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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을까(일제강점기 이유)


은근한 잡다한 지식(은잡지)에는 여러분들의 뇌를 채워줄 지식, 정보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사실 이번 영상을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용이 평소보다 너무 길어서 1부 2부로 나눠야 할지

아니면 그냥 쭉 이어서 만들어야 할지


그동안 업로드 했던 은잡지 영상을 본다면 1부 2부로 나눠야 했지만

언제나 짧은 영상만 만들 것도 아니고

10분 넘어가는 영상도 재밌으면 많이 보니까 하는 생각에 그냥 나누지 않고

이어서 쭉 제작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쭉 따라서 오다보니 내용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그렇다고 중요한 내용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3월 1일은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나 특별한 날이지만

2019년 3월 1일은 더더욱 특별한 날입니다


일제강점기가 계속 되던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펼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죠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물론 99주년도 중요하고 98주년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이 있으니까요


뭐 어쨌든 일본은 왜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며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일까요?



동아시아라고 하면 동쪽에 있는 아시아 나라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이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이 아니라 청나라였죠


사실 청나라는 우물안 개구리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강한 수준은 아니었죠


하지만 청나라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존심이 강했고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본인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근대화를 진행시키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습니다


서양의 나라들은 비교적 덜 발단된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역을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죠


영국과 청나라 역시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청나라에게 모직물을 팔았으며

청나라는 영국에게 차를 팔았죠


하지만 청나라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영국의 모직물을 별로 사지 않았고 자신들이 자급자족 했습니다


영국은 근대화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청나라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마약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었고 청나라 국민들은 아편에 빠르게 중독됐습니다


청나라는 아편을 단속하기 시작했죠

마약상들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 아편을 팔길 원했고

결국 강제로 무역을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편때문에 일어난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840년의 일이죠



우물안 개구리였던 청나라는 영국에게 완패했으며

그 결과 강제로 무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자신들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방심해서 진 것이고 제대로 다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부에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의 근대화 운동은 186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역시 근대화를 진행중이었고

1868년부터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운동은 메이지유신이라고 부르죠


자존심이 강했던 청나라에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것으로 근대화를 진행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실패했지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성공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죠



우리나라도 역시 근대화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이었죠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나라들과 조약을 맺고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군대도 새롭게 창설했습니다

새로운 군대의 이름은 별기군이었죠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이 가르치는 일본식 신식 군대였습니다


별기군과 조선식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별기군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줬지만

구식 군대에는 좋지 않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월급을 13개월이나 밀리는 그야말로 조선판 열정페이를 강요했죠


심지어 밀린 월급을 쌀로 지급했는데

그마저도 불량 쌀을 지급하는 바람에 구식 군대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인물들과

민씨 일가, 그리고 별기군을 습격했죠


188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합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쪽 사람들을 말하며

이 당시 조선의 왕은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고

이들은 군란을 진압했죠


일본은 임오군란 때문에 일본 사람과 공사관이 피해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에 조선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보상을 약속하는 문서같은 것이었죠


이 조약을 제물포 조약이라고 합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중에는

일본 경비병이 조선에 들어온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습니다


과거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 무역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일부 사람들은 청나라가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강한 줄 알았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완패했기 때문이죠

청나라의 시대는 갔으니 청나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세력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마침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인 세력들에게 절호의 기회였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1884년에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부릅니다


갑신정변은 성공하는 듯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을 알아챈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청나라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일본은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급진 개화파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죠



갑신정변은 12월 4일(양력)에 일어나 12월 6일에 끝났습니다

고작 3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갑신정변을 삼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은 더더욱 심해졌고

일본은 임오군란때처럼 비슷한 핑계를 대면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에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지금 당장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지만

이후에 한쪽의 군대가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한쪽의 군대도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이 조약을 톈진조약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동안 조선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85년 텐진조약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대 혼란 상태였죠



양반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혼란 상태에서 다같이 조금 참고 조금 덜먹어야 했지만

자신들의 배는 빵빵하게 채워지길 원했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식량이 많이 나오는 곳)였습니다

