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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으로 전 재산의 90%(약 20억)를 날린 천재 과학자 이야기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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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의 90%를 날린 천재 과학자 이야기

최근 재테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해서
좋은 종목에 들어가 수익을 얻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본인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업의 가치가 하락해
수익을 내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주식을 잘 하려면 차트를 분석하고
재무제표를 봐야 하고
책을 통해 공부를 해야 하고
코스피, 코스닥, PER, PBR, ROE, EPS 등등
여러 가지 용어도 알아야 하니

똑똑해야만 투자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천재 과학자라고 평가받던 사람도
전 재산의 90%를 주식으로 잃었다고 합니다


1711년 영국은 가지고 있는 국채를 해결하기 위해
무역 독점권이 있는 남해회사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남해회사는 노예를 수송해 남미에 판매하는 기업이었는데
회사는 무역 독점권을 가지는 조건으로
나라의 국채를 어느 정도 떠안게 됩니다

회사는 주식을 상장해 국채 소유자들에게 주식을 줬습니다

회사가 이익을 얻으면 주가가 올라가게 될 것이고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득을 볼 것이니
이것으로 국채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당시 남미는 스페인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어도 회사는 큰 이득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1718년에는 스페인과 영국이 전쟁을 하는 바람에
무역은 불가능한 수준에 다다르게 됐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만든 회사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남해회사는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영국의 국채를 더 떠안는 대신
주식을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남해회사는
정부에서 밀어주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1720년 주당 100파운드로 시작한 남해회사의 주가는
순식간에 200, 300파운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매일 남해회사 이야기로 도배되었고
남해회사 주식이 없으면 바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사람들은 주식을 사기 위해 매일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남해회사 주식을 샀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1624년 영국에서 태어나
반사거울을 이용한 반사망원경을 만들었으며
오늘날 미분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명했고

떨어지는 사과에 영감을 받아 중력 법칙을 수식화 해냈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연금술사였던 이 인물은
바로 아이작 뉴턴입니다



뉴턴은 남해회사 주가가 비싸지 않을 때 주식을 매수해
두 배의 가격으로 팔아 큰 이득을 봤습니다

하지만 뉴턴이 남해회사 주식을 팔자마자
주가는 끝을 모르고 계속 올라갔고
남해회사를 계속 존버했던 다른 사람들은
더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너무 높아져 버린 가격 때문에 뉴턴은 매수를 망설였지만
눈뜨고 일어나면 부자가 되어 있는 옆집 사람들을 보며
달리는 열차에 다시 올라타게 됩니다

뉴턴이 올라탄 뒤에도 주가는 계속 올랐고
뉴턴의 입꼬리도 언제나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영국은 남해회사 주식 자체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남해회사의 방식을 모방하는 다른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 문에 남해회사의 주식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거품 방지법을 제정해
무허가 주식회사들을 단속했고
남해회사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스페인과 조약을 맺어 남미 무역이 다시 가능해질 것이다
남미에 새로운 광산을 발견했다 라는 소문을 퍼트리게 됩니다

 


남해회사는 큰 실적이 없었지만
정부의 밀어주기와 사람들의 광기 어린 투자로
한 주당 1000파운드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영국 정부 관료들은 이쯤이면 되었다라고 생각한 것인지
슬슬 남해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들리자 회사의 주식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남해회사에 대한 좋은 소문들도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000파운드까지 돌파했던 주식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급락하기 시작했고
뉴턴의 입꼬리도 끝을 모르고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천재 과학자 뉴턴의 선택
그는 물타기가 아니면 답이 없다는 생각에
떨어지는 주식을 추가 매수했고

회사를 믿으며 연말까지 존버 했지만
남해회사 자체가 거품 그 자체였기 때문에
주식은 다시 연초의 가격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나름대로 전략을 세워
주식을 분할매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지 않은 선택으로 작용하며
전 재산의 90%를 잃게 되었는데
이것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20억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줬던 남해회사 사건을
남해 거품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네덜란드 튤립 거품, 프랑스 미시시피 거품과 함께
세계 3대 거품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분석해 큰 업적을 남겼던 뉴턴은
떨어지는 차트를 분석하지 못해 재산을 날린 뒤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대중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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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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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

감자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여러가지 요리에 사용되며
모두 맛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쪄 먹어도 맛있고
볶아 먹어도 맛있고
빵을 만들거나 튀김을 만들어 먹어도 맛있습니다

그런 만큼 감자를 재료로 한 과자도 정말 많이 있죠

여러 종류의 감자 과자 중
얇게 썰어 칩 형태로 만드는 감자칩은
놀랍게도 진상 손님에 의해 탄생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1824년 뉴욕에 있는 사라토가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조지 스펙은
크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850년대 고향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토랑에 손님이 와서
감자튀김을 주문하게 됩니다

 


그는 평소처럼 감자를 요리해
손님에게 전달해 줬지만
손님은 감자가 너무 두껍고 축축하니
다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크럼은 주방으로 돌아가 감자를 다시 요리 했습니다
그는 감자를 처음보다 더 얇고 바삭하게 만들어
손님에게 전달합니다

하지만 손님은 이번에도 감자가 너무 두껍고 축축하다고 말합니다


화가 난 크럼은 이번에는 감자를 말도 안되게 얇게 썰어버리고
소금을 왕창 뿌려 먹을 수 없도록 음식을 만든 뒤
손님에게 전달합니다

크럼은 진상 손님을 골려 주기 위해 음식을 만들었지만
놀랍게도 손님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후 사라토가 마을에는 이 음식이 유명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얇은 감자칩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얇은 감자칩은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가 되었고
지역 이름을 따 사라토가 칩이라고 불렸습니다

