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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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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어떻게 왕이 되었나

이시대를 살아간다면 대선이라는 단어가 아주 익숙할 것입니다

 

대선은 대통령 선거를 줄인 말이죠

 

대통령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대표자를 뜻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지만

어떤 결정을 하거나 외교를 할 때 국민 모두가 갈 수 없으니

국민의 대표를 한명 뽑아서 그 사람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죠

 

대한민국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전에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국민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불렀으며

백성들은 모두 왕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왕족이 아니면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죠

 

일반 백성들은 감히 왕이 될 수 있는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되려면 왕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으려면 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야 했죠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왕의 첫번째 아들을 적장자라고 불렀습니다

 

적장자는 세자의 자리에 먼저 올랐고 이후에 왕의 자리를 물려 받았습니다

 

물론 첫째 아들이 아니어도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중전에게 아들이 없거나

덕을 인정받거나

혹은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면 말이죠

 

 

 

조선의 왕은 총 27명이었습니다

첫번째 왕은 태조이기 때문에 제외를 하면

26명의 왕 중에서 적장자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경우는 7명 뿐이었습니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대한제국)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는

적장자가 아니었지만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바로 반정을 통해서 말이죠

반정은 쿠데타를 말합니다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 역시 적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의인왕후를 첫번째 아내로 맞이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아내는 아니지만 후궁인 공빈 김씨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왕의 자리에 올리려고 했지만

임해군은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평가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 있는 동안

광해군은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활약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의 아내인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두번째 아내를 맞이합니다

바로 인목왕후죠

 

우연인지 운명인지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원칙대로라면 공빈 김씨는 후궁이고 인목왕후가 중전이기 때문에

인목왕후의 아들이 적자가 되어 왕의 자리에 올라야 했습니다

 

실제로 1608년 선조는 세상을 떠났고 영창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고작 두살이었고

광해군이 임진왜란때 많이 활약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이 있음에도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때 많은 피해를 봤기 때문에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명나라는 당시 조선과 사대관계였기 때문에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줬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죠

 

이 당시에는 조선 북쪽에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임진왜라때 명나라와 조선이 혼란한 틈을 타서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죠

 

후금은 임진왜란으로 약해진 명나라를 공격했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때 도와줬으니 이번에는 조선이 도와줄 차례라며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할 수 없었죠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원군을 보내지만

상황을 봐서 후금에게 항복하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전쟁중 후금의 승리가 가까워지자 조선군은 후금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명분을 챙기면서

후금과 신리를 챙기는 정책을 펼친 것이죠

 

이것을 광해군의 중립외교라고 말합니다

 

광해군의 이런 외교정책 때문에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내적으론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어쨌든 적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리학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임진왜란의 활약이 없었다면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임해군은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하기도 했고

자신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광해군은 임해군을 제거해버립니다

 

그리고 뒤늦게 태어난 영창대군은 어린애긴 하지만 적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영창대군 역시 제거해버립니다

영창대군은 1614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의 이런 행동을 폐모살제라고 부릅니다

 

폐(버리다) 모(엄마) 살(죽이다) 제(동생)

 

조선은 성리학을 중요시하게 여겼기 때문에

광해군의 폐모살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조선시대에 아주 자주 발생하긴 합니다)

 

어쨌든 서인들은 광해군의 페모살제를 비판했고

중립외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북인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왕이 된 이후에는 북인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죠

 

서인들은 주도권을 가져오길 원했습니다

 

예의를 생각한다면 조선이 아버지인 명나라를 버리고 오랑캐인 후금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중립외교를 언제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죠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에게는 또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가 있었습니다

 

인빈 김씨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의안군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인 신성군은 임진왜란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셋째 아들인 정원군에게는 능양군이라는 첫째 아들이 있었는데

서인들은 능양군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정원군은 광해군의 동생이었기에

임해군, 영창대군처럼 언제든 광해군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능양군은 적장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왕족이었기 때문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긴 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불가능하긴 하지만)

 

광해군은 다른 형제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원군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원군이 살던 집을 빼았고 경덕궁을 지었으며

정원군의 둘째 아들인 능창군의 능력을 질투하다 능창군을 제거해버렸죠

 

