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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자리에 갑자기 점이 생기는 이유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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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자리에 점이 생기는 이유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점을 몇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신생아는 점이 없었다가 자라면서 점이 점점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인가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직접 보거나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등처럼 볼 수 없는 곳은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지

점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몸에 생기는 점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생기는 점의 경우

어디에 생기느냐에 따라서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 위치에 따라 눈물점, 미인점 등 이름도 여러가지로 나뉘어지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점이 생긴다면 레이저를 이용해 제거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곳에 점을 만들기 위해 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점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점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점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며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생기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생기는 점의 경우 부모님에게 물려받게 되는데

부모님과 비슷한 위치에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점도 유전이라니 놀랍네요

 

이런 점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점점 생겨난다고 합니다

(점이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없던 위치에 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후천적으로 생기는 점의 경우

가장 큰 원인은 자외선입니다

 

자외선은 1군 발암물질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우리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는 물질입니다

 

자외선은 면역체계를 손상시키고 피부를 노화시키며

피부암에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한 물질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멜라닌입니다

 

피부가 자외선에 노출되면 멜라닌이 분비되는데

멜라닌은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멜라닌의 색은 흑갈색이기 때문에

멜라닌이 많이 분비되면 피부의 색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햇빛을 많이 받으면 피부가 타 까맣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피부가 자외선에 노출 됐을 때

멜라닌이 한곳에 몰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때 계속 자외선을 받으면 세포가 자외선에 의해 변형이 일어나고

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멜라닌에 의해 생기는 점은 검은색이나 갈색 계열이지만

가끔 붉은색 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외부 요인에 의해 혈관이 터져 생기는 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긴 하지만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점은 우리 몸에서 빨갛게 점으로 자리를 잡아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생긴 점은 미관상 안좋을뿐 다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둬도 상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외선이나 외부 충격에 의해 생기는 점은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때로는 건강에 영향을 주는 흰색 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흰색 점은 멜라닌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점으로 백반증이라고 부릅니다

 

백반증은 주위가 가렵거나 따갑고

점점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제법 커다란 흰색 점이 생겼다면 병원을 가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의 까만색 점이었지만

어느날 이것이 점점 커지더니 피가 나오기도 하고

모양이 비대칭으로 변한다면

점이 악성 흑색종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악성 흑색종은 암으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꼭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점이 생길경우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손톱으로 긁거나 바늘로 긁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경우 흉터가 더 크게남아 점보다 더 안좋게 보일 수 있으니

점을 제거하고 싶다면 병원에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선천적으로 생기는 점의 경우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후천적으로 생기는 점의 경우 원인의 대부분이 자외선이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곳에 점이 생기는 것을 막고 싶다면

자외선 차단제를 잘 발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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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수능 과거시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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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상승의 기회 조선시대의 수능

시험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든

처음 보든 두번째 보든

 

그렇기 때문에 평소보다 실력이 더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의외로 실전에 강해 평소보다 실력이 더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험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수능이겠죠

 

그간 공부했던 것을 한번에 평가받고

이것으로 원했던 대학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시험이고 인생에 있어 커다란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줄여서 수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수능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93년입니다

수능은 그 해에 치뤄지지만 다음 해 대학 입학에 사용되기 때문에

이때 이름은 1994년도 수능이었습니다

 

수능 이전에도 시험을 통해 그동안의 노력을 평가했습니다

1981년에는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있었고

1968년에는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수능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시험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험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이전 국가인 조선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보지만

이때는 대학 입학이 아니라 관직을 얻기 위해 시험을 봤습니다

 

이 시험은 과목에 따라 인재를 선발한다고 해서

科(과목 과) 擧(들 거)

과거라고 불렀습니다

 

과거시험이 처음 시작된 것은 중국의 수나라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의 4대왕인 광종때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인 통일신라 원성왕때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있긴 했지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채용하는데 참고하는정도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본격적인 과거시험은 958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시험은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을 한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시대의 과거시험은 크게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구분됐습니다

 

製(지을 제) 述(펼 술)과는 문학적 재능을 보는 시험

明(밝을 명) 經(경서 경)과는 유교에 대한 이해도를 보는 시험

雜(섞일 잡)과는 기타 여러가지 능력을 보는 시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와 다르게 무관을 뽑는 무과는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16대 왕인 예종때 강예재를 설치하면서

무관을 뽑아 군사력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133년 문치주의를 중요시하던 문신들에 의해

강예재는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의 수능은 1년에 딱 한번만 실시됩니다

과거시험 역시 초반에는 한번만 실시 됐지만

이후에 여러가지 단계가 도입되면서

총 3번의 시험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향시, 감시, 예부시라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에 한번 치뤄지는 것이었지만

1년에 한번 치뤄지기도 했고 2년에 한번 치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날짜를 정해놓고 치루진 않았습니다

 

