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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공연장에서 떼창을 열정적으로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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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왜 떼창을 할까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곤 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연장에서
가수의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르는
이른바 떼창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이 문화가 많이 퍼지며
외국에서도 떼창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떼창 하면 한국
한국 하면 떼창이라는 인식이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은 왜 그리고 언제부터
공연장에서 떼창을 했던 것일까요



떼창은 공연장에서 가수가 아닌 관객이
가수의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 단어가 생겨나기 이전에
다 함께 부른다라는 뜻인 제창이 있긴 했습니다

애국가 제창이나 교가 제창, 군가 제창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죠

 


물론 떼창이라는 것을 누가, 언제, 어떤 공연에서
처음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외국에서도 락 공연을 할 때
관객들이 떼창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떼창 하면 한국이 떠오르는 이유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떼창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거 농사가 중요시되던 농경사회에선
한해 농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을 중심으로
두레나 계 같은 상호부조 풍습이 만들어지게 됐죠

또 한 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1년을 무사히 지낸 것을 기원하기 위한 의식을
다 같이 모여 치르곤 했는데

 


과거 부여에서는 12월에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고
사람들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영고라는 것이 있기도 했고(迎鼓)

10월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던
고구려의 동맹이나(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같은 것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즉 예로부터 우리는 노래와 춤을 즐길 때
다 같이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을끼리 협동심을 키우고
다른 마을과 경쟁심을 키우기 위한
여러 가지 놀이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마당놀이라고 하는데
넓은 마당이나 시장같은 곳에서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채 벌이는 민속놀이를 말하는 것이며
탈춤, 농악, 판소리 같은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주체자가 중심이 되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
즉 관객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양반들의 사회 부조리를 풍자하는 성격이 강했던 탈춤은
관객이 추임새를 넣거나
탈꾼이 공연 도중 관객에게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여러 가지 설을 푸는 판소리는
얼씨구, 좋다라는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공연에 직접 참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판소리는 노래를 하는 사람인 소리꾼과
북을 치는 사람인 고수도 중요하지만
소리를 듣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청중도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공연이라는 것은
그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며 즐기는 문화였던 것이죠

관객과 무대가 철저하게 분리된
서양의 공연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부르는 노래가 지금의 대중가요가 아니라
아리랑 같은 전통 민요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요는 앞 소절은 혼자 부르고
후렴은 다 같이 부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메기고 받는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민족에게 있어 노래라는 것은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르는 것이었죠

떼창은 이런 DNA를 물려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연장에 간다는 것은
물론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가수와 함께 놀려는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

놀러 왔으니 노래도 같이 부르게 되었고
가수도 관객도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보다 더 열정적인 떼창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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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공동 개최했던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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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싫어하면서 왜 공동 개최함?

2002년 그날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를 함께하지 못했어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겠죠

200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제17회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기록했으며
역사상 최초로 4강에 들기도 했고
비유럽, 비남미권 선수가 최초로 브론즈볼을 받기도 하는 등
많은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습니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FIFA 월드컵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개최국은 항상 유럽이나 아메리카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번도 공동 개최가 된 적은 없었죠

그런데 왜 하필 2002년에는
역사적으로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동시 개최했던 것일까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FIFA의 회장이었던 아벨란제는
21세기의 첫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하고 싶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전까지 월드컵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꽤나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아벨란제는 브라질 출신이었는데
일본과 브라질은 역사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1908년부터 브라질로 이민자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가져온 일본의 문화는 브라질에 널리 퍼지게 되었죠

그런 덕분에 브라질 내에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은 월드컵을 개최하기에
적합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1980년대에 물론 거품이긴 했지만
급격한 경제 성장을 했던 일본은 조금 달랐습니다

게다가 아벨란제 회장 역시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별다른 의견이 없다면 2002년 월드컵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쪽으로 결정될 것 같았습니다



이에 일본은 1989년에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으며
1990년 월드컵 유치위원회를 만들어내면서

2002년 월드컵 개최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일본 말고도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국가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대한민국이었죠

우리나라 역시 1990년 월드컵을 한국에서 개최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FIFA에 밝혔고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성공적인 월드컵 유치를 공약

1994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결성

그리고 아시아 축구 연맹이 일본보다는 한국에 힘을 실어주면서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은 한국이냐 일본이냐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아벨란제는 일본을 지지하였는데
다음 FIFA 회장을 노리고 있던
그 당시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장이었던 렌나르트 요한손은
한국을 지지하였지만

브라질의 축구 영웅인 펠레가 일본을 지지하면서
개최국이 일본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습니다


남미의 지도를 보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우루과이가 끼어있습니다

과거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녹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중 우루과이는 독립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에 의해 브라질에 강제 합병을 당했습니다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포르투갈에 지배를 받았던 브라질과 다르게
우루과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우루과이가 독립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도와주게 되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앙숙관계가 됩니다

 


브라질과 펠레가 일본을 지지하는 것을 본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인 마라도나는
이것을 반대하기 위해 한국을 지지하게 되고
아르헨티나에게 도움을 받았던 우루과이 역시 한국을 지지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미에서는 작은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토 분쟁이 있어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일본을 지지하게 되었고
칠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페루와 볼리비아는 한국을 지지하게 됩니다

과거 전쟁을 통해 볼리비아와 사이가 틀어진 파라과이는 일본을 지지했죠

월드컵이 아시아 어느 국가에서 열리느냐를 따지고 있는데
갑자기 남미에서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일본 개최를 지지했던 FIFA 회장인 아벨란제는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냅니다

 


