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어린아이도 피웠던 조선시대 담배의 역사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훈장님과 맞담배 피우던 조선시대

담배가 처음 들어온 것은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던 때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마야 문명때부터 사람들은 담배를 피웠습니다

 

마야 문명 벽화를 보면 담배를 피우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담배를 피울 때 나오는 연기 때문에 주술을 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피웠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의해서 처음 들어오기 시작했고

광해군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담배의 중독성과 위험성 때문에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는 판매가 금지되어 있지만

담배가 처음 들어오던 조선시대 때에는

어린아이들도 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지금의 담배는 궐련 형태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형태로 보급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때 담배가 들어올 때는 파이프 형태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양반이나 평민이나 똑같은 담뱃대를 사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반들은 평민들과 똑같은 담뱃대를 사용한다는 것이 불만이었고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태우는 담배통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인 설대

입으로 물고 빠는 물부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반들은 담배통과 물부리를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꾸몄으며

일부는 금으로 치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설대의 길이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설대의 길이가 길어지면 자신이 불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불을 붙여줄 사람이 필요 했죠

 

즉 설대가 길다는 것은 불을 붙여줄 하인이 있다는 뜻이고

자신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어필할 수 있었습니다

 

양반을 따라다니며 담배에 불을 붙여주던 하인을 연동이라고 불렀는데

어린 아이들이 이런 일을 맡아서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반들만 사용하던 길다란 담배를 장죽이라고 불렀으며

양반이 아닌 사람들이 사용하던 짧은 담뱃대를 곰방대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담배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약초로 활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면

담배는 약 학목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는 가래를 없애주고 소화를 도와주고

숙취에 도움을 주고 추위를 막아주는 신비한 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일본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담배를 남쪽에 서 온 신비한 풀이라고 해서

남령초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南(남녘 남) 靈(신령 령) 草(풀 초)

 

그래서 어른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담배를 피웠던 것입니다

 

프랑스에 장 니코라는 사람은

담배를 약초로 활용하기 위해 재배를 시작했는데

담배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장 니코에 의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에 들어있는 니코틴이라는 물질의 이름도

장 니코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담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담배 농사가 쌀 농사보다 돈이 더 됐기 때문에

쌀 농사보다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보통 손님이 오면 차와 술을 대접하지만

담배를 접한 뒤로는 담배를 피우는 문화가 자리 잡기도 했고

담배를 이용해 교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1636년에 발생한 청나라와 조선의 전쟁인 병자호란 때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포로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청나라에 담배를 지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담배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너도나도 담배 농사를 짓다보니

결국 쌀이 부족하게 되었고 쌀이 없으니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담배를 끊지 못했고

끼니는 걸러도 담배는 거르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담배가 알려질 때 약초로 알려졌기 때문에

여자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서당에서 훈장님과 학생이 맞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며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담배 피우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처럼 담배에 대한 예절이 자리 잡지 못했던 때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워 화재가 많이 일어나기도 했고

 

심지어 임금님 앞에서 신하가 담배를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기도 하네요

 

조선의 철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보면

담배는 돈이 많이 들고 건강을 나쁘게 하는

이로운 것보다 해로운 것이 더 많은 물건이다 라고 나오고

 

담배를 구하러 다닐 시간에 공부를 한다면 대현이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나옵니다

 

마치 오늘날 부모님들이 게임할 시간에 공부를 하면 서울대에 가겠다!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죠

 

담배 중독은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제신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자호란이 있기 전 청나라가 언제 조선에 침입할지 모르는 시점인데도

모여서 담배만 피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조선시대의 상황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는

담배 피우는 것과 농사 짓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지만

 

22대 왕인 정조는 제사 지낼 때 술은 금지하지만

담배는 피워도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실제로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합니다

 

23대 왕인 순조는

애들이 젖만 떼면 담배를 찾는다고 한탄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개항 이후 궐련 형태의 담배가 들어오기도 했고

신분제도가 폐지 되면서 긴 담배인 장죽은 사라지게 되었고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담배가 인기를 끌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약초로 알려졌던 담배이기에

어린 아이도 피웠고

예절도 몰랐던 담배이기에

사람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피웠지만

 

지금은 담배가 해롭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어떻게 피워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담배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피울지 말지를 정하는 것은 본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를 살고 있으니

담배 예절을 잘 지켜 다른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피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이긴 전쟁이 맞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조선은 정말 전쟁에서 이겼을까

