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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20년 전 모든 걸 끝내버린 불평등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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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그날 맺어진 강제 조약


을사늑약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2025년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2025년은 60년에 한번 돌아오는 푸른 뱀의 해입니다
푸른 뱀의 해를 을사년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https://youtu.be/kGvtlTzbM3M

 


산업혁명 이후 18세기, 19세기부터
서양을 중심으로 근대화에 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람은 아시아에도 영향을 줬는데
여러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일본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나라입니다
영토를 늘리는 것이 쉽지 않고
세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고립될 가능성도 적지 않은 나라이죠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대륙 진출을 꿈꿨는데
그 대상이 바로 가장 가까이 있던 한반도입니다

이런 야망은 특히 메이지 유신 때 더욱 커지게 되었는데
조선을 점령한 뒤 중국까지 진출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860년대부터 불붙기 시작한 일본의 이런 사상을
정한론이라고 합니다



당시 힘 있는 나라는 주변에 힘없는 나라를 침략해
영토를 넓히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식민지로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힘 있는 나라라고 해도
주변을 모두 신경 쓸 수 없고
다른 나라가 침략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를 가져갈 테니 너희는 저기를 가져가라며
각종 조약이나 협정을 맺곤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죠


조선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은 청나라입니다
일본은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1894년 청나라와 전쟁을 했으며 그 전쟁에서 승리해
영향력을 줄이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1895년에 맺게 됩니다

청나라가 물러간 이후엔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하죠


그리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했으며 그 전쟁에서 승리해
자신들이 조선,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포츠머스 조약을 1905년에 맺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며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을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죠

이제 일본에게 남은 것은 대한제국의 승낙뿐이었습니다


1905년,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지금과 같은 푸른 뱀의 해, 을사년일 때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기 위해 대한제국에 왔습니다

그의 목적은 대한제국과 조약을 맺기 위함이었는데
그 조약의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져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고종은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조약을 맺기 위해 계속 문을 두드렸고
고종은 이것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으로 들어와 대신들을 불러
조약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때 고종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참석한 사람은 지금의 부총리인 참정대신 한규설
지금의 재무부장관인 탁지부대신 민영기
지금의 법무부장관인 법부대신 이하영

지금의 교육부장관인 학부대신 이완용
지금의 국방부장관인 군부대신 이근택
지금의 행정안전부장관인 내부대신 이지용
지금의 외교부장관인 외부대신 박제순
지금의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었습니다

회의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규설은 조약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회의 도중 배치되어 있던 군인에게 끌려가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영기, 이하영 역시 조약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강압을 이기지고 못하고 조약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다수가 찬성했으니
조약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을 빼앗아 강제로 찍어버렸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순간이었죠
이것으로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의 외교 기관이 모두 폐지되었으며
대한제국에 있던 다른 나라의 공사관이 모두 철수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나라와 교류를 못하게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에 나가는 것도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도 힘들어지며
부당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알릴 수 없으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그림자에 갇혀 지내야 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이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시점은 1910년부터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주권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1905년 을사년에 일본이 강제로 맺은 이 조약을
을사조약이라고 하는데
억지로, 강제로 맺었기 때문에 조약이라고 하지 않고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을사늑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을사년에 있었던 다섯 명의 역적이라고 해서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추가로 을사늑약을 반대했던 민영기, 이하영은
을사늑약 이후 친일파가 되어 아주 열심히 활동했다고 합니다


을사늑약은 맺어진 순간 효력이 발생하지도 않는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닌 불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우리는 1905년에 맺은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당시에 이 조약은 제목이 없었습니다

을사년에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이죠


제목이 없다는 것은 내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완성되지도 않은 굉장히 허술한 조약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을사늑약은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일방적인 통보인 것이었죠

을사늑약에는 외부대신의 도장이 찍혀있는데
이것은 일본이 강제로 빼앗아 찍은 것인데다

최종 결정권자인 고종의 도장이 찍혀있지 않습니다

즉 을사늑약은 처음부터 무효인 조약이라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60년이 지난 뒤 1965년 다시 을사년일 때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시 한번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을 한일기본조약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1905년에 맺은 을사늑약이 무효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이후 굉장히 많은 관료들이 반발했습니다
을사오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반대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것을 을사의병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인 것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힘의 논리에 의해 실패했습니다

이것을 헤이그 특사라고 합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했습니다


을사늑약은 외교권만 가져가는 것인데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통감부까지 설치한 이유는
대한제국에 남아있는 마지막 권력까지 뺏어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1910년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일본이 모든 권력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본격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됐습니다



분위기가 먼가 으스스하고 우중충해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때
을씨년스럽다 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여기서 을씨년은 을사늑약이 맺어진 1905년 을사년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분위기가 그때의 분위기와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025년 을사년은 부디 을씨년스럽지 않고
평화롭고 행복한 날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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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약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약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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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영웅적이었던 마약


헤로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떤 병에 걸려 몸이 너무 아파 통증을 견디기 힘들 때
수술을 하고 난 뒤 발생하는 통증을 줄일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진통제입니다

