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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눈은 옆에 있는데 어떻게 앞을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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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는 걸까?

물론 신체 기관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은 없지만

눈은 정말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무슨 행동을 하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을 이겨낸

시각 장애인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을수도 있겠네요

 

 

사람은 정면을 보고 있는 두개의 눈이 있습니다

그런 덕분에 입체감을 느낄 수 있고 거리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을 한쪽 감은 상태에서 물건을 집으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죠

 

눈이 없다면 다가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생물이 두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고기 역시 두개의 눈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이들의 눈은 사람처럼 정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 옆에 달려 있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을 바라보지 않으니 앞을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한데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걸 보면

앞을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고기는 어떻게 앞을 보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물고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종류의 물고기의 눈은 옆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들의 눈은 조금 튀어나와있는 덕분에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옆이나 뒤를 보기 위해선 몸을 돌려야 합니다

 

눈동자를 돌리는 것으론 한계가 있죠

 

하지만 물고기의 눈은 튀어나와있는 덕분에

몸을 돌리지 않아도 앞, 뒤, 위, 아래를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의 바로 뒤쪽이 아니라면

모든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눈이 이렇게 발달된 이유는 생존 때문이었습니다

 

물고기는 그렇게 강한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노리는 천적들의 존재를 빨리 파악해야 했습니다

 

물 속은 물론 물 밖의 상황도 중요했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면

멀리서 오는 천적을 빨리 보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찾을 때도 도움이 됩니다

 

사람처럼 두개의 눈이 정면을 바라보는 것보다

옆에 달려있는 것이 물고기의 생존확률을 높혀줬기 때문에

이들의 눈은 이렇게 진화한 것이죠

 

물고기의 시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확한 검사를 할 수 없겠지만

0.15정도의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물고기는 동체시력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

먹이를 한번 포착하게 되면

빠르게 움직이는 먹이라도 끝까지 쫓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은 물고기라도 넙치와 가자미처럼 눈이 한쪽에 몰려있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새끼는 다른 물고기처럼 눈이 양 옆에 붙어있지만

자라면서 점점 한쪽으로 몰린다고 하네요

 

가자미는 오른쪽으로 몰리고

넙치는 왼쪽으로 몰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것이 100%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넙치와 가자미는 바닥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래쪽은 보지 않고 위쪽만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런 물고기의 독특한 시야를 이용해서

어안렌즈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어안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동그랗게 보인다고 하네요

 

물론 진짜 물고기는 세상을 이렇게 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고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의 눈이 옆에 있는 이유는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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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모양은 왜 육각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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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이 육각형인 이유

저는 곤충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벌은 꽤 친근한 곤충이긴 하네요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서 벌을 키웠었는데

어릴때부터 자주 접했던 곤충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서운건 여전하죠

할머니 댁에 갔을 때 벌에 쏘인적도 꽤 많이 있고

공격을 한다는 점 때문에 마냥 귀엽게 느껴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벌중에서 꿀벌은 꿀을 만들어내는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이 만든 꿀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대중매체나 애니메이션 같은 곳에서 꿀벌은 항상 친근한 존재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벌은 꽃에 있는 꿀을 삼켜 보관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뱉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꿀은 꽃의 꿀과 벌의 침이 합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벌은 무리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집에 많은 벌들이 같이 살고 있죠

 

벌집에는 방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방하나에 벌 하나가 사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사람처럼 내집마련에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벌집의 모양은 특이하게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벌집은 왜 육각형일까요?

 

벌집의 주 역할은 벌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역시 꿀을 보관하는데 있습니다

 

지구에는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벌집을 층층히 쌓으면

위쪽에서 누르는 힘 때문에 아래쪽에 있는 방이 버티질 못합니다

게다가 위쪽에 꿀을 보관해버리면 그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죠

 

부실공사가 있어선 안됩니다

 

그리고 많은 벌들이 함께 살기 때문에 방이 많이 필요합니다

공간을 최소화 해야합니다

 

어떤 면적에 빈공간 없이 방을 만들려면

인접한 꼭지점의 합이 360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방의 모양을 삼각형, 사각형, 육각형 중 하나로 만들어야 하죠

 

삼각형 방은 튼튼하게 지을 수 있긴 하지만

위쪽이 좁기 때문에 방 하나에 많은 꿀을 보관할 수 없습니다

집 구조때문에 벌이 드나들기 불편하죠

 

사각형 방은 삼각형보다 많은 꿀을 보관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튼튼함이 보장되지 못합니다

충격에 아주 약하기 때문이죠

 

벌집의 모양이 육각형이라면 가장튼튼한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면적도 넓기 때문에 많은 꿀을 보관할 수 있고

벌이 드나들기에 불편함도 없습니다

 

그래서 벌집은 육각형 모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육각형 모양이 층층이 쌓여 있으면

위에서 누르는 힘에 대해 버티는 능력이 상당해집니다

이런 구조를 벌집구조 혹은 허니콤이라고 하는데

 

