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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는 왜 모래 마녀라고 불리는 걸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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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래 마녀라고 할까

빵과 빵 사이에 고기, 햄, 치즈
여러 가지 채소들을 넣어 만들어 먹는 음식을
우리는 샌드위치라고 합니다

샌드위치는 영어 이름인데
샌드와 위치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sand는 모래고 wich(witch)는 마녀입니다

즉 샌드위치는 모래 마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샌드위치가 마녀랑 무슨 관계길래
샌드위치는 모래 마녀라고 불리게 된 것일까요




1718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존 몬태규는
집안 대대로 해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온
뼈대 있는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1722년 그가 4살일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10살인 1729년 할아버지로부터 작위를 이르게 계승 받았고
여러 가지 공부를 한 뒤 1739년부터 상원의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몬태규 가문에 주어진 작위의 이름은 샌드위치 백작으로
1대 샌드위치 백작이었던 에드워드 몬태규에 이어
존 몬태규는 4대 샌드위치 백작이었습니다

현재 하와이라고 불리고 있는 섬은
과거 샌드위치 제도라고 불렸는데

1778년 탐험가 제임스 쿡이 처음 발겼을 했을 때
4대 샌드위치 백작인 존 몬태규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존 몬태규는 1748년 제1해군경이 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제1해군경은 영국 해군의 총지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꽤 유능한 인재였던 것 같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이 있었으니
도박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도박을 시작하면 식사할 시간도 아까워
도박을 하는 곳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이때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빵과 빵 사이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만든 음식을 주로 주문했다고 합니다


함께 도박을 했던 사람들은
샌드위치 백작이 먹는 이 음식에 관심을 보였고
같은 음식을 주문했는데
이때 샌드위치와 같은 걸로 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이 음식을 샌드위치라고 부르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즉 샌드위치가 모래마녀라고 불린 것은 마녀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위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이것이 거짓이라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당시 영국에는 휘그당과 토리당이 있었는데
샌드위치 백작은 휘그당 소속으로
토리당과는 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리당이 샌드위치 백작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죠

 


샌드위치 백작은 사실 도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일하는 것을 좋아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의 하인이 책상에 앉아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음식이 빵과 빵 사이에 고기와 채소를 넣은 음식이었는데
이것이 전해져 샌드위치가 되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물론 샌드위치라는 음식 자체는 샌드위치 백작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샌드위치에 대한 어원을 정확하게 알 순 없겠지만
어쨌거나 샌드위치 백작이라는 사람이 이름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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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귀신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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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

여러분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저는 귀신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귀신의 존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마냥 없다고 말하기는 또 애매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과학 기술이 많이 발전한 덕분에
발생하는 괴이한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는
귀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막기 위한 대비책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죠

그중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방법도 있는데
1486년 조선에서는 귀신을 잡기 위해
대포를 사용하려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성종실록을 보면 1486년 11월 10일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창손의 집과 호조 좌랑이었던 이두의 집 그리고 성 안에
귀신이 나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귀신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옮기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나타나 음식을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유문충의 집에는 쥐가 나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괴이한 현상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지만
예조 판서 유지가 이것을 언급하며
기양하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서 기양은 화는 물러나고 복은 오길 바라며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유지는 최근 귀신이 자주 나타나니
무언가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며 임금에게 이야기했던 것이죠



보통 귀신이 나타나면 귀신을 퇴치하는 작업을 하거나
귀신의 원한을 풀어줘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합니다

유문충은 절을 하는 쥐를 보고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해 쌀을 주고 물러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넘기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엉이가 들어온 게 뭐 놀랄 일인가 싶겠지만
조선시대에는 부엉이가 우는 것을 불길하게 여겼고
부엉이가 울면 화를 풀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지내는 제사를 해괴제라고 하죠

 


