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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삼시 세끼를 했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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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점심시간이 없었다고?

최근에는 아침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끼를 먹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삼시 세끼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침을 먹지 않으면 오전이 힘들고
점심을 먹지 않으면 오후가 힘들고
저녁을 먹지 않으면 자기 전까지가 힘들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삼시 세끼를 하고 있고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놀랍게도 과거에는 하루에 두끼만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를 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하루에 세끼를 먹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식생활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본격적으로 점심을 챙겨 먹기 시작했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송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에 보면

사신이 왔을 때 세 끼를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고
(제할관 및 상절이 객관에 머무를 때는 매일 세 끼 식사를 제공하는데)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 보면
세 끼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세 때에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가서 함께 먹었다)

고려 시대에는 세 끼를 먹었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이것은 고위 관료층이나 돈이 많은 일부의 사람들만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시 세끼라는 표현을 쓰지만
과거에는 조석 끼니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조석은 아침과 저녁을 말하는 것이니
그 당시 사람들은 하루에 두끼가 보통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죠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영향을 받아
똑같이 하루에 두끼만 먹었습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모두
하루에 두끼만 먹는다고 나와있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씩 먹는다고 속언에 말하지 않았는가)

하루에 두 번 먹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고 나와있기도 합니다
(대저 사람의 사정으로는 하루에 두 번 먹지 않으면 굶주리는 것이니)


하지만 과거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밥을 두 번 밖에 먹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침과 저녁 사이에 에너지를 채워줄 음식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새참입니다


새참은 막걸리와 함께 먹을 음식들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국수가 대표 메뉴였다고 합니다

이때 먹는 밥은 특별한 격식을 갖추지 않았으며
낮에 딱 한 번 먹는 오늘날의 점심밥 같은 개념이 아니라
허기질 때마다 먹는 간식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은 하루에 다섯끼를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먹는 초조반
본격적인 아침밥인 아침수라
점심때쯤 먹는 낮것상
본격적인 저녁밥인 저녁수라
야식으로 먹는 야참이 있습니다

여기서 초조반, 낮것상, 야참은 간단하게 차려진 음식으로
농부들이 먹었던 새참처럼 간식 같은 개념이었죠

즉 조선의 왕 역시 따져보면 하루에 세 번의 간식과
두 번의 식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점심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점심은 식사를 하기 전 배고파질 때쯤
마음에 다시 점을 찍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만두 같은 간단한 음식을 먹어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딤섬인데
점심과 딤섬은 한자가 같고
점심을 광동어로 읽으면 딤섬이 됩니다

즉 중국에서 점심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역시
가벼운 간식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고

낮에 먹는 것뿐만 아니라
아침밥을 먹기 전 배를 채우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심이 식사에 대한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보면
요즘 사람들은 낮에 든든히 먹는 것을 점심이라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낮을 당하여 단단히 먹는것을 점심이라 한다)

이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점심은 한끼 식사로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침의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게 되었습니다

또 출근부터 퇴근까지 계속 일하는 것보다
시간을 내 식사를 한다면
업무의 효율이 더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 시간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점심시간이며
이때부터 하루에 세끼를 먹는 식습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원래 점심이라는 것은 특정 시간대를 말하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12시에서 1시정도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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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잡는 사냥꾼 조선시대판 위쳐 착호갑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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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오면서
야생동물의 수가 줄어들게 되어
과거에 비해 야생동물에게 받는 피해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발달도 많이 되지 않았고
좋은 무기도 없던 시절에는
야생동물이 사람을 해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항상 해야 했습니다

특히 호랑이에 대한 피해가 컸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야생 호랑이가
한 마리도 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었고
그런 덕분에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많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호랑이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괴물을 잡아줄 사냥꾼
조선시대 위쳐가 필요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기 때문에
호랑이가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태조실록을 보면 1392년 12월 20일(윤달)
호랑이가 성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태종실록을 보면 1402년 5월 3일
경상도에서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실록을 보면 1697년 4월 30일
대기근 때문에 먹을게 없어진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오니
사람이 혼자서 다니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호환이라고 하는데(虎患)
조선시대에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호환, 마마(천연두), 전쟁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때로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여기서 호환이 바로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1년에 반은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가 조선 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는 호랑이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줄
전문 호랑이 사냥꾼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직업 군인을 갑사라고 불렀습니다(甲士)