능창군은 능양군의 동생이었고

정원군은 능양군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능양군은 광해군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인들은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폐모살제를 이야기 하며

능양군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낼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역모가 시작된 것이죠

 

서인들은 이미 내통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쉽게 통과했고

궁궐을 불태웠습니다

 

광해군은 궁궐을 탈출하긴 했지만 이후에 붙잡혀 폐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보내지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능양군은 덕수궁에서 유폐중이던 인목왕후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의 세상이 시작됐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역모는 서인들과 함께 인조가 주도했기 때문에

인조반정이라고 부릅니다

 

서인들은 반정 성공 이후에 북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했기 때문에

후금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무시했고

오직 명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인들의 이런 정책을 친명배금정책이라고 합니다

 

친(친하다) 명(명나라) 배(배척하다) 금(후금)

 

서인들은 반정을 성공시키긴 했지만

이후에 상황이 그리 안정적이진 못했습니다

 

반정에 함께 참여했던 핵심 인물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이후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이 좋지 못하다며 반란을 또 일으키게 됩니다

 

이괄은 반정 이후 평안도에서 후금을 견제하라는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한양이 아닌 외지에 부임하게 됐다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죠

 

이괄은 군사들과 함께 한양을 침입했고

인조를 몰아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년 뒤인 1624년에 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이괄의 난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중이었습니다

이것을 명청전쟁이라고 하는데

 

1626년 영원성 전투 이전까지는 후금의 기세를 명나라가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원성에 설치된 최신 대포인 홍이포의 위력 앞에서

후금의 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후금은 원래 무역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후금의 최대 거래처는 명나라였지만 명나라와 전쟁을 하는 바람에

거래를 할 수 없었습니다

 

후금의 군대는 강했지만 후금의 국력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후금이 전쟁을 계속 하기 위해선 식량이 필요했고 물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후금은 조선이라는 아주 맛있는 먹잇감에 눈을 돌리게 되죠

 

조선은 임진왜란의 피해가 다 복구되지도 않았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괄의 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군사력이 아주 많이 약해진 상태였죠

 

게다가 후금을 견제하라고 보냈던 이괄이 한양으로 왔으니

후금을 견제할 병력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보기좋게 실패했기 때문에

이괄쪽에 있던 사람들은 조선에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후금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이들은 현재 조선의 상황을 후금에게 말해줬습니다

마침 후금이 조선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배신자들까지 합류하는 바람에 조선을 치기에 아주 적절한 때가 되어버린 것이죠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게 됩니다

이것을 정묘호란이라고 하죠

 

정묘(정묘년) 호(오랑캐) 란(난리)

 

조선은 후금을 막아낼 힘이 없었습니다

후금은 조선 북쪽을 빠르게 점령했고

 

조선의 왕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버렸죠

 

후금의 목적은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과 빠르게 협상을 했죠

 

후금은 조선에게 물자를 뜯어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길 원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후금과 형제관계가 되더라도 명나라와 관계는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협상 이후 후금은 물러갔고

이후에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꿨습니다

 

청나라의 세력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에

조선에게 더 많은 물자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형제관계가 아니라 군신관계로 바꿀 것도 요구했죠

 

조선은 애초에 청나라와 형제관계가 된 것 자체가 굴욕이었습니다

이미 명나라라는 아버지의 나라가 있는데

오랑캐따위가 감히 형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형이 아니라 황제로 모시라니 이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상황은 여전히 나아지지 못했죠

그래서 청나라는 다시한번 강제로 물자를 뺏어오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1636년 청나라와 조선은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하죠

 

정묘호란때도 그랬지만 병자호란때도 똑같았습니다

조선은 청나라를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강화도로 가는 길을 빠르게 막아버렸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열심히 버텼지만 청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게 항복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 선언을 하게 됩니다

오랑캐라고 부르던 나라에게 형도 모자라 황제라고 부르고

항복 선언까지 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부릅니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있었기 때문이죠

 

어쩌면 이것은 인조의 업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폐모살제였습니다

 

그런데 인조 역시 폐모살제와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를 죽이고 소현세자의 아들도 죽이고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 역시 죽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선 시대에 이런 일은 꽤 자주 있었습니다)

 

 

 

인조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후에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이것 때문에 정통성에 문제가 생겨 예송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사건 이후에 나라의 안정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조의 평가를 들어보면 언제나 좋지 못합니다

그것은 역시 역대급이라고 불리는 병자호란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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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이들은 왜 상복을 두고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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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1년 vs 3년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고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를 역사로 배우겠죠

 

그럼 그들도 지금 우리처럼 똑같이 생각할까요?