정창손 역시 집에 귀신이 나타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종 역시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없어진다고 말하며 유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유지의 의견에 반대했지만
유지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화포를 이용해 귀신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판서는 지금으로 따지면 장관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지는 예조판서였으니 교육부 장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창손의 직책인 영의정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교육부 장관이 회의를 하는데
교육부 장관이 국무총리 집에 귀신이 나오니 대포를 한번 쏴보자며
대통령에게 건의를 해본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선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쿨하게 거절했죠


그렇다면 유지는 왜 이런 의견을 낸 것일까요

예전부터 음기를 가진 귀신은 양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양기의 기운이 가장 강한 것은 불이기 때문에
화포를 이용해 귀신을 몰아내고자 한 게 아닌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지는 1453년 단종 때부터 벼슬을 시작했으며
세조를 거처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계속 벼슬을 이어온
제법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1482년 유지가 병조판서였을 때
신정이 차첩을 위조한 것을 알고도 숨겨준 죄로
탄핵당하기도 했었습니다

 


여기서 신정은 병조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름이고
차첩은 관리를 임명하는 문서를 말합니다

즉 유지의 부하 직원이 공문서를 위조해 사람을 뽑았는데
이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죠

어쩌면 유지에게 이 사건은 꽤나 굴욕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482년 유지의 징계를 논하는 자리에 정창손이 있었는데
아마 유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소심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런 발언을 한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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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음식 대접을 받았던 물만밥(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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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음식 물만밥

요즘처럼 날씨가 더운 날에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입맛이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밥에 물을 만 뒤 김치와 먹으면
의외로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 말은 밥은 잘 차린 한상이 아니라
대충 끼니를 때울 때 먹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물 말은 밥을 손님에게도 대접했고
왕의 밥상에도 올렸던 별미 같은 음식이었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물 말은 밥은 언제부터 먹었던 것이며
어떤 상황에 먹었던 것일까요



지금은 이런 밥을 물 말은 밥이라고 말하지만
과거에는 이 밥을 수반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제부터 밥에 물을 말아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고려시대 문신 이색이 쓴 책 목은시고에 보면
이런 시가 나옵니다

 


한더위에 가난한 살이 물에 밥 말면서
얼린 생선 말린 것이 매양 생각났는데
가을에 얻어 먹어도 역시 좋기만 하군
긴 허리 살살 씹으며 짧은 시를 읊노라

그렇기 때문에 물 말은 밥은
최소 고려시대부터는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또 목은시고에는 이색이 여러 재추, 기로들을 찾아다니고
마침내 계림의 이정당 집을 찾아가서 수반을 먹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여기서 재추는 고위 벼슬아치를 뜻하고
기로는 은퇴한 벼슬아치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정당이라는 고위 벼슬아치가 찾아온 손님에게
수반, 즉 물 말은 밥을 대접했다는 내용이 있으니
이 당시 물 말은 밥은 꽤 괜찮은 음식이었고
그 가치는 지금보다 더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70년 5월 29일에 수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각전의 낮 수라에는 단지 수반만 올리게 하라 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각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이곳에 물 말은 밥을 올렸다는 것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물 말은 밥이
꽤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먹은 수반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470년 조선의 왕이 성종일 때
다른 때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하게 들었었습니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왕이 자신의 부도덕함 때문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반성하는 의미로 자신의 밥상
다시 말해 수라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양을 줄이는 일을 감선이라고 합니다

1470년 5월 29일 성종이 먹은 수반은
가뭄이 일어난 것을 반성하는 의미로 먹은 음식이었던 것이죠


1470년 7월 8일에는 비가 많이 왔음에도 성종이 수반을 먹었는데
신하들이 건강을 생각해 다른 음식을 먹을 것을 청하자
수반을 먹는 것은 가뭄이 아니라 더워서 먹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수반은 반성의 의미뿐만 아니라
열을 내리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 왕이 아플 때 수반을 먹었다는 내용도 여럿 있는 것으로 봐
왕이 기력이 없을 때 대접하는 음식으로도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물 말은 밥은 영양가도 부족하고
볼품없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과 같이 독특한 끌림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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