식량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관리들은 더 많은 식량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농민들은 폭발했죠


농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고종은 운동을 수습하기 위해

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알아서 해결하지 않고 계속 외부의 힘을 빌린 것이죠


하지만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가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가 들어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죠


고종은 이것을 완벽하게 무시했습니다

감히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데 어디 일본의 군대가 들어온단 말인가

이런식으로 말하면서 말이죠


고종의 요청대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고종의 예상과 단리 일본의 군대는 바로 다음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농민들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일을 간섭하길 원하지 않았고

곧 모내기를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와 빠르게 합의 했습니다


사건이 종료되면 톈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일본의 군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계속 머무를 구실을 찾고 있었죠


일본은 자신들이 알아본 결과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군대를 물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을 함께 개혁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며 요청을 무시했죠


이에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해버리고

고종에게 청나라와 맺은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제시켰습니다



이것에 분노한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으며 청일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도중에 일본은 조선을 서서히 변화시켰습니다

청나라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나라로 말이죠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조금씩 넣었습니다


이것을 갑오개혁이라고 합니다



청일전쟁 역시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강한줄 알았던 청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이것 때문에 진행중이던 양무운동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청나라에게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전쟁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습니다

청나라가 일본에게 보상을 하는 것과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죠


일본은 요동반도 진출에 성공하게 됐고

자신들의 목적인 만주지역까지 진출하길 원했습니다


만주 위쪽에는 러시아가 위치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일본이 점점 위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그냥 보고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양 강대국들과 한번에 싸울 수 없는 일본이기에

어쩔수없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죠


이것을 삼국 간섭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정부는 서서히 친러세력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자신들이 힘들게 영향력을 넣어놨더니

갑자기 러시아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시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사변 이후 친러세력의 힘은 줄어들었고

친일세력의 힘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도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고종은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세력을 몰아냈지만

이제 조선은 친일이 아니라 친러세력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건을 쭉 보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외부의 힘을 빌렸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주 약한 나라라는 것을 스스로 알려버린 셈이죠



경복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것을 대한제국 선포라고 하며 189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자신을 왕이 아닌 황제라고 불렀죠


러시아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쪽으로 영토를 넓히길 원했습니다


일본 역시 대한제국을 계속 노리고 있었죠


하지만 러시아를 혼자서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더이상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일본과 동맹을 한 것입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한 것이죠


누가 대한제국을 먹느냐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죠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앞섰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한다면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군인과 물자가 제때 도착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인과 물자가 도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러시아를 기습공격 했습니다


이렇게 대한제국을 갖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904년의 일이며 이것을 러일전쟁이라고 부르죠



일본의 계획이 좋았던 것일까요

많은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겼던 청일전쟁에 비해

러일전쟁은 일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자신들의 히든 카드인 발트함대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했지만

당시 일본의 함대도 아주 강했고 일본의 전략이 너무 좋았어서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대패했고

이것으로 러일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러일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국력이 한계에 다달았죠


다행히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청일전쟁때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이라고 말했죠



러시아 내부 사정도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근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때 노동자들의 비폭력 시위도 많이 일어나고 있었죠


그런데 러시아 정부에서 노동자들을 사살해버리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국 모두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보상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중재 아래 러시아와 조약을 맺습니다


1905년의 일이며 이때 맺어진 조약을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하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도, 보호를 승인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것이 우니라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자기들끼리 이렇게 정했다는 것입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허락해준 셈입니다



러일전쟁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은 여전히 위태위태 했습니다


일본은 돈이 필요했고 자원이 필요했고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미국과 러시아가 승인까지 해준 시점이었기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이후 일본도 대한제국을 식민지배 한 것이죠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나게 됩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한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파견된 일본 대사관들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찬성을 받아내는데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조약입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됐습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보고 을사오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언제나 대륙 진출을 꿈꿨죠


일본의 목표는 만주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청나라 전체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조선은

일본이 먼저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언제나 기회를 보던 일본은 여러가지 사건을 핑계로

조선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들의 군대를 보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완전히 자기들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대륙 진출이라는 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배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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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사건 아일랜드 대기근

