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우표 구매

 

오늘인 2019년 4월 11일은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임시정부 이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임시정부 이후에 진짜 대한민국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100살이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특별한 행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일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우표를 우체국에서 발행했는데

오늘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우표를 우체국에서 발행했습니다

 

 

3.1운동 기념 우표는 구매하지 못했는데 임시정부 우표는 구매할 수 있었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9시에 집 근처 우체국에 갔는데

이쪽에서는 우표를 팔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작은 우체국에는 없고 큰 우체국에 가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온김에 가보자 해서 자전거타고 다녀왔습니다

10분정도 걸리는데 일어나자마자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꽤 힘들더군요

 

그래도 아침부터 우체국까지 가서 구매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330원짜리 우표가 총 16장 있습니다

 

 

330원짜리 16장 있으니 우표의 가격은 5280원입니다

세트로 산다고 해서 할인은 없군요

 

우표를 사용하려고 샀다기보다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해 샀는데

우체국에 가니 마침 한장만 남았다고 하더군요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낱개로는 팔지 않고 이렇게 세트로 팔고 있습니다

 

이 우표를 보니 3.1운동 우표를 사지 못한것이 더 아쉬워지네요

훼손되지 않게 잘 보관해야겠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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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2019년은 대한민국에게 꽤나 의미있는 해인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19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지 100주년이 된 해입니다

 

이번 영상을 제작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고작 1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렇게나 발전했구나

100년전에는 정말 힘들게 살았는데

그들이 있기에 100년 후 지금의 나는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구나

 

그리고 100년이 지나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등등

 

역사라는 것은 분명 학교다닐 땐 하품만 나오고 머리아픈 과목이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이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대한제국이 그 이전에는 조선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있을지도 모릅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역사적인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11일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은 3.1 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지난번에는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 29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역사가 끝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건을 말합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를 무단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해 시대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일본의 헌병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본 헌병은 치안 유지를 위해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결처분이란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 있으면

조사를 하지 않고 그 즉시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이 그냥 길을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너 범인인 것 같은데? 하면서 그냥 감옥에 가두는게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치활동이나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상황을 일본 헌병이 보게되면 그 즉시 제재를 가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선 해외로 나갈 필요가 있었고

만주(중국)와 연해주(러시아)쪽으로 많이 진출했습니다

 

만주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곤 했습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곳입니다

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상당히 많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봉오동 전투(홍범도)와 청산리 전투(김좌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중 한명인 이회영은

조선 최고의 부자 출신이었는데

재산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회영은 경술국치 이후에 집안의 재산을 급하게 처분했는데

이회영의 재산을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600억정도 된다고 합니다

명동일대가 전부 이회영 집안의 소유였다고 하네요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빠르게 처분했다는 점

그리고 처분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재산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의 재산은 600억 그 이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회영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오더라도 일본에게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쨌든 돈이 많다는 것은 큰 무기가 되니까요

 

하지만 이회영은 이것을 거절했고

안창하고 있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들어가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그 업적에 비해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현한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말할 때 절때 빠져서는 안되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세계에선 커다란 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은

러시아와 독일이 참전하면서 점점 커졌고

세계 여러나라가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뤘습니다

 

이것을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합니다

 

영국은 연합국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는데

과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연합국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연합국 소속이었든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란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가 결정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는 그들이 원한다면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실제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그냥 보기에 굉장히 좋은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 나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패전국인 동맹국 소속 나라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죠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가지를 처리하기 위해

동맹국과 연합국은 파리에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파리 강화 회의라고 합니다

 

파리 강화 회의역시 민족자결주의처럼 패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회의로

특히 독일을 많이 압박했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샤유 조약이 맺어지는데

조약의 내용이 독일에게 너무 가혹했던 탓인지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군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습니다

 

독립 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 소속인 김규식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돼 조선의 독립을 교구 했습니다

 

1919년 2월 1일에는 만주에서 무오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도 했고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서가 발표 됐습니다

 

이 시기에 국내에선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의 사망 원인이 일본의 독살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과거 고종이 업적이 어떻든 한 나라의 왕이고 황제였기 때문에

단순한 소문일지라도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상황이 강제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어서 반일감정은 더욱 커질수밖에 없었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 곳곳에서 독립활동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시작됐으며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3.1 독립 선언서가 발표됩니다

 

3.1 독립 선언서는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919년이 기미년이기 때문에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하필 3월 1일에 만세 운동을 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을까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원래 3월 3일에 독립 선언서 발표와 만세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장례식과 겹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하려고 했지만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들이 꽤 많았습니다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으로 기독교 사람들은 교회에 가야했죠

 

그래서 하루 더 앞당겨 3월 1일에 만세 운동과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한 것이죠

 

원래 3.1 운동은 탑골공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자칫 폭력적인 시위가 될까바 걱정했던 민족대표는

장소를 일방적으로 태화관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겐 어떠한 통보도 하지 않은채 말이죠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뒤

자수를 하고 자진 체포됩니다

 

3.1 운동을 이렇게 싱겁게 끝내버리려고 했다는 점과

이후에 친일파로 변질된 사람이 있다는 점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명칭과 업적이 비판 받기도 합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족대표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자발적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했습니다

 

3.1 운동은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3월 1일 단 하루만 한 것이 아니라 수개월동안 지속됐습니다

 

아무래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보니

만세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특히 제암리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최악의 만행중 한가지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뒤 무차별 사격과 함께 교회를 불태워버린 사건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석호필이라고도 불리는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에 의해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34번째 민족대표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죠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을 향한 국제 여론은 안좋아졌습니다

 

원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사건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사건을 주도한 아리타 중위를 재판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징계는 고작 30일 근신처분이었고

살인, 방화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독립 선언서 발표와 3.1 운동으로

세계 여러나라들에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혹은 독립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고종 황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을 이끌어줄 조직적인 단체(정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상하이)에 모였고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라고 말하며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러시아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힘이 분산되어있으면 좋지 않다는 의견과

상해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미국, 프랑스같은 세계 강대국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게 됩니다

 

상해는 조계지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죠

 

1919년 9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민국이 된 것입니다

 

미록 이것은 임시정부였지만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수립된 민주정부였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을 분리하는 삼권분립까지 하면서

민주주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해서

일제강점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말이죠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이 조금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언론사가 창간되기도 했고 조선을 지배하는 정책들이 완화되기도 했죠

 

그래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를 문화통치기간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진짜 대한민국의 역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던 때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던 때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를 말할 때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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