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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공동 개최했던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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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싫어하면서 왜 공동 개최함?

2002년 그날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를 함께하지 못했어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겠죠

200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제17회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기록했으며
역사상 최초로 4강에 들기도 했고
비유럽, 비남미권 선수가 최초로 브론즈볼을 받기도 하는 등
많은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습니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FIFA 월드컵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개최국은 항상 유럽이나 아메리카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번도 공동 개최가 된 적은 없었죠

그런데 왜 하필 2002년에는
역사적으로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동시 개최했던 것일까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FIFA의 회장이었던 아벨란제는
21세기의 첫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하고 싶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전까지 월드컵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아벨란제는 브라질 출신이었는데
일본과 브라질은 역사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1908년부터 브라질로 이민자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가져온 일본의 문화는 브라질에 널리 퍼지게 되었죠

그런 덕분에 브라질 내에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은 월드컵을 개최하기에
적합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1980년대에 물론 거품이긴 했지만
급격한 경제 성장을 했던 일본은 조금 달랐습니다

게다가 아벨란제 회장 역시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별다른 의견이 없다면 2002년 월드컵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쪽으로 결정될 것 같았습니다



이에 일본은 1989년에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으며
1990년 월드컵 유치위원회를 만들어내면서

2002년 월드컵 개최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일본 말고도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국가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대한민국이었죠

우리나라 역시 1990년 월드컵을 한국에서 개최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FIFA에 밝혔고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성공적인 월드컵 유치를 공약

1994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결성

그리고 아시아 축구 연맹이 일본보다는 한국에 힘을 실어주면서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은 한국이냐 일본이냐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아벨란제는 일본을 지지하였는데
다음 FIFA 회장을 노리고 있던
그 당시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장이었던 렌나르트 요한손은
한국을 지지하였지만

브라질의 축구 영웅인 펠레가 일본을 지지하면서
개최국이 일본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습니다


남미의 지도를 보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우루과이가 끼어있습니다

과거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녹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중 우루과이는 독립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에 의해 브라질에 강제 합병을 당했습니다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포르투갈에 지배를 받았던 브라질과 다르게
우루과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우루과이가 독립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도와주게 되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앙숙관계가 됩니다

 


브라질과 펠레가 일본을 지지하는 것을 본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인 마라도나는
이것을 반대하기 위해 한국을 지지하게 되고
아르헨티나에게 도움을 받았던 우루과이 역시 한국을 지지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미에서는 작은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토 분쟁이 있어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일본을 지지하게 되었고
칠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페루와 볼리비아는 한국을 지지하게 됩니다

과거 전쟁을 통해 볼리비아와 사이가 틀어진 파라과이는 일본을 지지했죠

월드컵이 아시아 어느 국가에서 열리느냐를 따지고 있는데
갑자기 남미에서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일본 개최를 지지했던 FIFA 회장인 아벨란제는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냅니다

 


하지만 1993년 10월에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은 북한을 3대0으로 잡고 2위에 올라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일본은 이라크와 2대2로 비겨 3위에 올라 본선 진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것으로 한국은 네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
게다가 3연속 본선 진출을 이뤄냈지만
1994년 기준 일본은 역사상 단 한 번도
본선을 진출하지 못한 나라가 됐습니다



다른 국가 입장에선 축구에 더 힘을 쏟는 나라는
일본보다 한국이었으며
이로 인해 월드컵 개최지로 적합한 나라 역시
일본보다는 한국이 조금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죠

게다가 1994년에 열린 FIFA 부회장 선거에서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었던 정몽준이 당선되며

본선 진출도 못하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있느냐는
정몽준 부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1995년 아시아 축구 연맹의 사무총장인 피터 벨라판이 한국에 와서
지나친 경쟁으로 서로 상처를 입게 될까 걱정스럽다며
공동 개최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합니다

1996년 3월에는
1996년 하계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했는데
한국이 2대 1로 일본을 이기면서

분위기 자체는 한국 쪽으로 기우는 듯 보이지만
어쨌든 회장이 일본을 지지하고 있으니
최종 투표까지 가게 된다면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국은 공동 개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일본 역시 난장판이 되어 혹시나 개최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니
공동 개최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1996년 5월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이것으로 월드컵에 대한 다툼은 끝날 것으로 보였지만
명칭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명칭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아무래도 앞에 있는 국가가 조금 더 영향력이 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떤 국가의 이름이 앞에 올지 정하는 것도 자존심 싸움이었습니다


FIFA 월드컵은 어쨌든 영어로 쓰기 때문에
K보다 J가 먼저 오니 일한 월드컵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FIFA라는 것 자체가 프랑스어로 국제 축구 연맹을 줄인 말이기 때문에
정몽준 부회장은 한국을 프랑스어로 하면 C로 시작하니(Coree)
한국이 먼저 오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해
2002년 월드컵은 일한이 아니라 한일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명칭을 한일 월드컵으로 하는 대신에
지역 예선 조 추첨식, 결승전과 폐막식을
일본에서 치를 수 있는 권한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개막식과 개막전, 본선 조 추첨식은
한국이 가져가게 되었죠

하지만 일본은 월드컵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일한 월드컵이라고 표기하곤 했는데

