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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게임이 유행하자 영국에 세금을 걷기 위해 한 일(스페이드 에이스 디자인은 왜 화려할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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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됐어? 세금 걷어보까?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모두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원카드라고 합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조합해
높은 카드 조합을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포커라고 합니다

카드를 받아 21에 가까운 수를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블랙잭이라고 합니다

이 게임은 모두 카드를 가지고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카드를 우리는 트럼프라고 부르고
영미권에서는 Playing card라고 부릅니다

물론 카드를 만드는 회사마다 디자인을 조금씩 다르게 할 수 있지만
모양에 따른 디자인은 통일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스페이드 에이스는
다른 카드와 다르게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죠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요

youtu.be/IcQZTPgJLaw



스페이드 에이스가 화려하게 바뀐 것은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에서 카드 게임이 유행하던 시절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공장에 기계가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에게 보다 많은 여가시간이 주어졌고
여가시간을 즐기기에 카드 게임이 제격이었던 것이죠

 


"카드 게임이 유행하는데 여기에 세금을 걷으면
많은 세금을 확보할 수 있겠어"

"어떻게 자연스럽게 세금을 걷지?"

상품권이나 통장 같은 종이를 발행할 때
내는 세금을 인지세라고 하는데

1700년대 초반부터 인지세를 플레잉 카드에도 적용시킵니다



카드를 판매하기 위해선 세금을 내야 했는데
처음에는 세금을 냈다는 증표로 모든 카드에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1718년 이후로는 스페이드 에이스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52장으로 구성된 플레잉 카드는(조커 제외)
보통 스페이드 에이스가 가장 위쪽에 위치하니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확인하는 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65년부터는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인증된 곳에서 스페이드 에이스를 제작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완성된 카드를 판매하기 위해선
인증된 곳에서 제작된 스페이드 에이스를 구매해
판매해야 했던 것이죠

스페이드 에이스를 한 장 구매하면
그것으로 카드에 대한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깟 카드 하나 만드는데 세금이 너무 비싸"

"똑같이 만들고 샀다고 거짓말 칠까?"

카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카드에 세금이 붙는 것이 불만이었고
이 때문에 공장에서 직접 스페이드 에이스를 똑같이 만들어
세금을 낸 것처럼 하며 판매를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행위는 불법이었습니다
애초에 스페이드 에이스를 찍어낼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것조차
불법이었죠

실제로 1805년 스페이드 에이스를 불법으로 만든 제작자가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1828년 영국은 카드를 만드는 곳에서
스페이드 에이스를 위조할 수 없도록
디자인을 정교하고 화려하게 바꿔버렸습니다

"이정도면 아무도 못따라하지"

이때는 스페이드 에이스가 세금 그 자체였기 때문에
스페이드 에이스를 듀티 에이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862년 이후로는 카드에 대한 세금이 줄어들면서
인증된 곳이 아니어도 스페이드 에이스를 만들 수 있게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업체들은 여전히 스페이드 에이스를 화려하게 디자인했고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와
스페이드 에이스만 다른 디자인으로 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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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유행했었던 행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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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행운의 편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행운의 편지라는 것을 들어보거나
실제로 받아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작성해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경우 행운이 찾아오고
편지를 무시할 경우 불행이 찾아온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혹시나 진짜 불행이 찾아오진 않을까 해서
편지를 작성해 보내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행운의 편지는 서양에서는 19세기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400년대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이미
행운의 편지가 유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470년의 조선은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하게 들었던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농사가 잘 되는 것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가뭄이 드는 것은 나라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죠

조선의 왕이었던 성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기까지 했습니다(성종 1년 3월 29일)


하지만 가뭄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문제가 지속되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한 귀신이 하늘로부터 능성(전남 화순) 부잣집에 내려와
한 번에 밥 한 동이와 두붓국 반동이를 먹고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고 떠났다는 것이죠
(성종 1년 5월 26일)

"잘 먹었고
내가 보니까 이번달에는 비가 안오고
다음달에는 비가 올거야
근데 만약에 다음달에 비가 안오면
올해 농사는 망했다고 봐야지"

 


그리고 귀신은 임진년, 갑신년, 신유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올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도 덧붙였습니다