과거시험을 감독하던 감독관을 지공거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시험 감독 이외에도 시험을 채점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이 제법 큰 역할이었습니다

 

지공거가 관리하는 시험에서 합격한 수험생을 문생이라고 불렀는데

지공거와 문생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지공거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합격시키고 제자를 길렀습니다

자신이 합격시켰던 문생이 이후에 지공거가 되면

자신의 제자를 그 지공거가 합격시키고

지공거가 된 문생은 다시 제자를 기르고

문생은 지공거가 되고 그 제자를 또 합격시키는 부정부패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지공거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왕이 직접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관리하는 복시가 실시되기도 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는

과거 과거시험에 있었던 문제점을 하나 둘 고쳐나갔습니다

 

무관으 뽑기 위해 무과를 다시 개설하기도 했으며

1차 시험인 초시(향시)

2차 시험인 복시(회시)

3차 시험인 전시

총 3단계로 진행되는 과거삼층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때 전시는 왕이 직접 관리하는 시험으로

과거 지공거의 힘이 너무 커져 왕권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감독관을 여러명 두는 복수시관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고려시대와 다르게 지공거의 힘은 많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전국 8도에서 치뤄졌지만

2차 시험인 복시는 한양에서 치뤄졌습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양에 몰렸지만

복시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문과 33명 무과 28명 뿐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사람들이 과거시험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그러다보니 경쟁률이 2000:1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천인을 제외한 양인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통해 신분상승을 노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죠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지는데

소과는 200명을 뽑았고 대과는 33명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소과에 합격하기만 하더라도

양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법 많은 평민들이 소과에 합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게 되면 관직을 얻는것이 아주 어렵거나

낮은 직책을 받게 되지만

병역을 면제시켜주는 특권이 주어져서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시험을 준비하거나 치루는데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평민들이 과거시험을 보는 것은 마냥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보통 5살때부터 준비했는데

외워야 하는 한자의 개수가 너무 많기도 하고

과거시험 자체가 어려워서 30대 중반은 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평균적으로 30년 이상 공부를 해야 합격했던 것이죠

 

이때는 농경사회라 한명한명의 노동력이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가족중 한명이 농사가 아닌 공부를 한다면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한양에 가야했는데

이때는 자동차나 대중교통이 없었기 때문에

한양까지 가는데 많은 돈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시험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간 들였던 돈을 또 들여야 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 시험에 도전했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과거시험에 많이 도전했습니다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죠

 

평민들이 합격하는 비율도 제법 높았습니다

어쩔때는 합격률이 50%가 넘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낮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 관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관직이 주어지더라도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출신 학교에 따라 승진을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것이죠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3년에 한번이 원칙이었지만 비정기적으로 특별 시험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한번 탈락한 사람들이 특별 시험을 노리기 위해

서울에 눌러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지금처럼 절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시험을 봤던 사람이

예상 문제를 만들어 기출문제집을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집을 초집이라고 불렀는데

수험생들이 유교 경서를 공부하지 않고

초집에만 너무 의지해 큰일이라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학교 공부는 소홀히 하고 학원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죠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현수막을 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방방의식이라는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방방의식은 나라에서 직접 열어주는 경우도 있었으며

마을 단위로 축하파티를 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섯명의 아들이 과거시험에 모두 합격하면

축하의 의미로 부모에게 벼슬을 내리고 재물을 주는

오자등과가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당시에는 과거시험이 아니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시험에 도전했고

합격하기 위해 여러가지 부정행위를 사용했습니다

 

옆사람의 답안지를 베끼거나(고반)

의견을 나눠 답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고(설화)

시험장에 다른사람이 대신 들어오거나(입문유린)

이름을 바꿔 제출하기도 했고(절과)

서로 암호를 정해 정답을 말해주는 방법이나(음아)

밖에 있는 사람에게 답안지를 전달받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외장서입)

 

이런 행위는 기본적으로 감독관을 매수하고 진행됐기 때문에(혁제)

 

들켜도 그냥 넘어가기도 했으며

대놓고 부정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커닝 페이퍼가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종이에 글을 써 돌돌말아 콧구멍 속에 숨겨 들어오거나(의영고)

붓 속에 숨겨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협서)

 

중국에서도 과거시험을 치룰 때 부정행위가 판을 쳤다고 합니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독방에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바꿨더니

속옷을 커닝 페이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협대)

 

지금은 전자기기를 이용하는 부정행위가 많이 일어나긴 하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나 봅니다

 

수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뤄지기 때문에

점심에 밥을 먹기 위해선 도시락을 챙겨가야 합니다

 

과거시험 역시 긴 시간동안 치뤄졌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 도시락을 챙겨가야 했는데

주로 닭고기와 과일을 많이 싸갔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외부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비라도 오게 되면 시험이 중단되었는데

이때는 비가 그칠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변이나 대변을 보기 위해선

개인 요강을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능은 정답이 정해져있는 객관식이나 주관식으로 출제되지만

과거시험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논술 형태였습니다

 

조선의 과거시험 문제를 몇가지 소개해보겠습니다

 

태종 - 올바른 신하를 얻기 위한 방법은?