그리고 갑사 중에서도 호랑이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를
착호갑사라고 불렀죠(捉虎甲士)


1416년 10월 27일 주인기와 공계손이라는 사람이
자신들을 착호갑사라고 속이며 군마를 빌려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최초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착호갑사는 최소 1416년부터는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임시 조직이었으며
호환이 생겼을 때 해당 지역에 내려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421년 조선의 왕이 세종일 때
20명을 뽑아 정식으로 운영했던 것이
착호갑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갑사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것으로 평가받는 착호갑사는
선발되는 조건도 까다로웠습니다

180보 거리에서 활을 쏴 명중시켜야 했으며
말을 타고 활이나 창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했고
지구력과 근력을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호랑이를 직접 잡는 사람은 포상을 주거나
시험을 면제하고 착호갑사에 임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기와 공계손은 자신들을 착호갑사라고 속이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군마를 빌렸던 것이죠


호랑이 사냥을 간 착호갑사 중에서
가장 먼저 활이나 창으로 호랑이를 맞히는 사람은
포상을 주고 특진시켜주는 등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보니
착호갑사에 지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없을 때
함흥차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강원도에서 호랑이를 잡으러 간 포수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이와 같은 표현으로 강원도 포수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호랑이 사냥은 기본적으로 활과 창을 사용했습니다
단 한발의 활과 창으로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 번 이상 공격해야 했는데
첫 번째로 호랑이를 쏜 사람을 선중전자라고 불렀으며
첫 번째로 호랑이를 찌른 사람을 선창자라고 불렀습니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되니
설마를 타고 사냥을 하곤 했는데(雪馬)
설마는 눈 위에서 달리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썰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함정이나 덫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기도 했는데
이것을 함기 혹은 함뢰라고 불렀습니다(檻機) (檻牢)

함기는 호랑이가 잘 다니는 길에
나무나 돌을 올려서 설치한 뒤
우리 안에 개를 미끼로 넣어놓는 함정이었습니다

호랑이가 개를 먹으러 와서 함기를 건드리면
위에 있던 나무나 돌이 무너져 호랑이를 덮치게 되는데
마치 벼락이 치는 것과 같다 하여
벼락틀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활과 창을 들고 직접 사냥을 하는 것보다
함정을 사용하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온전한 호피를 구할 수 있어서
함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구덩이를 파 창을 세워두고 빠지면 잡는
고전적인 방식인 정창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를 사냥했던 이유는
인명피해를 막기 위함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비가 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을 경우에는 기우제를 지내곤 했습니다

기우제는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용이 살고 있는 곳에 호랑이 머리를 넣으면
호랑이가 용과 싸우느라 활동을 하게 되고
용이 활동을 하게 되면 비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우제를 위해서라도 호랑이를 사냥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침호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沈虎頭)


또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을 때 얻는 아이템을 정리하면
상당히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앞다리 정강이뼈는 약재로 사용되었으며
발톱은 악귀를 물리치는 용도로
이빨은 부스럼을 다스리는 용도로
수염은 치통, 쓸개는 설사, 오줌은 악성 종양
기름은 치질 다스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호랑이 고기를 먹으면 다른 호랑이들이 두려워한다 하여
호랑이를 잡기 전 고기를 먹은 뒤 사냥을 가기도 했습니다



호랑이 전리품 중 최고는 가죽이었는데

1500년대 호피 한 장은 쌀 60가마니 정도로
지금 가치로 따져보면 약 1000만 원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명나라나 일본에 수출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일본은 섬나라다 보니 호랑이가 살지 않아
호피가 큰 인기 품목이었다고 합니다


