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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좀먹은 과거시험장의 갖가지 부정행위들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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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이 되어버린 과거시험장

대학에 가기 위해 수능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행정고시를 보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을 통해 확인합니다

이것은 과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료가 되기 위한
즉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이 있었는데
이것을 과거 시험이라고 부르죠

시험은 공정해야 합니다
누구도 특혜를 받아선 안되고
부정행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부정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이것 역시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 시험은 문과와 무과로 나누어지는데
이중 문과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는 소과와
관료가 될 수 있는 대과로 나누어집니다

대과는 비정기적으로 치러지기도 했지만
정기 시험이 3년에 한번 치러졌기 때문에
합격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대과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33명 밖에 안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운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부정행위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행위는 점점 더 심해졌죠

정조실록에는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순조실록에는 부정행위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정행위가 판치다 보니
실력이 없는 사람들도 합격의 가능성이 있어
과거 시험장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과거 시험은 시제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시제는 시험장 중앙에 위치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뒤에 앉거나
가장자리에 앉으면 시제가 잘 보이지 않아
시험을 치르는데 불리함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응했기 때문에
응시생들의 답안지를 전부 검토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답안지를 선착순으로 받기도 했는데
이것 때문에 빨리 제출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지금은 시험을 볼 때 정해진 자리가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싸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고용해 자리를 잡기도 했는데
이 사람들을 선접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커닝 페이퍼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대놓고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수종협책이라고 했고
붓 속에 숨겨가는 것을 협서
속옷에 적어가는 것을 협대라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베끼는 것을 고반
내 것을 보여주는 것을 낙지라고 했습니다

과거시험은 글씨를 얼마나 예쁘게 쓰느냐를 보기도 했기 때문에
글씨를 대신 써줄 사람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사수라고 불렀습니다

아예 밖에서 답안지를 작성해 전달해 주기도 했는데
이것을 외장서입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정행위 중 가장 악질은 다른 사람이 대신 시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거벽이라고 불렀는데
원래 거벽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시험을 대신 봐줄 수 있어
시간이 갈수록 대리 시험자를 부르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때로는 팀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기도 했는데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을 접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접은 선접군, 거벽, 사수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사람이 거벽이 되곤 했는데

관료가 되어 돈을 버는 것보다 거벽으로 버는 것이 더 많기도 했고
급제해 봐야 부자들끼리 파벌이 만들어져
높은 곳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에

거벽을 직업으로 삼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고봉환, 송도의 이환룡, 호남의 이행휘, 호서의 노긍이라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벽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것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급제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급제해 나랏일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조선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죠

지금 보시는 그림은 김홍도의 소과응시라는 그림입니다
각자가 시험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삼삼오오 모여 문제를 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데
실제로 난장판이라는 말은
난리 속의 과거시험장을 줄인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교훈 삼아 인재를 뽑는 시험에서 부정행위는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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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의 한줄기 빛 진짜 백의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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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백의의 천사

 

여성, 전쟁, 간호사
그리고 백의의 천사
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나이팅게일을 떠올릴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은 1853년에 발생한
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인 크림 전쟁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는 간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크림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는
지금만큼 위생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총에 맞아 죽는 군인들보다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질병에 감염돼 죽는 군인들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나이팅게일은 부상자들을 돌보는 것과 함께
열악한 위생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망치를 들고 창고로 들어가 물품을 가지고 오기도 했죠

그래서 망치를 든 여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밤에도 등을 켜고 부상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다닌다고 해서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이런 노력 덕분에
부상자들의 사망률이 40%에서 2%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크림 전쟁 당시 많은 간호사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180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메리 시콜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녀는 전쟁터로 가기 위해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전쟁 사무소에도 제출했고 관공서에도 제출했고 간호 단체에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필요한 간호사를 모두 확보했다 였습니다