이사람들은 왜 이런걸로 싸웠지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변화고

어떤 사고방식이 맞다고 할 수 없으니 분명 미래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 세상을 떠난다는 건 정말 슬픈일인 것 같습니다

영원히 살고싶지만 우리는 생명체이고 노화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죠

 

이 슬픈 감정을 달래고 그들을 잘 보내주기 위해

장례식을 치룹니다

 

우리나라에선 장례식을 3일동안 치루는데

이것을 삼일장이라고 하죠

 

삼일장은 정해진 규칙이나 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이나 사정 혹은 사고방식에 따라서 장례식을 하루만 할 수도

이틀동안 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장례식은 아주 중요한 의식중 하나였습니다

예의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을 치루는 것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죠

 

49재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번 7주동안 장례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으며

횟수로 3년동안 장례를 치루는 삼년상이 있기도 합니다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는 복장도 신경써야합니다

이때 입는 옷을 상복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때는 지금보다 예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덕분에 장례식을 치루는 것도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죠

 

조선 18대 왕인 현종 때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죠

 

효종의 장례식을 치뤄야 하는데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로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됐습니다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하죠

 

 

예송논쟁은 총 두번 있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은 기해년인 1659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1차 예송논쟁을 기해예송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1차 예송논쟁에서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로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가 논쟁거리였습니다

 

참고로 자의대비는 인조의 두번째 아내로

장렬왕후로 불리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관(성인식)혼(결혼)상(장례식)제(제사)에 대한 예의는

일반 평민과 사대부는 주자가례를 왕실은 국조오례의를 따랐습니다

 

주자가례와 죽조오례의는 의례에 대한 예절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이런 논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조, 자의대비, 효종의 관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자리는 첫번째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인조의 첫번째 아들은 소현세자였기 때문에 인조 이후에는 소현세자가 왕의 자리를 물려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 받아야 했지만

인조는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줍니다

 

이후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효종의 장례식을 치뤄야 하는 과정에서

국조오례의를 찾아봤지만 두번째 아들이 왕에 올랐을 때는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것이 쓰여있지 않았습니다

하필 두번째 아들이 왕이 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죠

 

사대부의 주장은 두가지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왕도 사대부와 똑같기 때문에 주자가례에 따라 상복을 1년만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과

비록 두번째 아들이지만 왕권을 물려받았으니 특별 대우를 해서 국조오례의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상복을 3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었죠

그런데 서인의 주장은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왕과 사대부가 똑같다고 말하면 왕권을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첫번째 아들이 아니라 두번째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효종은 진짜 왕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죠

 

이들의 말은 '진짜 왕은 효종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이다'로 해석되기 때문에

서인은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인은 말을 바꿨습니다

국조오례의에 보면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첫째 둘째 상관없이 아버지는 1년을 입으니

아들도 똑같이 1년을 입도록 하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서인들은 여전히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현종에게 서인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어쨌거나 효종은 현종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인들이 미울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서인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윤선도를 귀양보내고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만 입도록 지시했죠

 

이 당시 조선은 꽤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같은 외세의 침략으로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었죠

신분을 살 수 있는 공명첩이 발행되면서 돈만 있다면 평민도 양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선택할 정도로 예의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리학을 강조했죠

 

성리학이 강조된 시점에서 현종은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자의대비는 상복을 1년만 입게 된 것입니다

 

1차 예송논쟁은 현종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이 끝내고 현종은 사대부들에게 더이상 이것에 대해 논쟁할 것을 금지할 정도였죠

 

하지만 1674년에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2차 예송논쟁이 시작하게 됩니다

 

1차 예송논쟁처럼 자의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인선왕후의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인조의 아내는 자의대비는 인조의 두번째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어릴 수 밖에 없었죠

