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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인공처럼 링거를 그냥 뽑아도 괜찮을까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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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뽑아도 괜찮을까

크게 다쳐 정신을 잃은 뒤
병원에서 깨어난 우리의 주인공

때마침 간호사가 등장해
벌써 움직이시면 안 돼요 라고 말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요 라고 말하며

팔에 꼽혀있던 링거를 뽑고
병원 밖으로 나갑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팔에 꼽혀 있는 링거를 그냥 뽑아도 괜찮을까요
https://youtu.be/nYq7w8bNOM0


병원에 입원해 큰 수술을 하거나
갑자기 쓰러져 영양을 급하게 보충해야 할 때
링거를 맞곤 합니다

이때 들어가는 약물을 수액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링거가 수액의 한 종류이며
수액에는 링거 말고도
생리식염수나 포도당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수액에 대해선 다음번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에 가면 수액을 맞는 이유는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으로 먹는 것보다 빠르게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경우
보통 정맥에 수액을 주사하게 됩니다



주사를 놓을 자리를 잘 소독한 뒤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러 넣습니다

이때 바늘에는 수액을 직접적으로 넣어줄 얇은 관이 있는데
이것을 카테터라고 합니다

바늘이 혈관에 들어가면 피가 살짝 나오는데
이것을 확인한 후 카테터를 혈관에 삽입합니다

 


수액을 맞을 때 바늘이 계속 꼽혀 있을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물론 저도 그랬고요

카테터가 들어가면
바늘은 다시 빼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테터와 수액을 연결하면
수액을 맞을 준비가 끝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링거를 뽑는 장면이 나오는 건
혈관에 연결되어 있는 카테터를 뽑는 것입니다

보통은 병원에서 카테터를 뽑아줄 때
거즈로 누른 뒤 살살 뽑아냅니다

그리고 지혈을 위해 2~3분 정도 꾹 누르고 있으라고 하죠

피가 어느 정도 멈추면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밴드를 붙입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카테터를 힘으로 뽑아내면
지혈이 되지 않으니 피가 날 수 있습니다

급하게 뽑느라 카테터를 잘못된 방향으로 뽑는다면
피부가 찢어지거나 혈관에 상처가 날 수도 있습니다

수액을 맞고 있다는 것은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인데
이때 피를 흘리면 꽤나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또 뚫린 구멍은 정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기 중에 있는 세균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지름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차 감염의 위험이 있을 수 있죠

영화나 드라마에선 카테터를 뽑고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달려나가는데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장면인 것입니다

 


단지 이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해야 할 더 큰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장된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카테터를 뽑는 장면이 멋있어 보여도
절대 따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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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멸망해버린 세계 최고의 도시 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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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 도시의 멸망

한순간에 멸망해버린 세계 최고의 도시 바그다드

이라크라고 하면 전쟁, IS, 테러처럼
부정적인 단어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죠

하지만 과거에는 이라크가 위치한 중동 지역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특히 750년부터 아바스 왕조가 다스리던 도시인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다른 도시들과 교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땅이 비옥했기 때문에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고
여름에 비교적 시원해 다른 지역에 비해 해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사람이 살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슬람권에서 최고 지도자를 칼리파(칼리프)라고 부르는데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바그다드는 문화, 예술,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인구 100만 명을 넘긴 세계 최초의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이슬람의 황금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교류를 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들렸고
바그다드는 계속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력은 점점 커졌고
중동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당나라가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과 당나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가장 잘나가는 이슬람 세력을 막을 수 없었고
751년 탈라스 강 근처에서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죠

 


이때 당나라 포로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는데
이슬람은 이들로부터 종이 만드는 기술을 배워
수많은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보관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7대 칼리파인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이라는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곳 덕분에 바그다드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혜의 집에는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의 책들도 있었는데
이후 이곳에서 보관된 책이 다시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그다드 역시 전성기를 영원히 가져가지 못했고
10세기부터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바스 왕조가 힘을 잃고 있는 것임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슬람의 상징적인 도시인 것은 여전했죠

 


이때 중앙아시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 제국과 대립하던 당나라가 멸망했고 송나라와 금나라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1189년 보르지긴 테무진을 중심으로
몽골이라는 나라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서는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는데
보르지긴 테무진은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우주의 군주라는 뜻을 가진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 칭호가 바로 칭기즈이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칭기즈 칸입니다



몽골은 칭기즈 칸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습니다

송나라와 금나라는 물론
인접한 나라까지 정복했는데
칭기즈 칸은 전 세계를 통틀어
땅을 가장 많이 넓힌 군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죽은 뒤에도 몽골은 세력을 넓혀나갔는데
1257년 칭기즈 칸의 손자인 훌라구가 중동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도착합니다