많은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만들 때

허니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곳에서 쓰이는 허니콤이기 때문에 벌집이 얼마나 튼튼한지는

굳이 실험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KTX는 아주 빠르게 달리기 때문에

불의의 사고에 의해 부딪치게 된다면 기관사는 물론 승객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혹시 사고가 났을 때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앞쪽에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를 만들어 놨는데

이 장치에 허니콤을 사용한 덕분에 충격 에너지를 80%까지 흡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허니콤이 아니라 킹니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네요

 

과거에는 벌들이 육각형 집의 장점을 모두 알고

육각형 집을 지었다고 생각해 많은 찬사를 보냈지만

연구를 통해 벌집은 처음에 육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꿀벌의 몸에서는 밀랍이라는 물질이 나오는데

이들은 밀랍을 이용해 집을 만들어냅니다

 

밀랍을 이용해 벌집을 만들 때 처음에는 원형으로 만들어내지만

벌의 체온에 의해 밀랍이 녹아 끈적한 액체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육각형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비눗방울이 하나만 있을 땐 원형이지만

여러개가 모이면 육각형 모양이 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을 표면장력의 원리라고 하는데

거품을 내서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할 때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고

탄산 음료를 컵에 따라 마시면 올라오는 거품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을 만들면서 밀키스를 따라 마셨는데

처음에는 거품이 원형이었지만 거품이 많아지더니 육각형 모양이 되더군요

너무 신기했습니다

 

영국의 한 연구진은 벌집의 모양을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벌이 벌집을 새롭게 만들고 있을 때 연기를 뿜어 벌들을 내쫓은 뒤

벌집 내부를 봤는데

놀랍게도 육각형이 아니라 원형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벌의 언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만들었는데 저절로 육각형이 된 것인지

이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원형으로 만든 뒤 육각형이 되게끔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충매화를 통해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

꿀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

허니콤을 알게 해줬다는 점 때문에

고마운 곤충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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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이들은 왜 상복을 두고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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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1년 vs 3년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고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를 역사로 배우겠죠

 

그럼 그들도 지금 우리처럼 똑같이 생각할까요?

이사람들은 왜 이런걸로 싸웠지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변화고

어떤 사고방식이 맞다고 할 수 없으니 분명 미래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 세상을 떠난다는 건 정말 슬픈일인 것 같습니다

영원히 살고싶지만 우리는 생명체이고 노화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죠

 

이 슬픈 감정을 달래고 그들을 잘 보내주기 위해

장례식을 치룹니다

 

우리나라에선 장례식을 3일동안 치루는데

이것을 삼일장이라고 하죠

 

삼일장은 정해진 규칙이나 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이나 사정 혹은 사고방식에 따라서 장례식을 하루만 할 수도

이틀동안 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장례식은 아주 중요한 의식중 하나였습니다

예의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을 치루는 것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죠

 

49재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번 7주동안 장례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으며

횟수로 3년동안 장례를 치루는 삼년상이 있기도 합니다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는 복장도 신경써야합니다

이때 입는 옷을 상복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때는 지금보다 예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덕분에 장례식을 치루는 것도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죠

 

조선 18대 왕인 현종 때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죠

 

효종의 장례식을 치뤄야 하는데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로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됐습니다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하죠

 

 

예송논쟁은 총 두번 있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은 기해년인 1659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1차 예송논쟁을 기해예송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1차 예송논쟁에서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로서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가 논쟁거리였습니다

 

참고로 자의대비는 인조의 두번째 아내로

장렬왕후로 불리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관(성인식)혼(결혼)상(장례식)제(제사)에 대한 예의는

일반 평민과 사대부는 주자가례를 왕실은 국조오례의를 따랐습니다

 

주자가례와 죽조오례의는 의례에 대한 예절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이런 논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조, 자의대비, 효종의 관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자리는 첫번째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인조의 첫번째 아들은 소현세자였기 때문에 인조 이후에는 소현세자가 왕의 자리를 물려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 받아야 했지만

인조는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줍니다

 

이후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효종의 장례식을 치뤄야 하는 과정에서

국조오례의를 찾아봤지만 두번째 아들이 왕에 올랐을 때는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것이 쓰여있지 않았습니다

하필 두번째 아들이 왕이 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죠

 

사대부의 주장은 두가지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왕도 사대부와 똑같기 때문에 주자가례에 따라 상복을 1년만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과

비록 두번째 아들이지만 왕권을 물려받았으니 특별 대우를 해서 국조오례의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상복을 3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었죠

그런데 서인의 주장은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왕과 사대부가 똑같다고 말하면 왕권을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첫번째 아들이 아니라 두번째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효종은 진짜 왕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죠

 

이들의 말은 '진짜 왕은 효종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이다'로 해석되기 때문에

서인은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인은 말을 바꿨습니다

국조오례의에 보면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첫째 둘째 상관없이 아버지는 1년을 입으니

아들도 똑같이 1년을 입도록 하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서인들은 여전히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현종에게 서인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어쨌거나 효종은 현종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인들이 미울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서인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윤선도를 귀양보내고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만 입도록 지시했죠

