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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처형 도구 캐서린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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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끔찍한 처형 도구

 

https://youtu.be/cVdL0AFoQMg

287년 알렉산드리아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캐서린(카타리나)은
어렸을 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환상을 보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세력이 점점 커지자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센티우스는
교회를 파괴하고 성경을 태우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을 고문하거나 강제노동시키는 식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캐서린은 막센티우스의 이런 행동을 보고
그의 잔인함을 이야기하며 강하게 비판했는데

여기에 감명을 받은 일부의 사람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막센티우스는 지식인들을 불러
캐서린과 이른바 종교 랩 배틀을 했는데
결과는 지식인들의 완패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캐서린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막센티우스는 그녀를 가두고 고문하기도 했지만
캐서린의 신앙심은 점점 커질 뿐이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캐서린을 굶어 죽이려고 헀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비둘기가 그녀에게 음식을 주기도 했으며
천사가 내려와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하고
예수가 직접 내려와 계속 싸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캐서린을 처형시키는데
이때 못이 박힌 바퀴에 몸을 찔러 죽이는 형벌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캐서린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캐서린이 바퀴에 손을 대자 바퀴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죠

이후 캐서린은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게 되는데
목이 잘린 순간 붉은 피가 아니라 하얀 우유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름을 따 바퀴 모양의 처형 도구를
캐서린 바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야기로만 전해질뿐
캐서린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살아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캐서린은 30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막센티우스는 306년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심지어 막센티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막센티우스 말고 또 다른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한 것으로 유명한데
아마도 이것 때문에 기독교에서 콘스탄티누스를 더 부각시키고
막센티우스를 폭군으로 만들기 위해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 바퀴는 실제로 사용되던 처형 도구입니다
특히 중세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실제 마차에 사용되던 바퀴와 같은 모양이었으며
바퀴에 죄수를 묶어놓고 심하게 때려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퀴를 굴려 고통을 줬는데
바퀴 아래에 못이 박힌 나무판자를 두기도 했으며
물이나 불을 둬 고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머리부터 고통을 줘 즉사시켰지만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다리부터 고통을 줘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캐서린 바퀴를 이용한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사람들에게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줘 모욕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굉장히 잔인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주기도 했습니다

때리고 고문을 했는데도 죄수가 죽지 않으면
그대로 바퀴에 묶어 방치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결국 죽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야생동물에게 뜯겨 고통스럽게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형벌을 받다 바퀴에서 떨어지거나 바퀴가 부서지면
신이 개입한 것으로 해석해 처형식을 멈추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캐서린 바퀴는 프랑스, 미국,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굉장히 여러 나라에서 사용된 처형 도구인데

1800년대에 들어서 인권 문제로 사용이 금지되다
1841년 프로이센에서 사용된 것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캐서린 바퀴는 캐서린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에
처형 바퀴, 고문 바퀴, 브레이킹 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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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 범죄가 폭증하자 국가가 나서서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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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2023년 3월 3일 죽전역 칼부림 사건
7월 21일 신림역 칼부림 사건
8월 3일 성남 AK플라자 칼부림 사건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는 칼부림 예고 글들


최근 우리의 안전과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최근에 일어난 칼부림 사건은
특정 인물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찌르기 때문에
나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와 두려움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공권력이 더 강하게 나서
범죄와의 전쟁이라도 선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로 인해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3저 호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때 술집, 도박장, 단란 주점, 성매매 업소 같은
유흥업소가 많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런 유흥업소는 조폭들이 주로 관리했기 때문에
조폭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도 했죠

조폭들이 활동하다 보니 범죄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성매매에 필요한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를 했으며

강도강간의 건수도 엄청나게 폭증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커졌고
국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범죄자를 소탕할 것을 국민들에게 직접 밝혔습니다

이것을 10.13 특별선언이라고 하며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특별선언 이후 1990년에만 4천 명의 경찰을 충원했으며
순찰차를 늘리고 유흥업소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수갑, 포승줄, 경찰봉 같은 도구의 사용 범위를 확대했으며
외근 경찰관 전원에게 총기를 지급했습니다

또 집행유예 조건을 강화했으며
흉악범에 대한 처벌 역시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1년 만에 800명 정도의 조폭이 구속돼
조폭의 활동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강도, 폭력범 60만 명을 검거, 2만 명 정도를 구속하면서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같은 5대 범죄 발생률이 2.7% 감소
검거율은 7.4% 증가했습니다

이것으로 많은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77%가 범죄와의 전쟁을 잘한 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경찰의 힘이 강해지고 실적을 강요하다 보니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기도 했으며
고문을 해 없는 범죄 사실을 자백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 경찰청의 자료에 따르면
범죄와의 전쟁 이후 5대 범죄는 감소했지만
신형 범죄와 충동 범죄는 늘었다고 합니다

또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기 전인 1989년부터
조폭들을 소탕하기 위해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은 실제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유는
진짜로 범죄자들을 소탕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989년 지금은 기무사가 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반정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을 사찰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청명 계획이라고 하죠

여기에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990년 당시 이등병이었던 윤석양이라는 사람에 의해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정부의 주도로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것 때문에
당시 노태우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한 상태였죠

바로 이것을 잠재우기 위해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범죄와의 전쟁이 정말 범죄율을 감소시켰냐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흉흉해진 세상 때문에 불안이 커진 지금
이전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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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율 무려 100% 어마무시했던 조선시대의 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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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율 100%? ㅎㄷㄷ 했더 조선시대 사채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일에 큰돈이 필요할 때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곤 합니다

이것을 대출 혹은 사채라고 말하는데
은행에서(1금융, 2금융) 돈을 빌리면 대출이라고 표현하고
대부 업체나 불법사업체에서 돈을 빌리면 사채라고 표현합니다

 


대출이든 사채든 중요한 건 이자가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출 이자율 평균은 5% 정도 된다고 합니다

대부 업체의 경우 업체마다 다르지만
법정 최고 이자율인 20%를 넘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법사업체의 경우엔
20%를 훨씬 넘어섭니다


조선시대에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사업을 급채, 방채, 흥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은 식리(殖利)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을 식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조선에서는 식리가 엄청나게 유행했습니다

나라에서 직접 사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들 양반들 심지어 스님들까지

돈을 좀 가지고 있다 하면 너도나도 식리에 뛰어들었는데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사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라에서 하는 식리는 공채라고 불렀으며
개인이 하는 식리는 사채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공채는 일반적으로 이자율이 20%
사채는 이자율이 50%였다고 합니다

식리의 이자를 이식이라고 했는데
50%가 넘어가는 이자는 장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자율 50%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일부의 식리는 이자율이 무려 100%였습니다

만약 내가 1만 원을 빌리면 갚아야 할 돈은 2만 원이 되는 셈이죠

게다가 1년 뒤에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이자를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1만 원을 빌렸는데 4만 원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심하게 괴롭히거나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으며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한 뒤 시체를 다른 곳에 버리고
그 사람이 자살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식리인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갚으려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직접 이자율을 정해주기도 했는데
왕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습니다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은 공채의 이자가 3%를 넘지 못하도록 했으며
19대 왕인 숙종과 21대 왕인 영조는
공채, 사채 구분 없이 모두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자가 아무리 쌓여도 원금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일리 혹은 자모상모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3년까지만 이자를 받고
그 이후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죠


대한제국 때에는 법으로 정한 최고 이자율은 20%였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금액마다 달랐지만 20~30%였습니다

외환위기(IMF)가 발생했을 때는 잠시나마 이자 제한을 폐지했고
2002년 다시 이자 제한을 부활시키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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