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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명을 죽인 치사율 50%의 질병을 극복시킨 기적의 치료법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해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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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율 50% 질병을 극복시킨 기적의 치료법

 

https://youtu.be/GmccOUVTn-g

 

1817년 콜레라라는 질병이 인도에서 시작돼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로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1차 콜레라 대유행이라고 부르죠


1826년에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캐나다, 미국까지 퍼져나가
굉장히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2차 콜레라 대유행이라고 부릅니다

콜레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1837년부터 1975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계속 유행했는데
이때 사망한 사람 숫자만 수천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콜레라는 더러운 물이나 음식을 먹었을 때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병으로

구토나 설사가 계속 나오게 되는데
이것 때문에 몸의 수분이 빠르게 빠져나가
몇 시간 만에 탈수로 사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선 역시 콜레라의 유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콜레라를 괴질이라고 불렀으며
1821년 조선의 왕이 순조일 때 크게 유행해
수십만 명이나 사망했다고 합니다

콜레라의 치사율은 치료하지 않을 경우 50%나 되는데
당시에는 콜레라에 대한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걸렸다 하면 둘 중 한 명은 사망하게 되는
굉장히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832년 스코틀랜드의 의사 토마스 라타가
콜레라 환자를 치료하던 중
이들은 수분을 빠르게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분을 보충하는 것이 콜레라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토마스 라타는
어떤 식으로 보충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농도를 가진 두 개의 용액이 있을 때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수분이 이동하는 현상을
삼투 현상이라고 합니다

콜레라에 의해 구토나 설사가 나와서 몸의 수분이 부족해지면
혈액의 농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이때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평범한 물을 주입한다면
혈액과 농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삼투 현상이 빠르게 일어나
혈액 속의 적혈구가 터져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체액과 같은 농도의 물을 넣어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물과 나트륨이 합쳐진 식염수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식염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토마스 라타는 물과 나트륨을 합친 용액을 직접 만들어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사용한 방법은
항문을 통해 대장에 용액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몸이 알아서 수분을 흡수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방법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가 다음에 사용한 방법은
혈관에 직접 용액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병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수액이라는 치료 방법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방법은 누구도 시도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가 보장되지도 않았고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토마스 라타는 용기를 냈고 나이가 많은 콜레라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환자에게 다른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라타는 그녀의 혈관에 용액을 주입했고
상태를 지켜봤습니다


30분 정도 흐르자 환자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창백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손발이 따뜻해지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콜레라에 의해 사망 직전에 있던 환자가
단 30분 만에 되살아난 것이죠

혈관에 직접 용액을 넣는 수액이 처음 시도되고
처음 성공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토마스 라타의 이런 치료법은 꽤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인류는 콜레라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물과 나트륨의 완벽한 비율을 찾지 못해
결국 사용되지 못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83년 영국의 의사 시드니 링거에 의해
식염수를 만드는 비율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1930년 미국의 의사 알렉시스 하트만에 의해 발전되어
여러 상황에 사용하는 지금의 수액이 만들어졌습니다

수액은 토마스 라타 혼자서 만들었다고 할 순 없지만
그의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콜레라는 치사율 50%를 기록하던 끔찍한 병에서
수액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가벼운 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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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미라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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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를 만드는 방법

어떤 처리를 해서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시신을
미라라고 합니다

흔히 고대 이집트에서 만든
붕대가 감겨있는 시신을 떠올리곤 하죠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때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있어야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했습니다

https://youtu.be/R5uGeYfIpNg


사람이 죽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소화 효소가
죽은 세포를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시작으로 시신이 부패되기 때문에
부패를 막기 위해선 뇌를 포함해
몸속에 있는 모든 장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뇌는 현대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뇌를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기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라를 만들 때 가장 먼저 뇌를 제거했습니다

이때 대못이나 꼬챙이 같은 것을 코에 집어넣어
머릿속을 휘저어 뇌를 으깨 액체로 만든 뒤
다시 코로 빼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부패를 막기 위해 두개골에 송진을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기 위해선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에게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심장과 깃털의 무게를 비교했는데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부활하지 못하고

착한 짓을 많이 해서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장을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생각했죠

 


뇌를 제거한 뒤에는 옆구리를 살짝 갈라
몸속에 있는 장기를 꺼냈는데
이때 심장은 다른 장기보다 더 소중하게 다뤘습니다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 임세티
늑대의 머리를 하고 있는 두아무테프
개코원숭이의 머리를 하고 있는 하피
매의 머리를 하고 있는 케베세누에프입니다


이집트인들은 꺼낸 장기를 나트론이라고 불리는
탄산수소나트륨과 함께 이들의 머리가 조각된 단지에 넣어 보관했는데

간은 임세티의 단지에 위는 두아무테프의 단지에
폐는 하피의 단지에 장은 케베세누에프의 단지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장기가 보관된 네 개의 단지를
카노푸스의 단지라고 부릅니다

