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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때 콧물이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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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는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신체중 하나입니다

물론 숨을 입으로도 쉴수도 있지만

입으로 숨을 쉬면 목에 안좋다고 하죠

 

사람은 음식 없이는 30일

물 없이는 3일

산소 없이는 3분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소가 중요한만큼 코 역시 너무너무 중요한데

때로는 콧물때문에 중요한 산소를 잘 들이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거나 비염이 있다면 콧물이 자주 나오지만

가끔 음식을 먹을 때 콧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감기나 비염이 없어도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나오는 콧물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코를 이용해서 산소를 들이쉬고 이산화탄소를 내뱉습니다

이것을 호흡이라고 하는데 호흡은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자는 동안에도 하게 됩니다

 

콧물은 코 안에 있는 점막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평소에도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양이 적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공기에는 산소도 있지만 먼지나 여러가지 세균도 존재합니다

코를 이용해서 공기를 들이쉬면 코속에 있는 콧털과 콧물은

먼지와 세균을 폐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그리고 들이마신 산소의 온도를 인체의 온도와 비슷하게 만들어주죠

 

코에서 걸러진 이물질들은 콧물과 함께 합쳐지는데

이들은 굳어져 코딱지가 됩니다

 

콧물에는 염분, 담백질, 백혈구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콧물이나 코딱지를 먹으면 짠맛이 나는 이유가 염분이 있기 때문이죠

 

백혈구는 세균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평소라면 콧물은 흘러나오지 않지만

자극이 가해지거나 외부에서 세균이 많이 들어오면

백혈구를 이용해 세균을 죽이기 위해 콧물을 많이 분비시킵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콧물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맛은 혀에 있는 미각세포인 미뢰가 느끼는 것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맛은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감칠맛 총 다섯가지입니다

 

매운맛은 통각으로 미각세포가 아닌 통각세포가 느끼는 것입니다

 

매운맛은 통각 즉 통증입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혀가 얼얼하거나 아픈 이유가 매운맛은 통증이기 때문이죠

 

통증이라는 것은 어쨌든 우리 몸에는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 세포들이 노력하고

그 결과 콧물, 눈물, 땀이 나오는 것입니다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콧물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뜨거운 음식은 뜨거운 김이 나오기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뜨거운 공기에 의해 코 점막이 확대되고

뜨거운 공기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콧물이 분비되는 것이죠

 

겨울철에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콧물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겨울에는 밖의 온도가 집안의 온도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차가운 공기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콧물을 분비시킵니다

 

매운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닌데 콧물이 나온다면

미각성 비염을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미각을 전달하는 신경이 코 점막에 있는 신경과 연결이 되어 있어

음식을 먹으면 감각이 코에게도 전달돼고 코 점막을 자극해 콧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음식이 입천장의 신경을 자극했을 뿐이지만

코 신경은 음식이 코로 들어온 것으로 착각해 이것을 막기 위해 많은 콧물을 분비시키는 것이죠

 

이 현상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신경이 예민하다면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콧물이 나오면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경우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중요한 식사 자리거나 예의를 차려야 하는 식사 자리라면

흘러내리는 콧물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죠

 

그럴 때는 비강 분무제를 이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비염은 그냥 보기엔 그렇게 심각한 병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생존하는데 가장 필수인 호흡을 방해하기 때문에

비염이 걸린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음식을 먹는데 콧물이 자주 나오고 감기도 아닌데 코가 막힌다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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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겔만 효과로 보는 조별과제가 망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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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과제는 왜 항상 망하는 걸까(feat.보노보노 PPT)

조별과제

단어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가 나오려고 합니다

 

저는 대학교를 졸업한지도 꽤 됐고

회사도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라 조별과제나 팀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없습니다

 

애초에 누군가랑 같이 작업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의 상황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조별과제를 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전 언제나 혼자서 꽤 많은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꽤 많은 사람들과 조별과제를 했는데

한결같은 것이 탈주 닌자들이 꼭 한명씩은 존재하더군요

참 신기합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올라가면

꽤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수업이 아니라 강의라고 하며

선생님이 아니라 교수님이라고 하죠

 

그리고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과제를 해야합니다

 