1860년대 크럼은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고
사라토가 칩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라토가 칩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우리가 맛있게 먹는 감자칩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럼이 감자칩을 만들어내기 전
1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요리책을 보면
이미 감자칩을 만드는 요리 방법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1817년에 출판된 영국인 윌리엄 키치너의 책을 보면
감자를 얇게 썬 뒤 튀기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감자칩의 최초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감자를 얇게 써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꽤 어려운 요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후 슬라이스 칼이 등장하면서
감자칩의 난이도가 내려갔고
대규모로 만들 수 있는 장치가 도입되면서
감자칩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감자칩을 봉투에 담아 판매하던 것이
감자칩 과자의 최초가 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로는 감자칩 안에 소금을 따로 넣어줬고
1950년대부터는 소금이 묻어 있는 감자칩이 판매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감자칩이지만
크럼의 사라토가 칩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진상 손님과 크럼에 의해 감자칩이라는 음식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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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한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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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말고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것

불은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위험한 것입니다

인류가 불을 처음 발견한 뒤로
화재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소방서가 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도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소방서가 없었던 시절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불의 역사가 아주 오래된 만큼
소방서의 역사도 굉장히 오래됐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6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는
한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426년 2월 15일 조선의 왕이 세종일 때
수도인 한성부(한양)에서 큰 화재가 발생합니다

이때 조선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단 하루 만에 집 2200채가 불타버렸고
재가 돼버려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명피해만 32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성부의 총 가옥 수는 약 2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화재로 2200채가 타버렸으니
10% 이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이 화재를 한성 대화재 혹은 한양 대화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명령을 내려야 했던 세종은 한성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 훈련 행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강무라고 하는데

1426년 2월 13일 세종은 강무를 위해
첫째 아들인 문종과 함께 강원도로 떠났습니다


사실 아내인 소헌왕후 역시 강원도로 같이 떠날 예정이었지만
금성대군을 임신하고 있었던 때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니
소헌왕후는 그야말로 만삭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한성부에 남겨진 소헌왕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화재 진압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는데

돈과 식량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종묘와 창덕궁이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불은 당일에 꺼지는 듯 보였으나
다음날 다시 번지면서 추가로 집 200채를 더 태운 뒤
사그라들었습니다

1426년 2월 16일 세종은 한성부에 화재가 난 것을 보고받았고
2월 19일 한성부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종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성부를 보고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2월 15일 화재가 발생하기 전
다른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흉년 피해 때문에 굳이 떠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한성부에서 가까운 경기도 지역으로 가려고 고민을 하기도 했고
강원도로 가는 중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돌아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한성부에 자신이 도착했을 때
신하들이 굳이 예의를 갖추지 말라고 전했으며
문밖에 나와 마중을 하지 말고 궁에서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하기 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줄 것을 명령했고
도착하자마자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화재가 또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을 적당히 철거해 간격을 띄웠으며
우물을 파 물을 저장하도록 했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을 붙잡아 고발하면 보상을 줬으며
만약 그 사람이 천민이라면 양민으로 옮겨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도
방화에 의한 화재가 끊이지 않았고
방화와 함께 도둑질도 많이 늘어나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1426년 2월 26일 세종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데
불을 금한다는 뜻으로 이곳을 금화 도감이라고 불렀습니다(禁火都監)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 그리고 조선 최초의 소방서입니다

금화 도감에서 일하는 소방수 중 소화 작업을 하는 사람을
금화군(禁火軍)이라고 불렀고
물을 긷고 나르는 사람을 급수비(汲水婢)라고 불렀습니다

금화 도감에 소속된 사람들은
지금의 소방수와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화재에 약한 초가집 지붕을 기와로 바꾸는 작업도 같이 했습니다

세종이 금화 도감을 설치한 이후
화재에 대한 대응이 확실히 빨라졌으며
효과적인 진압도 가능해졌습니다


금화 도감이 만들어지기 전 1422년에는
성을 수리하는 성문 도감(城門都監)을 만들기도 했는데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의 역할이 많이 겹쳤기 때문에

1426년 금화 도감과 성문 도감을 하나로 합쳤고
이것을 수성 금화 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화재 예방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성 안에 드므라는 것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안쪽에 들어가면 드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물을 담아놨습니다

과거에는 화재를 일으키는 귀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귀신은 아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죠


귀신이 화재를 일으키기 위해 궁에 들어왔다가
물이 담겨 있는 드므를 보게 되면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일 것이고

드므에 무서운 귀신이 있다고 착각해
화재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므를 설치해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후 1467년 조선의 왕이 세조일 때
금화군은 불을 멸하라 라는 의미로
멸화군(滅火軍)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50명으로 구성된 멸화군은
불을 끄는 것보다 불이 번지지 않게 하는데 더 중점을 뒀습니다


이들은 도끼와 쇠갈고리를 들고 다니며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트려 불길이 번지지 않게 했고

불이 많이 크지 않다면 물에 적신 천을 이용해
불을 껐습니다

멸화군의 활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멸화군 창설 이후 조선의 화재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1637년 조선의 왕이 인조일 때
쓸데없는 곳이라 하여 폐지되면서

세종이 만들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인 금화 도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근대화된 소방 장비가 들어오게 되면서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소방서인
경성소방서가(종로소방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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