 

효종은 1619년생 인선왕후는 1618년생이지만

자의대비는 1624년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효종과 인성왕후가 세상을 떠나는 동안에도 살아있을 수 있었죠

 

서인과 남인의 주장은 이번에도 똑같았습니다

왕과 사대부는 똑같기 때문에 인선왕후도 두번째 며느리로 봐야하고

그런 이유로 자의대비의 상복은 9개월만 입어야 한다고 서인들은 말했습니다

 

남인은 여전히 왕은 특별하기 때문에 효종은 첫번째 아들로 봐도 무방하고

그런 이유로 자의대비의 상복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서인의 주장을 다시 살펴봅시다

1차 예송논쟁 때 이들은 역모의 오해가 있을까 국조오례의를 이용했습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첫째 둘째 구분없이 상복을 1년 입었으니

이번에도 역시 첫째 둘째 구분없이 상복을 1년 입어야 했습니다

 

서인들은 계속 체이부정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국조오례의를 따르게 되면 첫째 둘째 구분이 없어지니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체이부정은 첫째 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왕권을 물려받았으니 정통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체이는 첫째아들을 말하는 것이고 부정은 아니다 라는 뜻이었죠

 

그래서 이들은 이번에는 국조오례의가 아닌 경국대전을 이용했습니다

 

현종은 1차 예송논쟁때는 국조오례의를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경국대전을 이용하니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하며

남인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그 결과 자의대비의 상복은 1년으로 결정났죠

그리고 체이부정을 주장했던 서인의 송시열을 귀양보내버립니다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기 때문에

이후에 남인들의 정치 참여도가 높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싸움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누구는 1년을 주장하고 누구는 3년을 주장하니

절반인 2년만 입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은 상복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략도 있었고

조선 인구의 100만명이 이상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경신 대기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안정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죠

 

그래서 이들은 성리학을 이용해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길 원했습니다

성리학에 따르면 개인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한다면 나라는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임금과 신하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어른과 아이사이에서

서로가 예의를 지키고 그들의 역할을 다 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성리학은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어쨌든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이 됐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인들은 이것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면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참고 참다가 상복 문제가 터졌을 때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돌려서 이야기한 것이죠

 

 

이 당시 조선은 서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서인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집단인데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있었죠

 

남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퇴계 이황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집단입니다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이기론으로 합쳐져 이야기 됩니다

 

이기론에서 이는 본질을 말하는 것이고 기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이와 이황은 본질과 형태에 대한 사상차이를 보이고 있었죠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를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이기이원로는 이와 기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효종을 예로 들어보면 효종의 이는 효종이 본질으로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둘째아들입니다

기는 효종의 현재 형태로 조선의 왕이 되겠죠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가 같다고 말하기 때문에 효종이 왕이라도 둘째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으니

사대부나 일반 평민들의 예의에 대해 적혀있는 주자가례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가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에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로 태어나긴 했지만

조선의 왕이기 때문에 첫째아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왕실의 예의에 대해 적혀있는 국조오례의를 이용한 것이죠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 이후

주도권을 계속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했죠

 

왕과 사대부가 같다고 말하면 왕의 권력을 사대부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역모의 위험이 있더라도 1차때는 1년을 2차때는 9개월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남인들은 소수만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주도권을 가지고 오길 원했죠

 

그래서 이들은 서인들과 반대 의견인

1차때는 3년 2차때는 1년을 말한 것입니다

 

어쨌든 현종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좋게 말해주는 남인들이 예뻐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때는 서인의 편을 들어줬지만 결과적으로 2차때 남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남인들은 정치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예송논쟁은 꽤 위험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왕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하지만 예송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법 평화적으로 해결된 왕의 정통성 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 재난인 경신 대기근때는 예송논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는 점 때문에

현재에 와서 제법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예송논쟁으로 조선의 정치가 한단계는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서인과 남인으로 이야기해서 어려울 수도 있지만

조선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인과 남인이 여당과 야당으로 바뀐 것 뿐이죠

 

하지만 자신들의 철학을 가지고 논쟁을 했던 과거와 달리

철학도 없이 서로 반대 의견만 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선시대 예송논쟁 이후로 정치가 한단계 발전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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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보다 참혹했던 사건 조선 경신 대기근

