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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곤장 맞는 알바를 했던 사람들 매품팔이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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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곤장 맞을 사람 구해요

누군가 와서 돈을 줄 테니 대신 징역을 살아달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현실성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금액에 따라 진지하게 고민하실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판소리 소설 흥부전에 등장하는 흥부는
형인 놀부에게 쫓겨난 뒤 가족들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때도 밥을 먹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흥부는 이런저런 돈이 되는 일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형벌인 곤장
죄인을 묶어놓고 넓은 나무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체벌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매를 맞는 경우가 없지만

그 이전에 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곤장이 그렇게 심한 형벌은 아니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특수하고 엄한 형벌이었습니다

곤장은 고작 10대만 맞아도 엉덩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맞는 도중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운 좋게 곤장을 맞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하반신이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종 때부터는(1685년) 30대 이상 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사람도 곤장을 맞다 죽을 정도였으니
나이 든 사람에게는 더욱 끔찍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든 아버지 대신 아들이 곤장을 맞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부모의 형벌을 대신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양반 대신 노비가 맞기도 했고
이후에는 돈을 주고 대신 맞아줄 사람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이것은 아르바이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렇게 대신 곤장을 맞아주는 사람들을 매품팔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설 흥부전을 보면
삼십 냥을 줄 테니 대신 매를 맞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부는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30대를 맞고 삼십 냥을 벌어올 것을 다짐하기도 하죠

물론 의뢰인이 석방되는 바람에
흥부는 매를 맞지 않았고 돈도 벌지 못하긴 했습니다



잡다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도
매품팔이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매품팔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다섯냥을 받고 매를 맞으러 왔다고 합니다

곤장을 때리는 사람은 그가 자주 오는 것이 너무 얄미워
평소보다 세게 때렸더니
매품팔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고 다섯 냥을 줄 테니 살살 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곤장을 때리는 사람은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세게 때렸는데
매품팔이는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해
다섯 냥을 더 줄 테니 제발 살살 때려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다섯 냥을 벌기 위해
열 냥을 주고 매도 맞고 온 것입니다

이런 기록을 봤을 때
조선에서는 대신 매를 맞아주며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해지던 매질이 모두 곤장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곤장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행해지기 때문에
일거리가 되기엔 횟수가 부족했습니다

사극을 보면 매우 쳐라 라고 말하며 곤장을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부분이 장형으로
곤장과 비슷하지만 조금 약한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장형 역시 죽을 위험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죠

 


넓은 나무판으로 때리는 곤장과는 다르게
장형은 얇은 막대기로 때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형은 60대, 70대, 80대, 90대, 100대로 나누어 형을 집행할 수 있으며
돈으로 형을 대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10대에서 50대까지는 태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돈으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매품팔이들은 장형이나 태형을 맞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매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받은 돈을 모두 가져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품팔이들은 자주 맞기도 하고
어쨌거나 살아나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살살 맞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때리는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목숨 값으로 보면 한없이 낮은 금액이지만
이들이 계속 매를 맞았던 이유는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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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멸망해버린 세계 최고의 도시 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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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 도시의 멸망

한순간에 멸망해버린 세계 최고의 도시 바그다드

이라크라고 하면 전쟁, IS, 테러처럼
부정적인 단어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죠

하지만 과거에는 이라크가 위치한 중동 지역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특히 750년부터 아바스 왕조가 다스리던 도시인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다른 도시들과 교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땅이 비옥했기 때문에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여름에 비교적 시원해 다른 지역에 비해 해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사람이 살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슬람권에서 최고 지도자를 칼리파(칼리프)라고 부르는데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바그다드는 문화, 예술,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인구 100만 명을 넘긴 세계 최초의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이슬람의 황금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교류를 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들렸고
바그다드는 계속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력은 점점 커졌고
중동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당나라가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과 당나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가장 잘나가는 이슬람 세력을 막을 수 없었고
751년 탈라스 강 근처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죠

 


이때 당나라 포로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는데
이슬람은 이들로부터 종이 만드는 기술을 배워
수많은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보관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7대 칼리파인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이라는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곳 덕분에 바그다드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혜의 집에는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의 책들도 있었는데
이후 이곳에서 보관된 책이 다시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그다드 역시 전성기를 영원히 가져가지 못했고
10세기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바스 왕조가 힘을 잃고 있는 것임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슬람의 상징적인 도시인 것은 여전했죠

 