지금은 비교적 안전한 진통제가 많이 만들어져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https://youtu.be/VWhq58hBQJQ

 



1804년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담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는 물질을 분리해냈습니다

그는 이 물질을 사용하면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서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morpheus)에서 이름을 따
모르핀(morphin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처럼 모르핀은 굉장히 좋은 효과를 보여줬습니다
특히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진통제로 모르핀을 자주 사용하기도 했죠

하지만 문제는 모르핀의 부작용이었습니다
모르핀을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후에 모르핀에 중독돼 더 많은 모르핀을 찾게 되고

불면증이나 호흡곤란, 동공수축, 어지러움, 구토 같은 것들이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화학자 찰스 롬리 올더 라이트는
모르핀이 가지고 있는 중독성과 각종 부작용을 없애고
진통 효과만 남길 수는 없을까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1874년 중독성은 없지만 뛰어난 진통 효과가 있는 물질을
모르핀을 통해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독일의 제약회사인 바이엘이
1897년 이 물질을 재합성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바이엘은 이 물질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직원을 상대로 임상시험을 하기도 했는데

직원 중 일부는 이 물질을 먹으면 마치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아픔도 잊고 힘이 세지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물질의 이름을 영웅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heroisch에서 따와 헤로인(heroin)이라고 지었습니다



헤로인의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진통제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염증을 줄이거나 우울증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위암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운동장애나 감각 문제를 발생시키는 다발성 경화증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색정증에도 효과를 보였습니다


특히 기침에 효과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어린이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기침약이라는 식으로 광고하기도 했습니다

헤로인은 이름처럼 약 중의 약
모든 약의 영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죠

헤로인에 대한 인기도 엄청났습니다
헤로인은 의사의 처방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약이라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1899년에는 215kg이 만들어졌는데
1907년에는 920kg으로 늘어났습니다

헤로인은 중독성이 없는
모르핀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약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헤로인에 대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심장박동이 느려져 호흡에 문제가 생기거나
가렵고 구토가 나오기도 하며
간, 콩팥, 폐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생각이 멍해지거나 불안함과 불면증이 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독성이 없는 모르핀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중독성이 있었는데
그 중독성이 모르핀보다 10배나 더 심하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헤로인은 여러 나라에서 금지되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거의 모든 나라가 헤로인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1926년에는 생산량이 63kg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약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헤로인은
사실은 히어로가 아니라 끝판왕급 빌런이었던 것입니다

헤로인은 현재 마약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중독성이 가장 강한 물질
그래서 가장 위험한 물질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로인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원인 1위였으며
지금은 펜타닐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 것으로 기대했던
그래서 히어로라는 이름에서 따온 헤로인은
이제 사람을 죽이는 약물로 몰락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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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왜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이런말을 했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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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금토패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이순신은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 엄청난 활약을 하며
조선을 지켜낸 최고의 명장이자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실제로 2024년에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는 이순신이었습니다

2019년, 2014년에 한 조사에서도
1위는 이순신이었습니다

 

https://youtu.be/1yAAUA0UeIA

 


이순신은 굉장히 많은 어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리고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라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 어록도 있습니다



1593년 임진왜란이 한참 진행 중일 때
2월 27일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서
조선, 명 연합과 일본간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벽제관 전투라고 하죠

벽제관 전투에서 조선, 명 연합은 일본에 패했고
이 전투를 계기로 명나라는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일본과 협상을 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일본과 협상을 진행했던 사람은 명나라의 담종인입니다

담종인은 협상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고니시가 있었던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중 1594년 일본 수군이
경남 고성 당항포에 쳐들어와 약탈과 살인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함선을 출격시켜 이들을 모두 쓸어버렸는데
이것을 제2차 당항포 해전(1594.04.23)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은 당항포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명나라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협상을 하고 있는 중에 전투를 하면
협상이 긍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담종인은 이순신에게
일본은 이제 돌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일본군 근처에 머무르지 말고 일본군과 쓸데없는 전투를 하지 말아라
라는 식의 일종의 통지서를 보냅니다

이것을 금토패문이라고 하죠


금토패문을 받아본 이순신은 화가 잔뜩 날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당항포 해전이 시작된 이유는 일본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쪽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인데다
전투를 승리했음에도 이런 패문을 보냈기 때문이죠

이 패문을 보고 이순신은 담종인에게 답장을 보내는데
여기에는 일본이 먼저 쳐들어왔다
조선이 우리의 집인데 어디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냐
일본은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지인 변사만단, 자고미문수신지의야

다시 말해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패문을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이라고 합니다



즉 인터넷에 이순신의 어록이라고 떠도는 이 말은
실제로 이순신이 한 말인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은 금토패문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몰랐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2016년 조선의 문신 정탁이라는 사람이 쓴 임진기록에
금토패문의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이 이렇게 화를 낸 뒤에도
명나라와 협상을 하고 있는 중에도
일본은 이순신의 말대로 여려 차례 조선을 공격했으며


협상은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전쟁을 이어가다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게 되면서
1598년 12월 16일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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