 


당시 칼리파는 알 무스타심이었는데
훌라구는 알 무스타심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알 무스타심에게 있어 몽골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긴 했지만
이제 막 세력을 넓혀가는 하룻강아지 정도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몽골 제국이 탄생한 것은 1206년
약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생아 국가였기 때문이죠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750년
약 500년 정도로 몽골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바그다드 군인들은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았지만
자신은 이슬람 세력의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고
일명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든든한 아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몽골군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알 무스타심은 훌라구의 항복 요구를 무시했고
오히려 그들을 도발했습니다



1258년 1월 29일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은 바그다드를 공격하게 됩니다

알 무스타심은 주변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몰락해가는 아바스 왕조였기 때문에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알 무스타심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당시 바그다드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마저도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몽골의 병력은 약 12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바그다드는 당시 최고의 도시였지만
최고의 군대를 가진 몽골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숫자상으로 바그다드를 압도했고
병력의 질도 차이가 났습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세워진 궁전
수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을 포함해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이때 버려진 책들의 잉크 때문에
티그리스 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과학자, 예술인, 종교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도 학살했는데
이때 사망자는 20만에서 8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그다드군은 몽골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1258년 2월 10일

항복을 선언합니다

세계의 중심, 이슬람의 중심이었던 바그다드는
몽골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그 명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 500년 동안 이어진 왕조가
자만심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몽골군은 내친김에 이집트까지 정복하려 했지만
1260년 9월 3일에 열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이집트에게 패하며
중동 지역을 완전하게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바그다드는 멸망했고 이집트는 막아냈기 때문에
아인 잘르투 전투 이후 이슬람의 주도권은 이집트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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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이 누락 되자 일본에 군사기밀을 넘긴 현역 군인

 

뇌를 채워줄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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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이완용

1993년 6월 26일
당시 여의도 MBC 8층에 있었던 후지TV 서울지국을
검찰과 군수사기관이 압수수색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후지TV 서울지국장이었던
시노하라 마사토가 군수사기관에 연행되어 3일 동안 조사를 받는 일이 었었죠

시노하라는 군사기밀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었는데
조사 결과 1990년부터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자료를
일본대사관 공군무관인 후쿠아먀 가즈유키 대령과
육군무관 후쿠야마 다카시 대령에게 넘겨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시노하라가 이들에게 넘겨준 자료는
공군 레이더 탐지거리 도표
지대공미사일 위치 현황
일본의 군사적 역할론과 대비책
독도출격 대비태세 현황
서해안 해병대 병력배치 현황 같은 군사기밀 문서

주간 피아 심리전 활동
북한 일반 동향
일일 정보요약 같은 국방부 중요 정보들이었습니다



일본인이었던 그가 이런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현역 군인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사 결과 자료를 시노하라에게 넘겨준 사람은
당시 국방정보본부 소속이었던 고영철(해군) 소령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국방정보본부는 국방부 소속으로
1981년 군사정보, 군사보안과 관련된 것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즉 이곳은 국방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영철 소령은 1975년 임관되었고
1983년 8월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그는 1990년부터 군사기밀을 유출시켰는데

그의 동기들은 대부분이 중령이었던 것에 비해
자신은 계속 진급을 하지 못하자
전역을 한 뒤 일본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
자료를 유출시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시노하라 마사토는 세계의 군사 정보를 주로 취급하고 있는
일본의 군사 관련 잡지인 군사연구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때 자료를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원문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

시노하라가 이렇게 해준 덕분에 유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역 육군이 일본에 군사기밀을 준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3년 동안 문서가 유출되고 있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도 꽤나 충격적입니다

 


시노하라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택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는데
아직 군내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군사 2급 비밀도 있었다고 합니다

1991년 일본과 북한은 평양에서 회담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시노하라가 취재를 위해 북한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영철이 건네준 이런 자료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북한이나 다른 나라에도
넘겨줬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시노하라 마사토의 이름을 따 시노하라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1993년에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시노하라와 고영철은 징역 15년이 구형되었지만
1심에서 고영철은 징역 7년, 시노하라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 고영철은 징역 4년, 시노하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후 시노하라는 우리나라에서 추방되었으며
고영철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현대판 이완용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사람에게
고작 징역 4년이라니 한숨밖에 안 나오네요

 


4년 뒤 고영철은 출소했고 일본으로 넘어가
타쿠쇼쿠 대학 전임 연구원으로 취직한 뒤

한국, 북한, 일본 전문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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