하지만 1993년 10월에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은 북한을 3대0으로 잡고 2위에 올라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일본은 이라크와 2대2로 비겨 3위에 올라 본선 진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것으로 한국은 네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
게다가 3연속 본선 진출을 이뤄냈지만
1994년 기준 일본은 역사상 단 한 번도
본선을 진출하지 못한 나라가 됐습니다



다른 국가 입장에선 축구에 더 힘을 쏟는 나라는
일본보다 한국이었으며
이로 인해 월드컵 개최지로 적합한 나라 역시
일본보다는 한국이 조금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죠

게다가 1994년에 열린 FIFA 부회장 선거에서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었던 정몽준이 당선되며

본선 진출도 못하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있느냐는
정몽준 부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1995년 아시아 축구 연맹의 사무총장인 피터 벨라판이 한국에 와서
지나친 경쟁으로 서로 상처를 입게 될까 걱정스럽다며
공동 개최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합니다

1996년 3월에는
1996년 하계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했는데
한국이 2대 1로 일본을 이기면서

분위기 자체는 한국 쪽으로 기우는 듯 보이지만
어쨌든 회장이 일본을 지지하고 있으니
최종 투표까지 가게 된다면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국은 공동 개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일본 역시 난장판이 되어 혹시나 개최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니
공동 개최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1996년 5월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이것으로 월드컵에 대한 다툼은 끝날 것으로 보였지만
명칭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명칭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아무래도 앞에 있는 국가가 조금 더 영향력이 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떤 국가의 이름이 앞에 올지 정하는 것도 자존심 싸움이었습니다


FIFA 월드컵은 어쨌든 영어로 쓰기 때문에
K보다 J가 먼저 오니 일한 월드컵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FIFA라는 것 자체가 프랑스어로 국제 축구 연맹을 줄인 말이기 때문에
정몽준 부회장은 한국을 프랑스어로 하면 C로 시작하니(Coree)
한국이 먼저 오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해
2002년 월드컵은 일한이 아니라 한일 월드컵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명칭을 한일 월드컵으로 하는 대신에
지역 예선 조 추첨식, 결승전과 폐막식을
일본에서 치를 수 있는 권한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개막식과 개막전, 본선 조 추첨식은
한국이 가져가게 되었죠

하지만 일본은 월드컵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일한 월드컵이라고 표기하곤 했는데

대한 축구 협회는 이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는 한국과 일본
아시아의 두 나라가 경쟁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정치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일 월드컵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
그리고 최후의 공동 개최가 될 수 있었지만
2026년 월드컵이 캐나다, 멕시코, 미국 공동 개최로 되는 바람에
최초의 타이틀만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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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 원을 벌었던 짚신 장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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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을 번 사람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길 꿈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각자의 재능을 살려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중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큰 가치가 없어보이는 지푸라기를 이용해서
수십억원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발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신발을 신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신발 종류가 생겨났고
신발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브랜드도 많이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짚신이 가장 대표적인 신발이었습니다

 


짚신은 주로 벼의 줄기인 볏짚을 이용해 만드는데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볏짚은 주변에서 보기 아주 흔한 것이었고
만들기도 쉬워서 가격도 저렴한 신발이었습니다

물론 신분마다 짚신의 모양의 차이가 나긴 했지만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짚신을 신던 때였죠


하지만 당시에는 내구력을 올릴 수 있는 기술도 없었고
아무래도 지푸라기를 이용해 신발을 만들다 보니

쉽게 망가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짚신을 여러 켤레 준비해야 했습니다



과거 짚신은 신발의 용도 그 이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망가진 짚신에 손잡이를 달아
파리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발에 밟히고 땅에 끌렸기 때문에 저항력이 생겼다고 믿어
병마를 쫓아내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대문에 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쉬웠기 때문에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사람도
자본이 없어 장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기술이 없어 전문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쉽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짚신을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넘쳐났기 때문에
짚신을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도

꽤 쏠쏠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행위를 짚신을 삼다라고 하는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보면
토정 이지함이 구걸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짚신을 삼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하루에 열 켤레만 만들어 팔아도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몇 달 만에 삶이 넉넉해졌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짚신 장사를 하는 사람 중 송세흥이라는 사람은
세 살쯤 버려진 뒤 송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키워졌는데
낮에는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후추를 눈에 발라 잠을 쫓으면서까지
짚신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어버렸고
절에서도 짚신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0년쯤 지나 결혼할 나이가 되자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은 수천 냥 정도로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천 냥이 70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그의 재산은 수억 원 정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혼 이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고
다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또다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난 뒤
이번에는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됐을 때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는 밭을 사 부처님에게 드린 뒤 나왔다고 합니다



송세흥은 이제 마을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었고
아들과 함께 짚신을 삼았을 테니
그의 재산은 수십억 원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에서 나온 뒤로도 짚신을 계속 삼았으며
별다른 질병 없이 98세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짚신을 팔아 부자가 된 송세흥의 삶은
1801년부터 유배생활을 하며
일상을 기록했던 심노숭의 책인 남천일록에 쓰여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는
물이 맑아 청강이라 불리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이곳에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는데
매년 홍수가 나 떠내려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다리로 바꾸려고 했지만
마을을 위해 선뜻 돈을 내는 사람이 없어
몇 년째 같은 문제가 발생했죠

그런데 짚신을 팔아 재산을 모은 송세흥이 돈을 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실제로 비석 뒷면에는 대시주(크게 베풂) 송세흥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짚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조금 비싸긴 하지만
내구성이 좋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짚신 장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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