현대에 와서 전쟁이 완전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전쟁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국가간 영토가 확정되지 않았을 때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전쟁을 많이 했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공격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한 싸움을 계속 했죠

 

나라를 발전시켜준다는 목적으로 들어왔지만

사실상 그것은 명분일뿐 자신의 나라를 더 부유하게 만들고

자원을 약탈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약육강식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겠죠

 

 

특히 19세기에는 서양 국가들이

아사아 국가들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1840년대에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했고

1850년대에는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항당했고
1860년대에는 청나라가 주룽 반도(홍콩)를 영국에게 넘겨주었고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관계였기 때문에

청나라가 서양 국가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은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넘겨준 연해주는

조선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에

이제 러시아는 조선으로 오겠구나 하는 걱정까지 생기게 되었죠

 

그리고 실제로 1864년과 1865년 러시아는 개항 목적으로 조선으로 왔습니다

 

이당시 조선의 왕은 고종이었지만

고종의 나이는 너무 어렸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노리는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조선은 유교 중심의 국가였고

신분제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런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죠

 

즉 천주교는 당시 조선의 상황과 맞지 않는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대부들은 천주교와 접촉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1866년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황제의 나라가 천주교를 박해했는데

신하가 천주교와 접촉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일

흥선대원군은 계속 천주교와 접촉을 하면 자신의 자리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천주교를 박해하기로 합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12명의 프랑스 신부중

9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병인년인 186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병인박해라고 합니다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리델 신부는 청나라에 있는 로즈 제독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로즈 제독은 복수를 위해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프랑스는 강화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무기를 이용해 문수산성을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이후에 정족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정족산성에서 매목하고 있던 양헌수에 의해 패배하고 맙니다

 

로즈 제독은 많은 병력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더이상 진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결국 프랑스는 조선을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병인박해와 마찬가지로 병인년인 186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은 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군은 5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어쨌든 프랑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퇴했기 때문에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돌아가는 중에

조선의 문화재를 빼앗아가거나 불태워버렸습니다

 

특히 강화도에는 중요한 문서나 왕실에 관한 서적을 보관해둔

외규장각이 있었는데

이곳에 보간된 조선왕실의궤를 약탈해 갔습니다

 

물론 지금은 협상을 통해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받긴 했지만

 

마냥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조선의 피해가 훨씬 더 큰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이 프랑스의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프랑스가 병력을 더 끌고 왔더라면 

조선은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프랑스가 병력을 더 끌고오지 않은 이유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 하기 위한 전쟁을 하고 있던 중이라

조선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조선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병인양요가 있기 전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개항을 목적으로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으로 왔고

개항을 요구했지만 조선이 이것을 거부하자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평양 감사인 박규수의 부대가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는데

이것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라고 합니다

 

역시 1866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알기 위해

여러차례 조선에 배를 보냈지만 큰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완전히 불타버렸고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후라

여기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병인양요 이후 여러가지를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게에 물건을 실어 장사를 하는 보부상이 있었는데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는 특징 때문에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총에 대비하기 위해

13겹의 삼베를 이용한 방탄복인 면제배갑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신미년인 1871년

미국 역시 배를 끌고 강화도로 왔습니다

 

제너렬 서먼호와 개항 목적이었죠

 

조선은 개항을 거부하였지만

미국의 함대는 계속 조선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포를 발사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신미양요라고 합니다

 

보부상, 면제배갑 등 여러가지를 대비하긴 했지만

우수한 무기를 당해낼 순 없었습니다

 

조선과 미국은 광성보에서 맞붙었는데

패배가 확실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쉽게 항복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광성보가 함락된 이후에도 조선의 저항은 계속 됐고

많은 병력을 끌고오지 않은 미국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결국 조선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신미양요에서 미국은 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은 24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인양요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결국 미국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퇴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가 있은 후

서양 세력을 몰아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서양 세력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정책을 쇄국정책이라고 합니다

 

신미양요가 있기 얼마 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독일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고 하는데

독일 역시 조선과 개항을 할 목적으로 왔다가 협상이 잘 되지 않자

조선은 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이용해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양요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서양국가가 벌인 일이었죠

 

흥선대원군 입장에선 서양인들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근대화를 진행하는 상황속에서

조선의 문은 굳게 닫히게 된 것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어쨌거나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긴 합니다

조선의 피해가 더 컸고 사망자가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두 국가 모두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말이죠

 

하지만 정말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정쩡한 승리 덕분에 조선의 문은 닫히게 되었고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 근대화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피해는 훨씬 더 많이 입었고

