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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이 심할 때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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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이 심할 때 피를 먹으면 살 수 있을까?

건강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다치기 전까지 건강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치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의 중요성을 알게 되지만

건강한 상태로 며칠 지나다보면 또다시 건강에 대해 무뎌지게 되죠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언제나 괴롭습니다

어떻게 다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피부에 상처를 입는경우 피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피부는 표피, 진피, 피하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피는 얇은 바깥쪽 층이고

진피는 두꺼운 안쪽 층입니다

 

진피에는 땀샘, 혈관, 신경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표피만 살짝 다치는 경우라면 피가 나오지 않고

진피까지 깊게 다쳐야 피가 나오게 됩니다

 

평소 우리가 다치는 정도라면 그럴일은 없겠지만

정말 크게 다쳐 피가 정말 많이 나오는 상황

즉 과다출혈인 상황일 때 피를 먹게 되면

과다출혈로 죽지 않게 될까요?

 

피는 산소를 포함한 여러가지 영양분을 필요한 곳에 운반해주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운반해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피는 전체 몸무게의 8%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피의 30~40%정도를 잃어버리면

과다출혈로 인해 쇼크가 오거나 심한경우 죽을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경우 수혈을 통해 부족한 피를 보충해줘야 합니다

 

수혈이라고 하면 피 그 자체를 주는 것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적혈구가 필요하면 적혈구를 주고

혈소판이 필요하면 혈소판을 주는 성분수혈요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하는 동안 수혈을 해야하는 환자의 경우

피를 미리 뽑아 보관해둔 뒤

수술을 할 때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

자가수혈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

 

피는 우리 몸속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데

크게 동맥, 정맥, 모세혈관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심장에서 방금 나와 산소가 풍부한 피는 동맥을 타고 몸 여기저기로 전달됩니다

그리고 모세혈관으로 이동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수거해갑니다

 

이런 것들이 모인 피는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죠

 

산소를 운반하는 것은 적혈구에 있는 헤모글로빈인데

헤모글로빈에는 철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분과 산소가 만나면 붉은색으로 바이기 때문에

피는 붉은색으로 보이고

산소가 풍부한 피가 많이 있는 동맥 역시 붉은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정맥에 흐르는 피는 산소가 부족하고 이산화탄소가 많은 피가 모이기 때문에

푸른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손목이나 손등에 보이는 핏줄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피는 혈관에서 나오면 산소를 잃어버리고 빠르게 굳어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보관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심장에서 방금 나온 피의 상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헌혈을 할 때 피는 정맥에서 뽑기 때문에

수혈 역시 정맥에 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먹으면 음식물은 식도를 거쳐 위로 들어갑니다

위에서 음식물이 분해되고 단백질을 흡수해

창자로 이동합니다

 

창자에서 나머지 영양분이 흡수 되고

필요없는 찌꺼기는 방출됩니다

 

이런 소화 과정은 피를 먹을 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음식물을 먹든 피를 먹든 다른 이물질을 먹든

우리의 몸은 이것을 모두 음식물로 받아들입니다

 

피에는 단백질이나 포도당 같은 영양분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분해되고 영양분이 흡수 된 뒤

나머지 필요 없는 물질은 걸러질 것입니다

 

출혈이 심할 때 수혈을 해야하는데 수혈은 정맥에 하죠

하지만 음식을 먹으면 피는 소화될 뿐 정맥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피를 먹는 것은 수혈을 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부족한 피를 보충해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맥을 타고 흐르던 피는 노폐물이 있는 피이기 때문에

이런 피를 먹는다는 것은 노폐물도 같이 먹게 된다는 것이고

피를 많이 먹으면 노페물이 쌓여

오히려 더 안좋아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피에는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몸에 철분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입에 상처가 나거나 사랑니를 뽑아

피를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그리 많은 양을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만약 크게 다쳐 피를 많이 흘리게 된다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피를 먹는 것보다