 

은근한 잡다한 지식(은잡지)에는 여러분들의 뇌를 채워줄 지식, 정보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조선 인구 100만명이 삭제된 사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요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먹기 위해 산다 쪽입니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도 너무나 많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다 먹을 때까지는 죽고싶지 않네요

 

저는 영생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모든 생물은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먹지 못하면 영양분이 생기지 못하고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이정도만 되도 다행인데 계속 먹지 못하면 굶주림에 죽게되는 경우도 있죠

 

https://www.youtube.com/watch?v=4c-HNx58cjs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습닏

집에서 빗소리를 듣고 시원한 날씨가 되는 것은 좋지만

습기가 너무 많아서 찝찝한 날이 되기도 하고

밖에 나가야 하는 경우 우산이 있어도 젖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다면 좋을 것 같지만

식물은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곡식이나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되겠죠

 

채식을 못하면 육식을 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동물들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동물들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식물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농사도 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을 흉년이라고 하며 

흉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비가 오지 않아도

저장해 놓은 식량도 많이 있고 인공 식량도 많이 있기 때문에

기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자연에만 의지해야했던 과거라면 어떨까요?

 

1670년대 조선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를 할 수 없었고

심각한 기근이 오면서 굶주림 때문에 100만명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경술년인 1670년에서 신해년인 1671년 사이에 발생했기 때문에

경술년과 신해년의 앞글자를 따서 경신 대기근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끝나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먹을 게 없어서 인육을 먹는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

이들을 처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기근의 조짐은 1690년 음력 1월부터 보였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유성이 많이 떨어지고 운석이 떨어지는 곳도 있었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우주 먼지가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먼지가 태양을 가려 낮이지만 어둡고 추운날이 계속 됐습니다

 

그리고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 됐는데

햇무리와 달무리는 원래 구름이 많으면 관측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구름이 많으면 비가 올 확률이 높기 때문에

햇무리와 달무리가 관측 된다면 다음날 비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발생된 햇무리와 달무리는 구름이 아닌

우주 먼지에 의해 발생된 것이었죠

 

그래서 비는 오지 않았고 추운날만 계속 됐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지진이 관측되기도 했으며

충청도와 평안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더니

결국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죠

 

음력 3월이 되자 슬슬 모내기를 준비해야 했지만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내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과 다르게 저장된 식량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이때 조선의 왕은 현종이었는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우제는 총 8번을 지냈지만

기우제 동안에는 비는 내리지 않았고

눈이 내리거나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피해를 줬습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되기 때문에 농사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눈에 의해 어린 식물들이 얼어버릴 수 있으며

 

우박이 오면 식물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봄에 내리는 눈이나 우박은 농사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박이나 눈이 잠깐 내린 것이 아니라

음력 4월, 5월, 6월에도 내렸으니

 

1670년의 농사는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봐도 무방했죠

 

우박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농사가 망해버린 상황에

메뚜기 떼와 참새 떼가 덮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은 물론

나무의 도토리나 밤도 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음력 5월 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제 내리던 비는 오늘도 내렸고 내일도 내렸고 내일 모레도 내일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계속 내려 가뭄 이후에는 홍수가 조선을 덮쳐버렸습니다

 

특히 호남지방의 홍수 피해가 컸는데

호남지방은 조선의 곡창지대로 식량이 많이 있는 곳중 하나였습니다

 

홍수로 인해 사람뿐만 아니라 소들도 많이 죽었는데

이때 하필 구제역도 터지면서 수만마리의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에 도움을 주는 소들을 고맙게 생각해 도축을 금지 했었습니다

 

소고기를 먹는 것은 나라에서 금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먹을게 너무 없어서 소의 도축을 일시적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고기로 대기근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애초에 소고기를 자주 먹지 않던 사람들이라 갑자기 몸에 소고기가 들어와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고

이미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탈이 나니 몸은 낫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구제역 때문에 소가 많이 병들었는데 그런 소를 먹게 되면서

위험한 상황이 계속 됐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으로 죽어간 1670년

1671년에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죠

 

심지어 대기근의 영향은 궁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창덕궁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과 궁녀들에게도 전염병이 퍼지나