 

이 당시 조선은 꽤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같은 외세의 침략으로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었죠

신분을 살 수 있는 공명첩이 발행되면서 돈만 있다면 평민도 양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선택할 정도로 예의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리학을 강조했죠

 

성리학이 강조된 시점에서 현종은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자의대비는 상복을 1년만 입게 된 것입니다

 

1차 예송논쟁은 현종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이 끝내고 현종은 사대부들에게 더이상 이것에 대해 논쟁할 것을 금지할 정도였죠

 

하지만 1674년에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2차 예송논쟁이 시작하게 됩니다

 

1차 예송논쟁처럼 자의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인선왕후의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인조의 아내는 자의대비는 인조의 두번째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어릴 수 밖에 없었죠

 

효종은 1619년생 인선왕후는 1618년생이지만

자의대비는 1624년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효종과 인성왕후가 세상을 떠나는 동안에도 살아있을 수 있었죠

 

서인과 남인의 주장은 이번에도 똑같았습니다

왕과 사대부는 똑같기 때문에 인선왕후도 두번째 며느리로 봐야하고

그런 이유로 자의대비의 상복은 9개월만 입어야 한다고 서인들은 말했습니다

 

남인은 여전히 왕은 특별하기 때문에 효종은 첫번째 아들로 봐도 무방하고

그런 이유로 자의대비의 상복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서인의 주장을 다시 살펴봅시다

1차 예송논쟁 때 이들은 역모의 오해가 있을까 국조오례의를 이용했습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첫째 둘째 구분없이 상복을 1년 입었으니

이번에도 역시 첫째 둘째 구분없이 상복을 1년 입어야 했습니다

 

서인들은 계속 체이부정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국조오례의를 따르게 되면 첫째 둘째 구분이 없어지니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체이부정은 첫째 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 왕권을 물려받았으니 정통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체이는 첫째아들을 말하는 것이고 부정은 아니다 라는 뜻이었죠

 

그래서 이들은 이번에는 국조오례의가 아닌 경국대전을 이용했습니다

 

현종은 1차 예송논쟁때는 국조오례의를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경국대전을 이용하니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하며

남인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그 결과 자의대비의 상복은 1년으로 결정났죠

그리고 체이부정을 주장했던 서인의 송시열을 귀양보내버립니다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기 때문에

이후에 남인들의 정치 참여도가 높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싸움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누구는 1년을 주장하고 누구는 3년을 주장하니

절반인 2년만 입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은 상복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략도 있었고

조선 인구의 100만명이 이상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경신 대기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안정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죠

 

그래서 이들은 성리학을 이용해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길 원했습니다

성리학에 따르면 개인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한다면 나라는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임금과 신하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어른과 아이사이에서

서로가 예의를 지키고 그들의 역할을 다 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성리학은 원칙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어쨌든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이 됐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인들은 이것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면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참고 참다가 상복 문제가 터졌을 때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돌려서 이야기한 것이죠

 

 

이 당시 조선은 서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서인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집단인데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있었죠

 

남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퇴계 이황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집단입니다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이기론으로 합쳐져 이야기 됩니다

 

이기론에서 이는 본질을 말하는 것이고 기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이와 이황은 본질과 형태에 대한 사상차이를 보이고 있었죠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를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이기이원로는 이와 기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효종을 예로 들어보면 효종의 이는 효종이 본질으로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둘째아들입니다

기는 효종의 현재 형태로 조선의 왕이 되겠죠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가 같다고 말하기 때문에 효종이 왕이라도 둘째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으니

사대부나 일반 평민들의 예의에 대해 적혀있는 주자가례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가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에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로 태어나긴 했지만

조선의 왕이기 때문에 첫째아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왕실의 예의에 대해 적혀있는 국조오례의를 이용한 것이죠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 이후

주도권을 계속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했죠

 

왕과 사대부가 같다고 말하면 왕의 권력을 사대부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역모의 위험이 있더라도 1차때는 1년을 2차때는 9개월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남인들은 소수만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주도권을 가지고 오길 원했죠

 

그래서 이들은 서인들과 반대 의견인

1차때는 3년 2차때는 1년을 말한 것입니다

 

어쨌든 현종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좋게 말해주는 남인들이 예뻐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때는 서인의 편을 들어줬지만 결과적으로 2차때 남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남인들은 정치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예송논쟁은 꽤 위험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왕의 정통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하지만 예송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법 평화적으로 해결된 왕의 정통성 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 재난인 경신 대기근때는 예송논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는 점 때문에

현재에 와서 제법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예송논쟁으로 조선의 정치가 한단계는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서인과 남인으로 이야기해서 어려울 수도 있지만

조선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인과 남인이 여당과 야당으로 바뀐 것 뿐이죠

 

하지만 자신들의 철학을 가지고 논쟁을 했던 과거와 달리

철학도 없이 서로 반대 의견만 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선시대 예송논쟁 이후로 정치가 한단계 발전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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