지혈을 한 뒤 병원에 가거나

119에 신고하는 것이 피를 먹는 것보다 더 현명한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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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뇌를 10%밖에 사용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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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10%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인류가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동물에 비해 뇌가 많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족보행을 하면서 양 손이 자유롭게 되었고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다보니 뇌가 발달하게 되면서

지식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keQEhF8VdYw

 

기억, 학습, 인지, 행동, 생각, 감정, 감각, 활동

이 모든 것은 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뇌는 사용할수록 계속 발달합니다

한가지 경험만 반복하는 것보다

여러가지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뇌를 발달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억능력, 학습능력 같은 것들도 향상되죠

 

10번 듣는 것보다 1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용할수록 계속 발달한 덕분인지

과학자들이 뇌를 많이 연구했지만

아직까지 모든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경험을 하고 지식을 쌓으면 뇌는 발달하고

그럼 또 풀어야 할 비밀이 많아지고

비밀을 풀다보면 새로운 지식이 쌓이고

뇌는 또 발달하고 또 비밀을 풀어야 하고

이런식의 무한 반복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뇌의 비밀을 영원히 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뇌에 관해서 이런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10%만 사용한다

뇌를 전부 사용할 수 있다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가 뇌를 100% 사용한다면 초능력을 쓸 수 있을까요?

 

인간은 뇌를 10%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라는 말은

189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일부밖에 발현하지 못한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이 퍼지고 퍼지면서

인간은 뇌를 10%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라고 와전됐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 이 말은 거짓으로 판명났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는 뇌를 10%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성인의 뇌는 약 1.5kg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전체 에너지의 20%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뇌를 10%만 사용한다면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각자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해왔습니다

 

인간이 뇌를 10%만 사용한다면 이렇게 큰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입니다

뇌를 다친다는 것은 생명과도 연결이 되기 때문이죠

 

만약 그랬다면 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가 되었어야 합니다

 

단단한 두개골이 뇌를 보호하고 있는 이유는

뇌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뇌를 다치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고

상황판단이 잘 되지 않으며 환각을 보거나 마비가 올 수 있고

심한경우 식물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뇌 전체를 다쳤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다쳐도 진행되는 병입니다

 

만약 우리가 뇌를 10%만 사용한다면

나머지 90%를 다쳐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은 완벽하게 틀린 말이 되는 것이죠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한 덕분에

우리는 뇌 영상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fMRI라고 하는데

혈류와 관련된 변화를 감지하여 뇌 활동을 측정하는 기술입니다

 

fMRI 덕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뇌 전체가 활성화 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뇌 전체가 활성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을 할 때는 전두엽이

대화를 할 때는 측두엽이 더 활성화 되는 것처럼

부위마다 전문화된 기능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을 일부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말은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뇌를 100% 사용하고 있지만 뇌 잠재력을 100% 사용하고 있진 못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뇌를 가지고 있죠

 

뇌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니 초능력을 쓰기 위해 사실이 아닌 말을 믿으면서

나머지 90%를 사용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은잡지 영상을 보는 것이 뇌를 발전시키고

잠재력을 끌어올리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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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시작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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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언제부터 싸우기 시작했을까

현실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민국은 民(백성 민) 國(나라 국)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니까 우리 맘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그것은 안됩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주인 행세를 하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각 분야에 전문가를 투표를 통해 뽑아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도록 맡기고 있습니다

 

국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도록 말이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곤 합니다

 

특히 그저 자기의 의견이 맞다며

말싸움을 하다 결국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싸우려고 정치인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이런 싸움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XJGeqRdwp6U

 

고려는 국교를 불교로 삼았지만

고려 후기로 가면서 유교 중심

그러니까 성리학 중심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은

그당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세력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길 원했습니다

 

이때 선택받은 세력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세력을 점점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리학 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길 원했죠

 

하지만 이러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고려는 이미 망했으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 중심의 급진 개혁파와

 

고려라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조금씩 바꿔가야 한다는

정몽주 중심의 온견 개혁파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당하면서

온건 개혁파는 몰락하게 되고

 