현종은 거처를 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궁궐에도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많은 관리들이 궁을 탈출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현종은 사직서를 수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사직서를 수리해줬다고 합니다

 

이때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사직서를 14번이나 제출했지만

현종은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의 사직서만은 수리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종은 경덕궁에서 생활을 하다가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궁궐 밖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닏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고

 

집안에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도둑질을 해가거나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해쳐 옷을 훔쳐 입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먹을게 너무 없어서

자신의 자식을 삶아 먹거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굶어 죽는 사람들의 비율을 조금 줄여보고자

진휼소를 마련해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흉년이었던 탓에

굶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진휼소의 쌀로는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휼소에서 밥을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부부가 함께 밥을 기다리다가 남편이 죽었음에도

밥을 다 먹은 이후에 슬퍼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세금을 쌀로 걷고 땅이 적은 사람들의 세금을 조금이나마 감면 해주는

대동법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마을의 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호패법이나 오가작통법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없었고

 

약 1000만명정도로 추정된느 조선의 인구 중

약 100만명정도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공식적으로 516만명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것은 호적에 등록된 인구만 말하는 것으로

상당히 많은 머슴이나 노비는 제외된 숫자입니다

 

조선 인구가 500만인데 사망 인구가 100만이라면

조선 인구의 20%가 죽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조선 인구의 20%가 죽은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망 인구 역시 100만명이다 아니다 라는 말이 많지만

지방 관리들이 자신의 실적때문에 사망 인구를 축소해서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어

100만명 혹은 그 이상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 이후 조선은 인구를 회복하나 했지만

을해년인 1695년에서 병자년인 1696년 사이에 대기근이 또 일어나

약 15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을해년과 병자년의 앞글자를 따 을병 대기근이라고 말합니다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의 피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임진왜란(1592~1598)보다 더 참혹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신 대기근때 먹을게 너무 없어서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했고

과거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던 사건인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있기도 했습니다

 

또 1637년 2월 24일에는 오랑캐라고 부르던 나라에게

조선의 왕인 인조가 직접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 비석을 세우는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지 말자는 의견이 많이 있었죠

 

하지만 을병 대기근 때는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경신 대기근이었지만

그나마 한양의 상황은 조금 나았습니다

 

여기서 조금 나았다는 것은 사망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비에 아주 조금 적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양은 왕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은 지원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한양에는 진휼소나 구휼체제가 잘 운영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때는 지금처럼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는데

 

경신 대기근 이후로 또 대기근이 올까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한양으로 몰렸는데

한양(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집중 된 것이 이때부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때는 얼어죽는 사람의 숫자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후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온돌이 보급화 되기도 했습니다

 

온돌은 만드는데도 유지하는데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양반들도 일부의 방에만 사용했는데

 

때마침 경신 대기근 이후 값싼 온돌이 발명되면서

온돌을 보급화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돌이 보급화 되면서 사람들이 나무 땔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산이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 이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나마 미 개척지인 만주쪽으로 향했는데

이때 청나라와 조선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12년 청나라와 조선은 영토의 경계를 확실하게 정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1670년에서 1671년에 일어났던 경신 대기근과

1696년에서 1695년에 일어났던 을병 대기근의 원인은

이상 기후 현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상 기후 현상은 13세기 초에서 17세기 말까지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관측 됐습니다

 

알프스의 빙하가 확장돼 목초지가 줄어들기도 했으며

폴란드는 대홍수를 겪었고

영국의 템스강이 얼어붙은 사건

중국의 감귤 농장이 망해버린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봄, 여름이 왔지만 이상하게 추운 현상이 계속 됐기 때문에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부르기도합니다

 

소빙하기는 태양의 활동이 감소해 흑점이 줄어들고

지구로 들어오는 열이 1도는 낮아졌기 때문에 생겼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구의 온도가 1도만 높아져도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지구의 온도가 1도만 낮아져도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소빙하기는 500년정도의 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예측에 의하면 2020년~2030년사이에 소빙하기가 또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자연에 의지해야만 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비축해둔 식량도 많고 비가 조금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참사는 모르겠지만 대기근의 참사만큼은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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