소중한 문화재까지 약탈당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번의 승리는

마냥 기분좋은 승리로만 기억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호주의 생태계가 박살나버린 사건 회색토끼 전쟁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튜브 채널 은근한 잡다한 지식 가기(클릭)

 

회색토끼 전쟁

전쟁은 많은 살상자를 내기 때문에

가장 최후의 수단 아니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행위입니다

 

요즘에는 전쟁을 거의 하지 않고 있지만

과거에는 각자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전쟁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뭐 각자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겠죠

 

전쟁이라고 하면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간의 군사 충돌을 떠올리겠지만

호주에서는 사람과 동물간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호주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다른 나라들과 많이 떨어져 있어

호주가 아니면 서식하지 않는 동물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 웜뱃같은 동물들이 대표적이죠

 

지금이야 동물원에 가면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호주에 처음 간 사람이 이런 동물을 본다면

미지의 세계에 온 것처럼 신기했을 것 같네요

 

 

토끼는 귀여운 이미지 덕분에 동화에도 많이 등장하고

여러 매체에서 캐릭터로 활용하기 때문에

우리이게 친숙한 동물중 하나입니다

 

때로는 영악한 동물로 표현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귀엽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주사람들에게 만큼은 토끼는 귀여운 동물이 아닌

악마같은 동물입니다

 

원래 호주에는 토끼가 살고 있지 않았지만

1859년 영국 출신의 토마스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사냥목적으로 사촌에게 야생토끼 24마리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호주에 처음 토끼가 발을 디디게 됩니다

 

토마스 오스틴이 사냥으로 들여온 토끼를 모두 잡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 당시에는 사냥을 즐겨 했다고 합니다)

 

토끼중 일부가 야생으로 도망치면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토끼는 강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안정적인 종족 번식을 위해선

교미시간이 짧아야 했습니다

 

교미시간이 길다면 교미를 하는 동안 천적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죠

 

암컷 토끼의 경우 자궁이 두개인 덕분에

임신을 하고 있는 동안 또 임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새끼를 많이 낳기 때문에

 

포유류계의 바퀴벌레라고 불릴정도로 번식력이 뛰어난 동물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짧은 교미시간과 뛰어난 번식력 덕분에

야생으로 도망친 토끼의 개체수는 미친듯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토끼의 천적은 여우, 늑대, 독수리같은 동물들이었지만

호주에는 이런 동물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호주는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이기 때문에

토끼는 1년 내내 번식할 수 있었죠

 

토끼의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호주의 풀들이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풀이라는 풀은 모두 뜯어먹었고

나무 뿌리를 먹어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땅에 구멍을 파는 바람에 여러가지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관리하는 목장에 들어와 가축의 식량을 먹기까지 하면서

호주의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있었습니다

 

영국사람이 들여온 고작 24마리의 토끼

그중 도망친 몇마리가 호주를 완전히 박살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호주는 이제 토끼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1901년 피해가 심해지자 토끼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설치했습니다

 

울타리는 총 세번에 걸쳐 설치했는데 길이만 300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끼의 개체수는 더 증가했고

울타리는 낡아갔습니다

 

결국 1920년 토끼는 울타리를 뚫고

다시 호주 생태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주는 토끼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포상금을 걸어 토끼 사냥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군대를 동원해 토끼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전염병을 퍼트려 토끼를 멸종시키려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토끼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29년 미국 주식이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대공황때문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돈을 벌지 못하니 먹을 걸 사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호주 역시 대공황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호주 사람들은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았습니다

 

호주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토끼가 있었기 때문이죠

 

토끼는 사냥하는데 어렵지도 않았고

고기가 맛있기도 했으며 단백질이 풍부했기 때문에

대공황이 왔어도 호주사람들은 토끼고기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호주도 연합국 소속으로 참전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식량이 별로 없었지만

호주에는 여전히 토끼가 많이 있어서

 

토끼고기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부족한 식량을 대체하기도 했습니다

 

울타리를 세울정도로 혐오스러웠던 토끼지만

대공황과 세계대전때만큼은 호주사람들을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영웅이었습니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끝난 뒤 토끼는 다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토끼의 개체수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죠

 

울타리, 사냥, 전염병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호주에는 토끼의 천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어나는 토끼의 개체수를 막지 못했다고 판단해

토끼의 천적인 여우를 들여오기로 합니다

 

외국의 용병을 이용해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죠

 