세종 - 효율적인 인재 양성 방법은?

성종 - 흉년 대비책은 무엇인가

연산군 - 오랑캐 제어 방법은?

 

이런 것처럼 현실적인 상황을 묻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조 - 최신 유행하는 음악에 관하여 논하라

중종 - 술의 폐해를 논하라

광해군 -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것처럼 감성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신분에 상관없이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만

그 덕분에 유교 이외에 다른 학문은 쓸모 없는 것처럼 여겨져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은 판단할 수 있지만

인성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악인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관의 경우 이론은 잘 알지만

실전에서 학문을 응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시험이 정말 유능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수단인가? 하는 의문이 있기도 했습니다

 

토익 점수는 높지만 외국인과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죠

 

시간이 흘러 근대화의 바람이 불자

조선에서도 뒤늦게 유교 이외에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실용적인 과학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4년 갑오개혁때 과거시험은 폐지되었고

새로운 방법으로 관리를 뽑는 선거조례나 전고국조례가 시행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인재를 선발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수능,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등

과거시험과 비슷한 방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 한번의 시험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평가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단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과거의 과거시험처럼 노력만으로 성공을 보장한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이것이 가장 공정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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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건물 앞에는 왜 조형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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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에 조형물이 있는 이유

길을 걷다보면 꽤 많은 조형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예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지만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있습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잘 만들어진 작품들은 때로는 그 동네의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관광지에 멋진 조형물을 만들어놓기도 하죠

 

관광지 말고도 건물 앞에 조형물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물 앞에는 왜 조형물이 있는 것일까요?

 

 

건물 앞에 조형물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림이나 다른 예술작품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통틀어 미술작품이라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건물 앞에 미술작품이 있는 이유는

이것이 법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 제1항은

건축물에 대한 미술작품 설치 의무와 관련된 법입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종류 또는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건축하려는 자는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화ㆍ조각ㆍ공예 등 미술작품의 설치에 사용하여야 한다

 

이때 정해진 규모는 연면적이 1만 제곱미터 이상인 건물인데

연면적이란 각 층 바닥 면적을 합한 총면적을 말합니다

 

만약 5층짜리 건물을 짓는데 1층부터 5층까지 바닥을 합한 면적이 1만 제곱미터가 넘으면

건물 앞에 미술작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것이죠

 

이때 영향을 받는 건물은

공동주택, 제1종 근린생활시설, 공연장, 판매시설
운수시설, 병원, 업무시설, 숙박시설, 위락시설(유흥), 방송통신시설입니다

 

영향을 받지 않는 건물을 찾는 것이 더 빠를정도로

거의 모든 건물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작품에 투자해야 하는 비용도 정해져 있습니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 제3항에 보면

미술작품의 설치 또는 문화예술진흥기금에 출연하는 금액은

건축비용의 100분의 1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100억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면

약 1억원을 미술작품에 투자해야하는 것이죠

 

이 법은 1972년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는 미술작품 설치를 권장하는 정도였지만

1995년 법이 개정되면서

권장이 아닌 의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때 설치하는 작품은 꼭 조형물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조각, 공예, 사진, 서예, 벽화, 미디어아트, 분수대 등등

미술작품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평가를 받은 뒤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건물 앞에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건물 앞에는 커다란 그림이 설치되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 법은 이름을 알리거나 작품을 소개할 공간이 적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시민들이 미술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고

칙칙한 거리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좋은 작품이 만들어져

거리의 수준을 높혀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하나 둘 비리가 생기게 되었고

이름 있는 일부 작가들이 기회를 독점하거나

인맥으로 기회를 받아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으며

의도를 전혀 모르겠는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건물주 입장에선 원치 않는 작품을 억지로 만들어야 했고

그 덕분에 관리를 잘 하지 않아

낙서가 생기거나 녹이 슬게 돼

거리에 활기를 불어 넣기는 커녕 거리의 흉물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 법이 개정 돼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대신 설치 비용의 70%를

한국 문화예술 위원회에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납부된 돈은 문화예술과 관련된 공적 사업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9년 8월 말 기준 약 80억원이 납부되었지만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도 많이 있지만

연간 1000억원이 넘는 돈이 미술작품에 투자되고 있어

예술 시장이 한번에 무너질 수 있는 우려 때문에 법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길을 걸으며 보는 작품중 일부는

법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관리도 잘 하지 않고 낙서가 생겨도 그대로 두는 것이겠죠

마치 버린 자식의 느낌이니까요

 

문화생활을 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것에 시간을 투자하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리를 걸으며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회고

고마운 일입니다

 

부디 법이 좋은 방향으로 개정 돼

특정 인물만 배불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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