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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모두 대머리일까(불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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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모두 대머리일까

어떤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를 믿거나 숭배하고
그들의 사상을 따르며 삶의 의미를 찾는 단체를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인 종교이죠

종교마다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믿고 따르는 것도 다르다 보니
각각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아주 다른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바로 신자들이 모두 대머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머리를 빡빡 깎는 것일까요




불교에서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수행자를
우리는 스님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모두 대머리인 것이 특징인데
사실 대머리라고 하면 유전적 원인에 의해 탈모가 와서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에

대머리가 아니라 삭발을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물론 스님 중에서 실제로 탈모가 와
대머리가 되어 버린 사람도 있을 수 있긴 하지만 말이죠

불교는 부처, 석가모니, 붓다, 여래 등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처음 만든 종교입니다



싯다르타는 당시 샤카족이라고 불리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왕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부족할 것 없이
아주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성 동쪽 문에서 늙은 사람
남쪽 문에서 병든 사람
서쪽 문에서 죽은 사람을 보고

삶에 대한 현타를 느끼게 됩니다

이후 북쪽 문에서 출가한 사람(승려)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뒤 본인도 성에서 나와 출가할 것을 결심하게 되죠

이것을 사문유관이라고 합니다(四門遊觀)

 


싯다르타는 성을 빠져나온 뒤
함께 있던 자신의 시종 찬다카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건네준 뒤
성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칼을 꺼내 머리카락을 자른 뒤
본격적인 수행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여러 고난을 견뎌내고 깨달음을 얻은 뒤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불교입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때 삭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싯다르타의 모습을 조각한 불상을 보면 알 수 있죠

스님들이 언제부터 삭발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들이
머리를 잘랐다는 싯다르타의 행동에 의미를 두고
삭발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무명이란 무지와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기도 하며
진리에 다다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머리카락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또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면서 수행에 방해되는 것을 없애고
그런 유혹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의 경우
속세를 떠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그만큼 수행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죠

스님들의 이런 행동은 굳건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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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김은 왜 김이라고 불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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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왜 김이라고 할까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있고
동맥경화, 고혈압, 골다공증
그리고 암을 예방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하나만 있어도 밥 한공기를 해치워버릴 수 있는 이 반찬은
바로 김입니다

김은 해조류의 한 종류로
살짝 구워서 양념장과 함께 싸먹어도 아주 맛있고
소금을 뿌려 구운 뒤 싸먹어도 아주 맛있고
다른 음식에 추가해 먹어도 아주 맛있고
그냥 먹어도 아주 맛있는 음식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김을 먹을 때
이름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지만
김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있는 중이니 한번 생각해봅시다

김은 왜 김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김은 전세계적으로 80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업적으로 생산되고 판매되는 김은 대부분
한국, 중국, 일본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의 김은 가장 높은 수출량을 보이고 있죠

그리고 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김을 먹은 것 역시
기록상으로는 우리나라가 최초라고 합니다

김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은 바다 바위에 붙어 자라게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마치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해서
김을 해의라고 불렀습니다

일연 스님이 제작한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때 해의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해의가
김을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해의에 대한 기록
즉 김에 대한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24년에 만들어진 경상도지리지에 등장하기도 하며
1454년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
해안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며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품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해의가 김으로 불렸는지
이것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몇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1640년 조선의 왕이 인조일 때
김여익이라는 사람이 해변에 표류해온 나뭇가지에 해의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에 영감을 얻어 해의 양식을 처음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여익은 해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하며
양식에 성공했을 때도 음식에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음식은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게 되었고
인조는 음식을 먹어본 뒤 이름을 물어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이름은 아직 없고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들은 인조는
그렇다면 이 음식을 이제부터 김이라고 불러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해의는 김이라는 음식으로 불리게 된 것이죠



또 김여익이 해의 양식에 성공하고 거래를 할 때
김씨 집안에서 만든 음식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리고 김여익의 양식법 때문에 김 양식이 보급화 되었으니

해의를 김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여익은 당시 전라남도 광양에서 김 양식을 시작했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광양에는 김시식지가 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1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김여익에 대한 이런 기록은
무덤 앞에 세우는 돌인 묘비에 적혀 있다고 하지만
현재 묘비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사본만 남아 김시식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김에 대한 어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김씨 성을 가진 사람과 관련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만약 김씨 성이 아니라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양식을 했다고 전해져 내려왔다면
오늘날 김은 김이 아니라 조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즐겨 먹는 이 음식의 이름은
김밥이 아니라 조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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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람들은 왜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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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람들은 왜 비가 와도 우산을 안쓸까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면 시야도 좁아지고
양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우산을 쓰지 않으면
쫄딱 젖어버리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우산을 필수적으로 챙겨야 하죠

그런데 서양권에서는
특히 영국이라는 나라는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고 다니는 걸까요



우산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으며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형태의 우산은
1750년대 영국의 조나스 한웨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고 합니다

 


우산을 뜻하는 영어인 Umbrella는
그림자를 뜻하는 라틴어 Umbr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산은 비를 막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3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었습니다

그때는 신분이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본인이 직접 우산을 들지 않았고
햇빛을 가려줄 누군가가 존재했었습니다

쉽게 말해 과거의 우산은
하인들이나 사용하는 물건이었던 것이죠



고대 중국에서도 왕족들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우산을 사용했는데
이때도 역시 하인이 우산을 대신 들어줬습니다

이런 우산은 고대 그리스, 로마로 전해졌는데
무역을 할 수 있는 수단이 그리 발달되지 않았던 때라
그리고 귀족, 왕족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라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덕분에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부유한 여자들이 자신의 부를 나타내기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차별하고 무시하던
그 당시 남자들은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모자를 쓰거나 마차를 타거나
아니면 그냥 비를 맞았습니다

하인들, 여자들이나 들고 다니는 물건을
우월한 존재인 남자들이 들고 다닐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시간이 흘러 우산은 유럽 곳곳에 퍼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자들은 우산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우산을 써야 할 때는 자신이 직접 들지 않고
하인을 시켜 우산을 들게 했습니다

현대적 우산을 만든 조나스 한웨이는
우산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우산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한웨이를 조롱했죠

 


특히 마차를 모는 사람들이 한웨이를 많이 공격했는데
비가 오면 비를 피하기 위해 마차를 이용하지만
우산이 보급화되면 마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시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나스 한웨이가 30년 동안 우산을 들고 다닌 덕분에
우산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화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산을 쓰는 것은 천한 행동이다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다 라는 인식이 많이 남아있고
이런 문화가 전해져 내려오면서
현대에 와서도 우산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이유 이외에도
날씨 때문에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국은 비가 자주 내리는 나라이긴 하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이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잠깐 비를 피하거나
애초에 방수가 되는 옷을 입는 것으로
우산을 대체합니다

그런 덕분에 방수가 되는 옷과 모자 쪽으로
많이 발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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