-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기근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



먹는 것이란 정말 중요하죠

여러분은 먹기 위해 사나요, 살기 위해 먹나요


저는 먹기 위해 삽니다


배고픔을 참는 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참는 것보다 힘든 것 같습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 해서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있다고 하죠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말은 아니라고 합니다


뭐 어쨌든 이런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식욕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죠





식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식량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죠


식량 부족은 기본적으로 먹는 양이 인간보다 훨씬 많은 동물들이

더 큰 영향을 받죠


우리의 주식은 쌀이죠

만약 어느날 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세계적으로 쌀을 수확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요?



쌀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들의 가격이 폭등할 것입니다

밀가루나 고기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죠


식량의 가격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식량을 사먹을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땅도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죠

도둑질이 아니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겠죠


이렇게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과거 아일랜드는 8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이 있은 후 인구가 400만으로 감소했죠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은 바로 감자였는데

이 사건을 아일랜드 대기근 혹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식민지였던 시절이 있었죠


아일랜드는 영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기술력은 물론 아일랜드에서 나는 식량은 모두 영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작물,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들은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돈이 없었기에

조건이 필요했죠


작물의 가격이 쌀 것, 큰 노력이 없어도 대량 재배가 가능할 것

환경이 좋지 않아도 잘 자랄 것



구황작물


감자나 옥수수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입니다

구황작물이란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대량 재배가 가능한 작물을 말합니다


미래에는 지구에 식량이 부족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측합니다

우리의 미래 식량이 될 작물은 아마 구황작물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지금이야 감자는 최고의 음식이지만

그 당시 악마의 작물이라고 불려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자는 가격이 쌌죠

아일랜드 사람은 주식으로 감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정했고

구황작물의 힘 덕분에 굶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구수가 점점 불어났고

언젠가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도 계속 가질 수 있었죠



하지만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생긴다고

1842년 미국 동부에 감자 마름병이라고 불리는

감자 역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감자 역병은 잎에서 증식하며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에서

이틀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지기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은

감자 역병이 활동하기에 가장 최적의 환경이었죠


또 이것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 때문에

감자 역병을 막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역병은 순식간에 유럽에도 퍼졌고

아일랜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45년 여름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고

그 덕분에 감자 역병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를 수확하려 했지만

이미 감자 역병이 퍼져버려

감자를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나는 모든 식량은 영국이 가져가고 있는 상황인데

감자 농사까지 망해버려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릴랜드 사람들은 점점 굶어 죽기 시작했죠



특히 1846년 ~ 1847년 겨울은 대기근으로 인해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정부는 감자 대기근에 대해 어떠한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자로 인해 800만까지 늘어났던 아일랜드 인구는

감자로 인해 400만까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일랜드 대기근은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기근으로 불리고 있죠



인터넷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한다라며

병의 뚜껑까지 꽉 차있는 생수, 푸짐하게 나오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과거 아일랜드 대기근의 영향인 것이죠


아일랜드에서 감자 요리가 발달한 것도

피쉬앤 칩스가 유명한 것도 대기근의 영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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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흑인, 백인 사람에 따라서 피부색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사람의 피부색에 따라 인종을 분류하곤 합니다

아시아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황인

아프리카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흑인

아메리카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백인


그런데 사람은 하나의 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인류의 기원은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져 있죠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호모 사피엔스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을 나누는 것은 웃긴 이야기고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하는 것은 더더욱 웃긴 이야기인 것이죠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흑인으로 진화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100%다 라고 말할순 없지만

최초의 인류는 흑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그런데 어떤 이유때문에 우리의 피부색이 나눠지게 된 것일까요?