강의 환경 역시 많이 다르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가던 때와 다르게

1교시가 없을 수도 있으며

너무 졸리거나 몸이 아프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강의에 빠져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점수는 나에게 뭐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강의 시간에 교수님들이 내주는 과제는 대부분 혼자서 진행해야 하는데

가끔씩 여럿이서 진행해야하는 조별과제가 있기도 합니다

 

조별과제는 두명이상이 조를 이루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든 뒤 발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4명~5명이 한 조가 되죠

 

누구는 자료조사를 하고 누구는 PPT를 만들고 누구는 발표를 합니다

분명 이렇게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역할을 분배했지만

 

우리의 조별과제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애초에 역할 분배부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표를 하거나 조장 역할을 하는 사람은 보통 나이가 많거나 선배가 하게됩니다

그리고 디자인과 학생이 있다면 PPT 담당을 하게 되고

나머지 조원들이 자료조사를 하게 됩니다

 

분명 능력에 따른 역할 분담이 아니라 속성에 따른 역할 분담입니다

이들중에는 디자인과지만 발표를 더 잘할수도

2학년이기에 PPT를 더 잘 만들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이후 상황은 극단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교양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수업에서만 보게 될 뿐

이후에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회의를 카톡으로 해버리는 바람에

조원이 지금 조별과제에 집중을 하고 있는지 나만 열심히 하고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카톡이 오거나 전화가 와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고

대학교의 1학기는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같은 조 사람이라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발표를 해야하는 상황인데 PPT가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가 생기거나

PPT를 만들어야 하는데 자료가 넘어오지 않은 경우

모든 걸 다 했지만 PPT가 엉망이거나 발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 등등

 

어떻게든 우리의 조별과제는 망하게 됩니다

마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죠

 

또 조별과제를 하다보면 어느순간 나 혼자모든걸 하고 있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학점을 잘 받아야 하거나

이번 강의가 절실한 사람들이 치킨게임에서 패배해

그 역할을 맡게 됩니다

 

조별과제가 망하는 이유는 링겔만 효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농업공학자 막스 링겔만은 말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리의 말이 마차를 끄는 힘이 100이라면

두마리의 말이 마차를 끄는 힘은 200이 되어야 하죠

 

하지만 연구 결과 두마리의 말이 마차를 끄는 힘은 200이 되지 않았고

이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될까 궁금해 사람에게도 실험을 합니다

 

한사람이 밧줄을 끄는 힘이 100이라고 하면

두사람이 밧줄을 끄는 힘이 200이 되어야 하지만

실험 결과 두사람이 밧줄을 끄는 힘은 186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두명이서 밧줄을 끌 때는 힘의 93%만 사용한 것이죠

 

세사람이 밧줄을 끌 때는 그 힘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힘은 300이 아니라 25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세명이서 밧줄을 끌 때는 힘의 85%만 사용했습니다

 

네명, 다섯명이 되어도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밧줄을 끄는 힘은 점점 줄어들었고

여덟명이 밧줄을 끌었지만 힘은 800이 아니라 392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힘의 49%, 절반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죠

 

여럿이서 공동 작업을 할 때

본인이 가진 능력을 100% 발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사회적 태만 혹은 링겔만 효과라고 합니다

 

링겔만 효과는 개인의 성과에 대해서 평가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더 극대화 됩니다

즉 조별과제의 상황이 링겔만 효과가 극대화되기 가장 좋은 상황인 것이죠

 

조별과제의 평가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른 조원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까지 안좋은 점수를 받게 됩니다

 

나만 열심히 하는 건 바보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다른사람이 열심히 할테니 굳이 내가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악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최근에는 이런 현상을 줄여보고자

조별과제를 개별적으로 평가하거나

PPT에 참여도를 적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잠수를 탄 사람들은 아예 이름을 빼버리기도 하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조별과제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수많은 조별과제를 했고 수많은 과제를 했습니다

아직까지 왜 조별과제를 해야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학생 때 조별과제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과제는 혼자서 해도 충분합니다

회사의 프로젝트와 다릅니다

 

조별과제는 단순히 교수님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라고밖에 결론을 내릴수가 없네요

 

조별과제를 하면 발표를 해야하기 때문에 수업시간을 꽤 많이 때울 수 있습니다

또 여러명의 학생을 한번에 평가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평가할 때보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은 대학교 1학년은 대학생활이
새로운 인간관계가 낯설고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서툰 이들에게 조별과제라는 무거운 짐을 주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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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