심장은 심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장기였기 때문에
피를 제거한 뒤 다시 몸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트론을 몸속에 채워 넣었으며
다시 한번 나트론을 이용해 시신을 완전히 덮어버렸습니다

나트론은 알칼리성 물질로 몸속에 남아있는 박테리아를 죽이고
피부의 수분을 빼앗아 피부를 건조하고 딱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시신은 나트론속에서 35일~40일정도 건조했으며
건조가 끝난 뒤에는 비어있는 곳에 톱밥이나 천을 넣어 몸의 형태를 유지시킨 뒤
시신이 부패되지 않게 향나무 오일을 발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신에 붕대를 감은 뒤
나무로 만든 관이나 돌로 만든 관에 넣으면
미라를 만드는 작업이 끝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파라오나 계급이 높은 사람만 이런 과정을 거쳤고

평범한 사람들은 특수한 약품을 넣어 장기를 모두 녹인 뒤
붕대를 감는 식으로 처리 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미라로 만든다고 해서 부활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것이 굉장히 바보 같은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이 시신을 미라로 만든 덕분에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어
부검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왜 죽었는지
전염병이 있었는지 같은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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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전국민을 상대로 직접 벌인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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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직접 벌인 전국민 사기극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북한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
이른바 민통선 근처에 있는 북한강에는
평화의 댐이라는 이름을 가진 댐이 하나 있습니다

평화의 댐은 1987년 만들어지기 시작해 2005년에 완공된 댐으로
지금은 북한강의 수위를 조절해
강원도에 많은 비가 왔을 때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서울이 물바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86년 북한에서는 북한강 상류에
거대한 댐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 댐을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댐이라고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금강산댐을 조사해 본 결과
댐이 완성될 경우 최대 200억 톤의 물이
저장될 수 있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0억 톤이라고 하면 쉽게 가늠이 안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댐인 소양강댐이 29억 톤인 것과 비교해 보면
어마어마한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드는 이유는
200억 톤의 물을 저장한 뒤 한 번에 방류시켜
우리나라 특히 서울을 물로 공격하는
수공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자료에 따르면
200억 톤의 물이 서울로 오면 저층 아파트는 쉽게 잠길 것이고
국회의사당은 물론 고층 빌딩도 물에 잠겨
수도권에 사는 1500만 국민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1986년 10월 30일 당시 건설부 장관이었던 이규효는
이런 자료를 공개함과 동시에 국가적 위기 사태임을 강조했고

여러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금강산댐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관련된 자료들이 하루 종일 뉴스에 나왔기 때문에
온 나라가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이 확정되었었기 때문에
북한이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댐을 건설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986년 11월 26일
금강산댐 맞은편에 커다란 댐을 만들어
북한의 수공을 막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댐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전국민을 상대로 성금을 걷었죠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강제적으로 성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기업은 물론 죄수들도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성금을 냈습니다


이런 내용이 TV로 방영됐고
전문가들의 토론도 이어졌기 때문에
성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만 600억 원 정도
여기에 세금을 합쳐 1700억 원으로 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평화의 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댐은 정부가 사람들을 상대로 벌인
사기극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을 뽑는 투표를 할 때
우리가 직접 대통령에 적합한 사람을 뽑습니다
이것을 직접 투표라고 하죠

반대로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을 뽑을 대리인을 뽑아
대리인이 대통령을 뽑는 것을
간접 투표라고 합니다


전두환은 두 번의 간접 투표로 11대, 12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각각 99.4%, 90.11%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었습니다

이것은 국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있던 투표였기 때문이죠



전두환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약 8년의 재임 기간 동안 독재정치를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대통령 직선제(직접 투표)를 요구했습니다

특히 1986년에 이 요구가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전두환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고
이것을 위해 북한의 금강산댐을 이용한 것입니다

1993년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금강산댐의 최대 저수 용량은 60억 톤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전두환은 이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200억 톤이라고 일부러 과장해서 말했던 것이죠

 


북한이 수공을 위해 금강산댐을 만들었다는 것도
200억 톤의 물이 서울로 온다는 것도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말했던 것도
각종 자료들도

여론을 돌리기 위해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2003년에 밝혀진 것에 따르면
금강산댐의 최대 용량은 200억도 60억도 아니라
26억 톤이라고 합니다

당시 북한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이렇게 큰 댐을 만들 수 없었음에도
언론 장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강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이런 사기극이 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의 댐 사건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7년 6월에 있었던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이처럼 여론이 좋지 않을 때, 정권에 위기가 닥쳤을 때
북한을 이용하는 전략을 북풍이라고 합니다

 


북풍은 실제로 많이 사용하는 전략인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어 있고
언론을 통제하기 쉬웠던 과거에 더 큰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에도 북풍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전만큼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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