호피는 부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높으신 분들의 초상화를 보면
의자 가죽이 호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할 때 가마 위에 호피를 얹기도 했는데
부를 과시하는 것 이외에도
여우 같은 여자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하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호피가 아닌 표범의 가죽인 표피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이 당시에는 호피보다 표피가 더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표범은 재빠르고 나무를 타기 때문에 잡기 어렵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 귀한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착호갑사가 되지 않고
호랑이를 잡는 민간 사냥꾼이 늘어나게 됐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들어오면서
호랑이 사냥 난이도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라는 장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와 호랑이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임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호랑이 고환이 불임 치료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랑이를 사냥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호랑이를 사냥하다 보니 숫자가 점점 줄어들게 됐고
민간 사냥꾼이 착호갑사의 역할을 대신하다 보니
착호갑사는 딱히 할 일이 없게 되어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호랑이를 멸종시키면서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호랑이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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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 원을 벌었던 짚신 장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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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를 팔아 수십억을 번 사람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길 꿈꿉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각자의 재능을 살려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중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큰 가치가 없어보이는 지푸라기를 이용해서
수십억원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발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신발을 신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신발 종류가 생겨났고
신발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브랜드도 많이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짚신이 가장 대표적인 신발이었습니다

 


짚신은 주로 벼의 줄기인 볏짚을 이용해 만드는데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벼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에
볏짚은 주변에서 보기 아주 흔한 것이었고
만들기도 쉬워서 가격도 저렴한 신발이었습니다

물론 신분마다 짚신의 모양의 차이가 나긴 했지만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짚신을 신던 때였죠


하지만 당시에는 내구력을 올릴 수 있는 기술도 없었고
아무래도 지푸라기를 이용해 신발을 만들다 보니

쉽게 망가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짚신을 여러 켤레 준비해야 했습니다



과거 짚신은 신발의 용도 그 이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망가진 짚신에 손잡이를 달아
파리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발에 밟히고 땅에 끌렸기 때문에 저항력이 생겼다고 믿어
병마를 쫓아내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대문에 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쉬웠기 때문에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사람도
자본이 없어 장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기술이 없어 전문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쉽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짚신을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넘쳐났기 때문에
짚신을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도

꽤 쏠쏠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짚신을 만드는 행위를 짚신을 삼다라고 하는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보면
토정 이지함이 구걸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짚신을 삼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하루에 열 켤레만 만들어 팔아도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몇 달 만에 삶이 넉넉해졌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짚신 장사를 하는 사람 중 송세흥이라는 사람은
세 살쯤 버려진 뒤 송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키워졌는데
낮에는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후추를 눈에 발라 잠을 쫓으면서까지
짚신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어버렸고
절에서도 짚신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0년쯤 지나 결혼할 나이가 되자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은 수천 냥 정도로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천 냥이 70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그의 재산은 수억 원 정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혼 이후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고
다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아들과 함께 절로 들어가 또다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난 뒤
이번에는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됐을 때
절에서 나왔는데
이때는 밭을 사 부처님에게 드린 뒤 나왔다고 합니다



송세흥은 이제 마을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었고
아들과 함께 짚신을 삼았을 테니
그의 재산은 수십억 원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에서 나온 뒤로도 짚신을 계속 삼았으며
별다른 질병 없이 98세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짚신을 팔아 부자가 된 송세흥의 삶은
1801년부터 유배생활을 하며
일상을 기록했던 심노숭의 책인 남천일록에 쓰여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는
물이 맑아 청강이라 불리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이곳에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는데
매년 홍수가 나 떠내려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다리로 바꾸려고 했지만
마을을 위해 선뜻 돈을 내는 사람이 없어
몇 년째 같은 문제가 발생했죠

그런데 짚신을 팔아 재산을 모은 송세흥이 돈을 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실제로 비석 뒷면에는 대시주(크게 베풂) 송세흥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짚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조금 비싸긴 하지만
내구성이 좋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짚신 장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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