메리 시콜은 그 유명한 나이팅게일 연합에도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나이팅게일은 그녀의 합류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이유는 메리 시콜이 흑인이었기 때문이죠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사비를 들여 혼자서 전쟁터로
그것도 최전방인 크림반도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수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보살폈습니다
메리 시콜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녀를 마더 시콜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856년 전쟁이 끝나고 메리 시콜은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 프랑스, 튀르키예(터키)에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해 부상병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던 나이팅게일을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부상병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던 사람은 메리 시콜입니다
나이팅게일은 후방에 있었고
환자를 직접 치료하기보단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데 더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진짜 백의의 천사는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메리 시콜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나이팅게일을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던 메리 시콜
후방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던 나이팅게일

 


두 사람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에
누구의 업적이 더 뛰어나냐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통계를 이용해 각종 지원을 받아냈던 나이팅게일에 비해
묵묵히 치료만 했던 메리 시콜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이팅게일은 많은 지원을 받아 간호 학교를 설립했고
간호사에 대한 인식과 환경을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했습니다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메리 시콜은 궁핍한 생활을 하다
한 장의 초상화를 남기고 188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메리 시콜은 계속 잊혀 갔죠



그러다 2000년대 초 메리 시콜의 초상화가
아주 우연히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초상화 속 훈장에 주목했고
그 덕분에 메리 시콜의 이름과 업적이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메리 시콜은 2004년 위대한 흑인 영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2016년엔 런던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발견된 메리 시콜의 초상화는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영국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나이팅게일의 업적도 분명 대단했지만
우리는 메리 시콜의 활약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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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는 왜 ? 이런 모양으로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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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모양일까?

채팅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
믿기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물음표를 사용합니다

물음표는 이런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영어로는 question mark이라고 하죠
여기서 의문을 뜻하는 question은
물음을 뜻하는 라틴어 quaestio에서 유래했습니다

 

 


과거 물음표가 없었을 때는
문장이 의문문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문장 끝에 quaestio라는 단어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꽤 길었기 때문에
qo로 줄여서 사용하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의문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인 것처럼 보여져
qo를 위아래로 적는 식으로 바꿔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간소화돼
지금의 물음표와 같은 모양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880년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보고 영감을 받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을 만들었는데
이 모습을 본떠 물음표가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듣기 위해
귀의 모양을 본떠 물음표가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과거엔 프랑크 왕국이라는 하나의 나라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751년부터 카롤루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768년 샤를마뉴라고 불리는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프랑크 왕국의 왕에 오르게 됩니다

샤를마뉴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은 시간이 갈수록 번성하고 영토도 확장되었지만
시민들의 교육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샤를마뉴는 왕국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뛰어난 학자를 데려오길 원했죠

이때 그의 눈에 띈 사람이
730년대 노섬브리아의(영국) 요크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앨퀸이라는 철학자였습니다

앨퀸은 시도 쓰고 문법에 관한 책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샤를마뉴는 이런 앨퀸을 알아보고
왕국의 교육수준을 올려줄 적임자라고 판단해

 


당시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이라는 지역에 있는
궁정학교 총책임자 역할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앨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죠



앨퀸이 왕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사용되던 알파벳은 대문자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는 부드러운 재질인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는데
그런 덕분에 곡선을 그리거나 필기를 빠르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죠

그러다 보니 직선 위주의 대문자가
곡선 위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렇게 탄생한 것이 소문자입니다

 


앨퀸과 왕국의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규칙 없이 쓰이던 문장에 띄어쓰기를 도입했고
마침표(.)와 쉼표(,)를 넣어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를 표시해줬습니다

그리고 끝을 올려 읽어야 하는 의문문에는 물결표(~)를 넣었는데
이것이 전해져 내려와 오늘날의 물음표가 됐다고 합니다

정말 물음표를 앨퀸이 만들었는지
qo가 변형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은 앨퀸의 물결표 이야기라고 합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물음표스럽게 잘 만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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