초반에는 여우들이 토끼를 잡아먹으면서

토끼 문제가 해결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우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는 토끼들이 넘처났기 때문에

여우에게 이보다 좋은 땅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많으니 번식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덕분에 여우의 개체수가 늘어나게 됐습니다

 

호주에는 여우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야생동물들은 여우 대처 방법을 몰랐습니다

 

여우 입장에선 도망가는 토끼를 사냥하는 것보다

도망가는 방법을 모르는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에

호주의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끼를 잡으라고 들여온 여우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호주의 토종 야생동물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이죠

 

여우로도 토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1950년 호주는 점액종 바이러스를 이용해 토끼의 개체수를 줄이기로 합니다

 

점액종 바이러스는 토끼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높은 살상력을 보여주는 바이러스입니다

 

이때 약 6억마리정도 토끼가 호주에 살고 있었는데

점액종 바이러스를 사용한 이후로 1억마리까지 감소했다고 합니다

 

호주에서 점액종 바이러스로 토끼의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을 본 프랑스의 한 생물학자는

자신의 개인 사유지에 있는 토끼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점액종 바이러스를 들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빠르게 퍼져 1954년에 프랑스 야생 토끼의 90%를

1955년 영국 야생토끼의 99%를 사망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주에선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억마리까지 떨어진 토끼였지만

점액종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긴 토끼가 늘어나게 되면서

1991년 다시 2억~3억마리로 불어나게 됐습니다

 

점액종 바이러스는 모기나 벼룩에 의해 전염 되는 바이러스지만

호주에는 벼룩의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벼룩은 숙주에 달라붙어 피를 고정적으로 빨지만

모기는 벼룩에 비에 피를 빠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이러스가 충분하게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죠

 

바이러스가 충분하게 들어가지 못하니 일부 토끼들은 점액종 바이러스에 대해 면역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토끼들 사이에서 자식은 점액종 바이러스에 내성이 있을 확률이 있었고

이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다시 토끼 공포가 시작되어버린 것이죠

 

1995년에는 토끼 출혈병이라는 또다른 바이러스를 이용해

토끼 개체수를 줄이려고 했습니다

 

토끼 출혈병 역시 토끼에게 아주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두달만에 천만마리가 넘는 토끼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토끼 출혈병은 어느정도 효과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토끼의 개체수가 줄자 여우의 개체수도 줄어들었으며

토종 식물이 자라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토끼 출혈병 역시 내성을 가진 토끼들이 태어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호주는 토끼의 개체수를 확실하게 줄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토끼가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토끼 때문에 생태계가 무너지고

마치 전쟁을 한 것처럼 많은 피해를 본 호주

 

그래서 이 사건을 회색토끼 전쟁 혹은 토끼 역병이라고 부릅니다

 

 

여우는 토끼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 들여왔다고 말했지만

1855년 사냥을 위해 들여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우 역시 늘어나는 개체수를 조절하지 못했고

많은 야생동물이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1840년에는 무건운 짐을 들기 위해 낙타를 들여왔지만

1900년대에 철도가 깔리게 되면서 낙타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호주 사람들은 낙타를 그냥 방치해버렸죠

 

시간이 지나 낙타는 100만마리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낙타 한마리가 한번에 먹는 물의 양은 약 100리터정도

 

낙타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주변 식물들이 말라버리는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낙타는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살고 있어

헬리콥터를 이용해 낙타의 개체수를 줄여야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호주는 사탕수수 농사를 많이 하는 곳인데

사탕수수를 먹는 딱정벌레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1935년 딱정벌레를 없애기 위해 수수두꺼비를 들여왔습니다

 

하지만 수수두꺼비는 높이 뛰지 못하기 때문에

사탕수수 위쪽에 있는 딱정벌레를 먹지 못해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수두꺼비는 독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수수두꺼비를 먹으려는 다른 야생동물들만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독때문에 사람이 직접 개체수를 조절해야 하는데

과거보다 뒷다리가 더 길어지는 형태로 진화해버리는 바람에

이동속도가 빨라져 개체수를 줄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네요

 

호주에는 신기한 야생동물이나 식물이 많이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여온 동물들 때문에 많은 종류가 멸종됐다고 합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들여온 동물들이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있는 상황이죠

 

우리나라도 과거 식용 목적으로 황소개구리를 들여왔다가

큰 피해를 봤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생태계를 왜 인간이 간섭하면 안되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네요

자연은 정말 위대한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