급진 개혁파에 의해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집현전에서 연구한다고 해서

관학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官(벼슬 관) 學(배울 학) 파

 

하지만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7개 왕인 세조가 된 뒤 집현전이 폐지 돼

관학파의 세력이 약해지거나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참여했던 일부 훈구파 세력들은

계유정난 성공 이후 조선의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훈구파라고 부르고 있죠

 

勳(공 훈) 舊(오래 구) 파

 

반면 조선 개국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

몰락한 온건 개혁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나름대로 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속세를 벗어나 산속에 있다고 해 사림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士(선비 사) 林(수풀 림)

 

권력을 잡은 훈구파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챙겼습니다

특히 부정부패를 이용해 토지를 많이 소유하게 되었죠

 

사림파들은 다시 한양으로 진출하길 원했지만

훈구파가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이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계속해서 공부를 한 덕분에

 

그리고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

너무 커져버린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선택하게 되면서

사림파는 하나 둘 한양으로 진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삼사라고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많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삼사는 조선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사헌부는 벼슬아치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거나 탄핵을 시키는

지금의 검찰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사간원은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의견을 내는

지금의 감사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홍문관은 문서를 처리하고 사적(역사책)을 관리하는

폐지된 집현전의 역할을 했던 기관입니다

 

삼사는 하나의 세력을 견제하기 아주 적절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죠

 

훈구파는 이렇게 커져가는 사림파를 그대로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번의 사건을 통해 사림파를 견제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화라고 합니다

 

士(선비 사) 禍(재앙 화)

 

무오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기묘년인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을사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화를 입는 과정에서도 사림파의 세력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가

문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치주의를 펼치면서

사림파는 드디어 조선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향촌의 서원을 통해 후계자를 계속 양성했지만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훈구파는

하나 둘 시간이 지나 늙어가거나

사림파에 흡수 되었습니다

 

이제 사림파가 조선을 잘 이끌어 갔다면 좋았겠지만

사림파 내에서 또 분열이 생기며 두 세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요즘의 회사에는 채용을 담당하는 인사과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조입니다

 

이조에서 사람을 뽑는 역할을 했던 것이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이었는데

이 둘은 사람을 저울질 한다고 해서

 

銓(사람가릴 전) 한자를 사용해 이조 전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조 전랑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사람을 뽑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이조 전랑이 되는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삼사는 반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조 전랑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

여러 부서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는 통청권

과거시험에 탈락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곧바로 채용할 수 있는 낭청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을 남용한다면

자기편이라고 생각이 되거나

자신에게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할 수 있었고

자리 역시 세습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번 권력을 잡으면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조 전랑의 권력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조선의 9대 왕인 성종 이후 관행으로 하던 것이 굳어지면서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죠

 

문제가 된 것은 이조 전랑이었던 오건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지만

심의겸이 이것을 반대하면서 부터입니다

 

물론 이때는 반대가 있었어도 김효원이 이조 전랑에 자리에 오르긴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김효원이 후임을 정해야 할 때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적절하다는 추천을 받게 되지만

이것을 김효원이 반대하면서

 

하나였던 사림파는 두개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이황의 영향을 받은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이이의 영향을 받은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단순하게

경복궁을 기준으로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고

심의겸이 집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갈라졌다고 해서 붕당이라고 합니다

 

朋(벗 붕) 黨(무리 당)

 

물론 이전에도 크고 작은 의견 다툼은 있었겠지만

붕당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

이때부터가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붕당은 하나의 세력이 독재하는 것을 막고

영양가 있는 토론을 통해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 세력의 의견을 무작정 반대하는 식으로 변질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

자기가 속한 당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붕당 역시 막을 내렸고

 

이후부터 하나의 세력이 조선의 정치를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시작되면서

여당과 야당으로 나눠지는

조선시대의 붕당과 비슷한 정치 형태로 바뀌게 됐죠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발전하고 기술도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처럼 자기 자신들을 위한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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