대한 축구 협회는 이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는 한국과 일본
아시아의 두 나라가 경쟁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정치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일 월드컵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
그리고 최후의 공동 개최가 될 수 있었지만
2026년 월드컵이 캐나다, 멕시코, 미국 공동 개최로 되는 바람에
최초의 타이틀만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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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 원을 벌었던 짚신 장수 이야기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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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을 번 사람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길 꿈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각자의 재능을 살려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중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큰 가치가 없어보이는 지푸라기를 이용해서
수십억원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발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신발을 신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신발 종류가 생겨났고
신발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브랜드도 많이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짚신이 가장 대표적인 신발이었습니다

 


짚신은 주로 벼의 줄기인 볏짚을 이용해 만드는데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볏짚은 주변에서 보기 아주 흔한 것이었고
만들기도 쉬워서 가격도 저렴한 신발이었습니다

물론 신분마다 짚신의 모양의 차이가 나긴 했지만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짚신을 신던 때였죠


하지만 당시에는 내구력을 올릴 수 있는 기술도 없었고
아무래도 지푸라기를 이용해 신발을 만들다 보니

쉽게 망가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짚신을 여러 켤레 준비해야 했습니다



과거 짚신은 신발의 용도 그 이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망가진 짚신에 손잡이를 달아
파리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발에 밟히고 땅에 끌렸기 때문에 저항력이 생겼다고 믿어
병마를 쫓아내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대문에 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쉬웠기 때문에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사람도
자본이 없어 장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기술이 없어 전문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쉽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짚신을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넘쳐났기 때문에
짚신을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도

꽤 쏠쏠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행위를 짚신을 삼다라고 하는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보면
토정 이지함이 구걸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짚신을 삼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하루에 열 켤레만 만들어 팔아도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몇 달 만에 삶이 넉넉해졌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짚신 장사를 하는 사람 중 송세흥이라는 사람은
세 살쯤 버려진 뒤 송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키워졌는데
낮에는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후추를 눈에 발라 잠을 쫓으면서까지
짚신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어버렸고
절에서도 짚신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0년쯤 지나 결혼할 나이가 되자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은 수천 냥 정도로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천 냥이 70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그의 재산은 수억 원 정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혼 이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고
다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또다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난 뒤
이번에는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됐을 때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는 밭을 사 부처님에게 드린 뒤 나왔다고 합니다



송세흥은 이제 마을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었고
아들과 함께 짚신을 삼았을 테니
그의 재산은 수십억 원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에서 나온 뒤로도 짚신을 계속 삼았으며
별다른 질병 없이 98세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짚신을 팔아 부자가 된 송세흥의 삶은
1801년부터 유배생활을 하며
일상을 기록했던 심노숭의 책인 남천일록에 쓰여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는
물이 맑아 청강이라 불리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이곳에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는데
매년 홍수가 나 떠내려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다리로 바꾸려고 했지만
마을을 위해 선뜻 돈을 내는 사람이 없어
몇 년째 같은 문제가 발생했죠

그런데 짚신을 팔아 재산을 모은 송세흥이 돈을 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실제로 비석 뒷면에는 대시주(크게 베풂) 송세흥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짚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조금 비싸긴 하지만
내구성이 좋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짚신 장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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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살았지만 죽어있는 좀비 개미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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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데 살아있는 좀비 개미

만약 우리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죽게 되겠죠

심장이 뛰지 않는데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좀비가 아니라면 말이죠

좀비는 심장이 뛰지 않아도
즉 죽어 있어도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좀비는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지만
개미중에서는 죽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개미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개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곤충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개미의 합은
약 1경 마리정도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들의 무게를 모두 합치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무게를 합한 것과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고 합니다

 


개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들의 무리는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의사소통을 통해 각자 해야할 일을
분업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호주에 살고 있는 불독 개미와 같은 일부의 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개미는 시력이 좋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서 나오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데

머리에 붙어 있는 더듬이를 이용해 냄새를 맡습니다

개미의 시력은 좋지 못하지만
그에 비해 후각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개미는 동료가 죽게 되면
사체를 무덤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혹시 병에 걸려 죽었을 경우 전염될 수도 있으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다른 포식자가 와서 무리를 위협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개미가 살아있을 때는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이 나오지만
죽게 되면 올레산이라는 화학 물질이 분비됩니다

올레산은 식물성 기름 뿐만 아니라
동물성 기름에도 많이 들어있는 물질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올리브유에 많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물에 잘 녹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비누나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물질입니다



개미는 더듬이를 이용해 올레산을 감지하고
동료의 몸에서 올레산 냄새가 나면
죽은 것이라 판단해 사체를 무덤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만약 살아있는 개미에게 올레산 냄새가 난다면 어떨까요


그 개미는 분명 살아서 움직일 수 있지만
다른 개미가 느끼기엔 죽은 것이기 때문에
위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다른 개미에 의해 무덤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즉 살았지만 죽어있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좀비 개미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좀비 개미는 끌려가는 과정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발버둥 쳐보지만

인간과 좀비가 같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죽은 것으로 판단되는 좀비 개미는
격리될 수 밖에 없고
끝내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부의 개미는 자신의 몸에서 올레산 냄새가 나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판단해
스스로 무덤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몸에 묻은 올레산을 지워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단지 올레산 냄새가 난다는 것만으로
살아 움직이는 동료 개미를 죽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조금 가혹하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심장이 멈춰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봤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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