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시작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실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민국은 民(백성 민) 國(나라 국)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니까 우리 맘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그것은 안됩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주인 행세를 하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각 분야에 전문가를 투표를 통해 뽑아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도록 맡기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도록 말이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곤 합니다
특히 그저 자기의 의견이 맞다며
말싸움을 하다 결국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싸우려고 정치인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이런 싸움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XJGeqRdwp6U
고려는 국교를 불교로 삼았지만
고려 후기로 가면서 유교 중심
그러니까 성리학 중심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은
그당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세력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길 원했습니다
이때 선택받은 세력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세력을 점점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리학 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길 원했죠
하지만 이러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고려는 이미 망했으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 중심의 급진 개혁파와
고려라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조금씩 바꿔가야 한다는
정몽주 중심의 온견 개혁파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당하면서
온건 개혁파는 몰락하게 되고
급진 개혁파에 의해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집현전에서 연구한다고 해서
관학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官(벼슬 관) 學(배울 학) 파
하지만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7개 왕인 세조가 된 뒤 집현전이 폐지 돼
관학파의 세력이 약해지거나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참여했던 일부 훈구파 세력들은
계유정난 성공 이후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훈구파라고 부르고 있죠
勳(공 훈) 舊(오래 구) 파
반면 조선 개국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
몰락한 온건 개혁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나름대로 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속세를 벗어나 산속에 있다고 해 사림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士(선비 사) 林(수풀 림)
권력을 잡은 훈구파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챙겼습니다
특히 부정부패를 이용해 토지를 많이 소유하게 되었죠
사림파들은 다시 한양으로 진출하길 원했지만
훈구파가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이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계속해서 공부를 한 덕분에
그리고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
너무 커져버린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선택하게 되면서
사림파는 하나 둘 한양으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삼사라고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많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삼사는 조선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사헌부는 벼슬아치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거나 탄핵을 시키는
지금의 검찰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사간원은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의견을 내는
지금의 감사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홍문관은 문서를 처리하고 사적(역사책)을 관리하는
폐지된 집현전의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삼사는 하나의 세력을 견제하기 아주 적절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죠
훈구파는 이렇게 커져가는 사림파를 그대로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번의 사건을 통해 사림파를 견제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화라고 합니다
士(선비 사) 禍(재앙 화)
무오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기묘년인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을사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를 입는 과정에서도 사림파의 세력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가
문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치주의를 펼치면서
사림파는 드디어 조선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향촌의 서원을 통해 후계자를 계속 양성했지만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훈구파는
하나 둘 시간이 지나 늙어가거나
사림파에 흡수 되었습니다
이제 사림파가 조선을 잘 이끌어 갔다면 좋았겠지만
사림파 내에서 또 분열이 생기며 두 세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요즘의 회사에는 채용을 담당하는 인사과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조입니다
이조에서 사람을 뽑는 역할을 했던 것이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이었는데
이 둘은 사람을 저울질 한다고 해서
銓(사람가릴 전) 한자를 사용해 이조 전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조 전랑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사람을 뽑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이조 전랑이 되는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삼사는 반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조 전랑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
여러 부서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는 통청권
과거시험에 탈락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곧바로 채용할 수 있는 낭청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을 남용한다면
자기편이라고 생각이 되거나
자신에게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할 수 있었고
자리 역시 세습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번 권력을 잡으면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조선의 9대 왕인 성종 이후 관행으로 하던 것이 굳어지면서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죠
문제가 된 것은 이조 전랑이었던 오건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지만
심의겸이 이것을 반대하면서 부터입니다
물론 이때는 반대가 있었어도 김효원이 이조 전랑에 자리에 오르긴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김효원이 후임을 정해야 할 때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적절하다는 추천을 받게 되지만
이것을 김효원이 반대하면서
하나였던 사림파는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이황의 영향을 받은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이이의 영향을 받은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단순하게
경복궁을 기준으로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고
심의겸이 집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갈라졌다고 해서 붕당이라고 합니다
朋(벗 붕) 黨(무리 당)
물론 이전에도 크고 작은 의견 다툼은 있었겠지만
붕당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
이때부터가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붕당은 하나의 세력이 독재하는 것을 막고
영양가 있는 토론을 통해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 세력의 의견을 무작정 반대하는 식으로 변질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
자기가 속한 당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붕당 역시 막을 내렸고
이후부터 하나의 세력이 조선의 정치를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시작되면서
여당과 야당으로 나눠지는
조선시대의 붕당과 비슷한 정치 형태로 바뀌게 됐죠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발전하고 기술도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처럼 자기 자신들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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