이 귀신은 입은 세개인데 머리는 하나만 있다고 해서
삼구일두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만약 귀신의 말대로 다음달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의욕이 많이 떨어질 것이고

해당 연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게 될 수 있으니

성종은 나라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 퍼트린자를 벌하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가뭄은 끝나지 않았고
삼구일두귀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상황속에서
비슷한 종류의 다른 소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남 보성 부잣집에 키는 한 길(3m)이 넘으며
몽두만 쓴 귀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한 말의 쌀로 밥을 지어 먹은 뒤 예언을 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몽두는 죄인의 얼굴을 덮어씌우던 물건인데
다른 옷은 입지 않고 몽두만 쓰고 있었다 하여
단피몽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은 머리가 하나에
상투가 일곱이라고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곧 내 동생도 내려올건데
걔가 오면 풍년이 들거야 걱정하지마"

라는 내용의 소문이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명나라 원광사에 3년전에 죽은 149살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의 혼이 와서

올해(1470년)에는 바람과 비가 몹시 심해
악한 사람은 다 죽을 것이고
올해와 내년에 전염병이 돌고 전쟁이 일어나
집은 있지만 사람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이고
아홉 여자가 한 지아비와 함께 살며
열 집이 한 마리의 소를 함께 부리며
집에는 연기가 끊어지고 곡식은 쌓아두고 먹을 것이 없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눈이 멀게 될 것이고
이 글을 베껴 다른 한 명에게 전하는 자는
자신이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두 명에게 전하는 자는
집안이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세 명에게 전하는 자는 평안함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유행하는 행운의 편지처럼 말이죠

심지어 이 글은 요동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라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문을 낸 사람들이 붙잡혀
곤장을 맞고 노비가 되는 벌을 받으며 마무리 됐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 최초로 소문을 낸 것이 맞는지
냈다면 무슨 목적으로 낸 것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왕의 귀에 전달되기도 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그 당시 사람들도 행운의 편지 때문에
꽤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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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언제부터 3일 연휴였을까(설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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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언제부터 3일 쉬었던 걸까

과거 농사가 중요시되던 때
달마다 좋은 날을 선택해

풍년, 건강, 행복 같은 것들을 기원하며
가족 친척들과 모여 덕담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을
명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은 설날, 대보름,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동지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돼
명절이라고 하면 설날과 추석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설날과 추석은 3일이라는 긴 연휴가 있기 때문에
명절의 의미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날은 도대체 언제부터 3일을 쉬었던 것일까요



보통 설날이라고 하면 음력 1월 1일을 말하는 것이며
설날 전날, 다음날까지 해서 총 3일의 연휴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특정 날짜를 명절로 지정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삼국시대의 정사가 기록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238년), 책계왕(287년)때
한 해의 첫 번째 달인 정월에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수나라의 정사가 기록된 수서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 아침에 잔치를 열고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명절에 대한 의미가 더 커지게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설날,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로 삼았습니다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이 휴일이었으며
설날에는 7일, 정월 대보름에는 3일
그리고 추석에는 하루를 쉬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쉬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쭉 이어져 내려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서서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태양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1896년 양력 1월 1일로 바뀌게 되었고
설날은 2월달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면서
조선 역시 일본처럼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지정해 버렸습니다

광복 이후 음력설은 명절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양력설이 공식적인 설날로 지정되면서
설날 다음날, 다다음날까지 휴일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때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 탄생한 양력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휴일이 아니었음에도 음력설에 더 크게 차례를 지냈습니다

나라에서는 이중과세(설을 두 번 지냄)라고 하며
음력설을 지내지 못하게 탄압하던 때도 있었는데
1981년의 조사에 따르면 음력설을 지내는 국민이 81.8%나 됐다고 합니다

 


결국 1985년 정부는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고 부르며
하루만 쉴 수 있도록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사용되다가
1989년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며
음력설이 다시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이때부터 음력설이 3일 연휴로 바뀌었습니다

양력설은 1989년까지 3일 연휴였다가
1990년부터 이틀만 쉬는 것으로 바뀌었고
1999년 이후로 하루만 쉬는 것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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