이때 중앙아시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 제국과 대립하던 당나라가 멸망했고 송나라와 금나라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1189년 보르지긴 테무진을 중심으로
몽골이라는 나라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서는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는데
보르지긴 테무진은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우주의 군주라는 뜻을 가진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 칭호가 바로 칭기즈이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칭기즈 칸입니다



몽골은 칭기즈 칸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습니다

송나라와 금나라는 물론
인접한 나라까지 정복했는데
칭기즈 칸은 전 세계를 통틀어
땅을 가장 많이 넓힌 군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은 뒤에도 몽골은 세력을 넓혀나갔는데
1257년 칭기즈 칸의 손자인 훌라구가 중동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도착합니다

 


당시 칼리파는 알 무스타심이었는데
훌라구는 알 무스타심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알 무스타심에게 있어 몽골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긴 했지만
이제 막 세력을 넓혀가는 하룻강아지 정도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몽골 제국이 탄생한 것은 1206년
약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생아 국가였기 때문이죠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750년
약 500년 정도로 몽골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바그다드 군인들은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았지만
자신은 이슬람 세력의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고
일명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든든한 아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몽골군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알 무스타심은 훌라구의 항복 요구를 무시했고
오히려 그들을 도발했습니다



1258년 1월 29일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은 바그다드를 공격하게 됩니다

알 무스타심은 주변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몰락해가는 아바스 왕조였기 때문에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알 무스타심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당시 바그다드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마저도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몽골의 병력은 약 12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바그다드는 당시 최고의 도시였지만
최고의 군대를 가진 몽골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숫자상으로 바그다드를 압도했고
병력의 질도 차이가 났습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세워진 궁전
수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을 포함해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이때 버려진 책들의 잉크 때문에
티그리스 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과학자, 예술인, 종교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도 학살했는데
이때 사망자는 20만에서 8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그다드군은 몽골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1258년 2월 10일

항복을 선언합니다

세계의 중심, 이슬람의 중심이었던 바그다드는
몽골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그 명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 500년 동안 이어진 왕조가
자만심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몽골군은 내친김에 이집트까지 정복하려 했지만
1260년 9월 3일에 열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이집트에게 패하며
중동 지역을 완전하게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바그다드는 멸망했고 이집트는 막아냈기 때문에
아인 잘르투 전투 이후 이슬람의 주도권은 이집트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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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도 잡아갈 수 없는 곳 삼한시대 가장 절대적인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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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도 잡아갈 수 없는 절대영역

https://youtu.be/UXhRnD4uca8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방에 형성되어 있던 나라인
마한, 변한, 진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합니다

삼한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자세하게 나와있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를 보면
삼한에서는 귀신을 믿는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귀신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유령 같은 것들이 아니라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존재인 신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한에서는 이런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하늘을 숭배하고 하늘에 있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제천의식이라고 합니다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 세 개의 나라라고 했지만
사실 그 안에 여러 개의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런 나라들을 소국이라고 말하는데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변한과 진한은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읍락(邑落)이라고 불렀습니다

읍락 중에서 중심이 되는 곳을 국읍(國邑)이라고 불렀죠

국읍에서는 천신, 그러니까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대표 한 명을 뽑았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고 불렀습니다


천군은 국읍도 아니고 읍락도 아닌 별도의 장소인 별읍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을 소도(蘇塗)라고 불렀습니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나무에 북과 방울을 매달아
이곳이 신성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렸다고 합니다

 


고조선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솟대는
기다란 막대기 위에 새가 앉아있는 형태의 종교 건축물인데
소도라는 이름이 솟대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솟대는 솟다와 막대가 합쳐진 말로
하늘 높이 솟은 막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소도는 높이 솟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도는 한자어라는 말도 있긴 한데
한자 그대로를 풀어보면 소생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도는 제천의식을 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소국에 하나씩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국가 간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삼한에서는 5월에 씨를 뿌릴 때, 10월에 수확을 한 뒤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는 농경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제사를 지낸 장소가 소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과 방울이 장소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큰 나무가 농경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삼한에서 소도는 굉장히 신성한 장소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어떠한 소란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쳐오면
아무리 높은 사람이 출동한다고 해도
절대 잡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소도가 소생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즉 천군이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물론 이런 덕분에 크고 작은 범죄가 많이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과거 고조선은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가 한 명이었던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삼한에는 소도가 있었기 때문에
삼한부터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제정분리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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