피부색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멜라닌입니다


멜라닌은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외선을 받으면 피부는 멜라닌을 만들어내죠


멜라닌은 피부를 까맣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햇빛을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 수록

멜라닌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피부가 까맣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인류가 탄생했던 아프리카는

햇빛이 오랬동안 강하게 내리쬐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살면 햇빛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적으로 멜라닌이 많이 나와 까맣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8/08/08 - [은근한 잡다한 지식/역사 잡다한 지식] - 흑인은 왜 곱슬머리가 많을까? 흑인이 레게머리를 하는 이유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의 북반구로 올라갈수록 태양열을 더 약하게 받죠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똑같이 태양열을 받는다 하더라도

받는 면적에 따라서 더 덥더나 덜 덥거나 합니다


북반구나 남반구의 경우 적도보다 둥글기 때문에

태양열을 덜 받게 되고

이런 이유때문에 다른 온도가 나타납니다


열대기후, 온대기후, 냉대기후, 한대기후처럼

같은 태양을 받더라도 다른 기후가 나타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죠



아프리카에서 살땐 멜라닌이 자외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줬습니다

하지만 북반구로 올라갈 수록

멜라닌 덕분에 죽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수 있는데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하죠

이중 비타민D는 자외선을 받으면 만들어지는 영양소입니다



그런데 멜라닌이 많이 있는 피부는

자외선을 흡수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외선을 통해 비타민D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비타민D는 칼슘의 흡수를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칼슘이 없으면 뼈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죠


구루병 골다공증의 위험이 높아지고

심혈관계질환, 당뇨병, 암의 발병 확률도 증가하죠


이런 질병때문에 흑인은 북반구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땐 강한 햇빛때문에 많은 멜라닌이 있어도

자외선을 흡수해 비타민D를 만들어냈지만


북반구로 올라가니 햇빛이 약해져

지금의 피부상태론 자외선을 흡수하지 못해

비타민D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죠



흑인은 북반구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를 제외하곤 말이죠


흑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덕분에

피부가 하얗게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흑인보다 멜라닌이 적었기 때문에

북반구의 약한 자외선도 흡수해 비타민D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백인은 이런 이유때문에 흑인보다 생존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자연적으로 자손을 번창할 확률도 더 높았죠


그래서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백인이 된 것이죠



지구의 가장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극이 있습니다

북극에는 에스키모인이 살고있죠


에스키모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들은 흑인입니다


분명 흑인은 살아남기 힘들었을텐데 어떻게 에스키모인들은 흑인일까요?


북극은 날씨가 춥기 때문에 과일, 야채, 작물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생선이나 육식을 주로했죠



생선에는 비타민D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외선을 통해 비타민D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논리라면 한가지 이상한 점이 생깁니다


지구의 71%는 바다입니다


즉 에스키모인이 아니더라도 생선을 먹었을 것이란 이야기죠


생선을 먹었다는 것은 비타민D를 먹었다는 것이고

멜라닌이 많은 흑인이어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란 뜻이죠


그래서 최근에는 햇빛에 의해 피부의 색이 바뀐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이라는 학설이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로 농경생활의 시작 때문이라는 것이죠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길러서 먹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사냥을 나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서 먹는 영양소가 바뀌었습니다

생선을 먹지 않으니 비타민D를 먹지 안게 되었고

자외선을 통해서라도 비타민D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멜라닌이 많은 덕분에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흑인은 점점 살아남기 힘들었고

처음에는 소수였던 백인이 점점 많아지게 된 것이죠


농경의 시작은 1만 2천년 ~ 1만 천년전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백인의 유전자가 나타난 시기도 이와 같다고 하네요



황인도 백인과 똑같은 이유때문에 탄생했습니다

햇빛을 통해 비타민D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고

우연히 흑인과 다른 유전자를 가진 돌연변이가 태어납니다


다만 여기서 백인과 피부의 색이 다른 이유는

백인과 다른 돌연변이였기 때문이죠


황인은 흑인보다 위쪽에 백인보다 아래쪽에 주로 분포하고 있죠

즉 백인보다 햇빛을 더 받고

흑인보다 햇빛을 덜 받는 것이죠



이 위치에선 백인이나 흑인보다 황인일 때 생존확률이 더 높았고

자연스럽게 자손을 번창할 확률도 더 높았던 것이죠


피부의 색이 다른 것은 자연선택입니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더 잘살아남을 수 있는 색이 선택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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