다

황소 안쪽에는 범죄자가 화형 당하고 있었지만
바깥쪽에서 보면 성난 황소가 콧김을 뿜으며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팔라리스는 이 잔인하고 끔찍한 화형 도구를 굉장히 만족스러워했고
페릴라우스는 적절한 보상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팔라리스는 이것이 조금 언짢았나 봅니다
그래서 소리가 잘 나오는지 성능을 테스트해 본다는 핑계를 대며
페릴라우스를 황소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불을 피워 페릴라우스를 태워버렸습니다

 


페릴라우스는 황소를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황소에 들어가 화형 당한 첫 번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팔라리스는 울부짖는 황소를 보는 것을 즐겼고
범죄자가 타고 남은 뼈로는 팔찌를 만들어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후에 반란이 일어나
팔라리스는 반란군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야속하게도 황소 안에서 불타 죽었다고 합니다

황소 제작을 의뢰한 사람
황소를 직접 만든 사람 모두 황소에 의해 사망하게 된 것이죠

이 황소는 팔라리스의 이름을 따 팔라리스의 황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황소가 실제로 사용되지 않고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물건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당시 만들어졌던 황소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없고
이렇지 않았을까 하며 만들어낸 모형만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팔라리스의 황소는 실제로 사용되었든 사용되지 않았든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화형 도구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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