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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한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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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말고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

불은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위험한 것입니다

인류가 불을 처음 발견한 뒤로
화재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소방서가 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도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소방서가 없었던 시절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불의 역사가 아주 오래된 만큼
소방서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됐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6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는
한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426년 2월 15일 조선의 왕이 세종일 때
수도인 한성부(한양)에서 큰 화재가 발생합니다

이때 조선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단 하루 만에 집 2200채가 불타버렸고
재가 돼버려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명피해만 32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성부의 총 가옥 수는 약 2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화재로 2200채가 타버렸으니
10% 이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이 화재를 한성 대화재 혹은 한양 대화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명령을 내려야 했던 세종은 한성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 훈련 행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강무라고 하는데

1426년 2월 13일 세종은 강무를 위해
첫째 아들인 문종과 함께 강원도로 떠났습니다


사실 아내인 소헌왕후 역시 강원도로 같이 떠날 예정이었지만
금성대군을 임신하고 있었던 때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니
소헌왕후는 그야말로 만삭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한성부에 남겨진 소헌왕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화재 진압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는데

돈과 식량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종묘와 창덕궁이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불은 당일에 꺼지는 듯 보였으나
다음날 다시 번지면서 추가로 집 200채를 더 태운 뒤
사그라들었습니다

1426년 2월 16일 세종은 한성부에 화재가 난 것을 보고받았고
2월 19일 한성부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종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성부를 보고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2월 15일 화재가 발생하기 전
다른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흉년 피해 때문에 굳이 떠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한성부에서 가까운 경기도 지역으로 가려고 고민을 하기도 했고
강원도로 가는 중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돌아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한성부에 자신이 도착했을 때
신하들이 굳이 예의를 갖추지 말라고 전했으며
문밖에 나와 마중을 하지 말고 궁에서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하기 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줄 것을 명령했고
도착하자마자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화재가 또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을 적당히 철거해 간격을 띄웠으며
우물을 파 물을 저장하도록 했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을 붙잡아 고발하면 보상을 줬으며
만약 그 사람이 천민이라면 양민으로 옮겨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도
방화에 의한 화재가 끊이지 않았고
방화와 함께 도둑질도 많이 늘어나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1426년 2월 26일 세종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데
불을 금한다는 뜻으로 이곳을 금화 도감이라고 불렀습니다(禁火都監)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 그리고 조선 최초의 소방서입니다

금화 도감에서 일하는 소방수 중 소화 작업을 하는 사람을
금화군(禁火軍)이라고 불렀고
물을 긷고 나르는 사람을 급수비(汲水婢)라고 불렀습니다

금화 도감에 소속된 사람들은
지금의 소방수와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화재에 약한 초가집 지붕을 기와로 바꾸는 작업도 같이 했습니다

세종이 금화 도감을 설치한 이후
화재에 대한 대응이 확실히 빨라졌으며
효과적인 진압도 가능해졌습니다


금화 도감이 만들어지기 전 1422년에는
성을 수리하는 성문 도감(城門都監)을 만들기도 했는데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의 역할이 많이 겹쳤기 때문에

1426년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을 하나로 합쳤고
이것을 수성 금화 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화재 예방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성 안에 드므라는 것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안쪽에 들어가면 드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물을 담아놨습니다

과거에는 화재를 일으키는 귀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귀신은 아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죠


귀신이 화재를 일으키기 위해 궁에 들어왔다가
물이 담겨 있는 드므를 보게 되면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일 것이고

드므에 무서운 귀신이 있다고 착각해
화재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므를 설치해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후 1467년 조선의 왕이 세조일 때
금화군은 불을 멸하라 라는 의미로
멸화군(滅火軍)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50명으로 구성된 멸화군은
불을 끄는 것보다 불이 번지지 않게 하는데 더 중점을 뒀습니다


이들은 도끼와 쇠갈고리를 들고 다니며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트려 불길이 번지지 않게 했고

불이 많이 크지 않다면 물에 적신 천을 이용해
불을 껐습니다

멸화군의 활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멸화군 창설 이후 조선의 화재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1637년 조선의 왕이 인조일 때
쓸데없는 곳이라 하여 폐지되면서

세종이 만들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인 금화 도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근대화된 소방 장비가 들어오게 되면서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소방서인
경성소방서가(종로소방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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