 

은근한 잡다한 지식(은잡지)에는 여러분들의 뇌를 채워줄 지식, 정보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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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2019년은 대한민국에게 꽤나 의미있는 해인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19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지 100주년이 된 해입니다

 

이번 영상을 제작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고작 1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렇게나 발전했구나

100년전에는 정말 힘들게 살았는데

그들이 있기에 100년 후 지금의 나는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구나

 

그리고 100년이 지나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등등

 

역사라는 것은 분명 학교다닐 땐 하품만 나오고 머리아픈 과목이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이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대한제국이 그 이전에는 조선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있을지도 모릅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역사적인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11일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은 3.1 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지난번에는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 29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역사가 끝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건을 말합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를 무단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해 시대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일본의 헌병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본 헌병은 치안 유지를 위해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결처분이란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 있으면

조사를 하지 않고 그 즉시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찰이 그냥 길을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너 범인인 것 같은데? 하면서 그냥 감옥에 가두는게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치활동이나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상황을 일본 헌병이 보게되면 그 즉시 제재를 가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선 해외로 나갈 필요가 있었고

만주(중국)와 연해주(러시아)쪽으로 많이 진출했습니다

 

만주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곤 했습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곳입니다

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상당히 많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봉오동 전투(홍범도)와 청산리 전투(김좌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중 한명인 이회영은

조선 최고의 부자 출신이었는데

재산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회영은 경술국치 이후에 집안의 재산을 급하게 처분했는데

이회영의 재산을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600억정도 된다고 합니다

명동일대가 전부 이회영 집안의 소유였다고 하네요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빠르게 처분했다는 점

그리고 처분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재산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의 재산은 600억 그 이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회영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오더라도 일본에게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쨌든 돈이 많다는 것은 큰 무기가 되니까요

 

하지만 이회영은 이것을 거절했고

안창하고 있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들어가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그 업적에 비해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현한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말할 때 절때 빠져서는 안되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세계에선 커다란 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은

러시아와 독일이 참전하면서 점점 커졌고

세계 여러나라가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뤘습니다

 

이것을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합니다

 

영국은 연합국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는데

과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연합국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연합국 소속이었든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란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가 결정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는 그들이 원한다면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실제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그냥 보기에 굉장히 좋은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 나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패전국인 동맹국 소속 나라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죠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 소속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가지를 처리하기 위해

동맹국과 연합국은 파리에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파리 강화 회의라고 합니다

 

파리 강화 회의역시 민족자결주의처럼 패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회의로

특히 독일을 많이 압박했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샤유 조약이 맺어지는데

조약의 내용이 독일에게 너무 가혹했던 탓인지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군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습니다

 

독립 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 소속인 김규식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 돼 조선의 독립을 교구 했습니다

 

1919년 2월 1일에는 만주에서 무오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도 했고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서가 발표 됐습니다

 

이 시기에 국내에선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의 사망 원인이 일본의 독살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과거 고종이 업적이 어떻든 한 나라의 왕이고 황제였기 때문에

단순한 소문일지라도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상황이 강제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어서 반일감정은 더욱 커질수밖에 없었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 곳곳에서 독립활동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시작됐으며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3.1 독립 선언서가 발표됩니다

 

3.1 독립 선언서는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919년이 기미년이기 때문에 기미 독립 선언서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하필 3월 1일에 만세 운동을 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을까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원래 3월 3일에 독립 선언서 발표와 만세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장례식과 겹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하려고 했지만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들이 꽤 많았습니다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으로 기독교 사람들은 교회에 가야했죠

 

그래서 하루 더 앞당겨 3월 1일에 만세 운동과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한 것이죠

 

원래 3.1 운동은 탑골공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자칫 폭력적인 시위가 될까바 걱정했던 민족대표는

장소를 일방적으로 태화관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겐 어떠한 통보도 하지 않은채 말이죠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뒤

자수를 하고 자진 체포됩니다

 

3.1 운동을 이렇게 싱겁게 끝내버리려고 했다는 점과

이후에 친일파로 변질된 사람이 있다는 점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명칭과 업적이 비판 받기도 합니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족대표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자발적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했습니다

 

3.1 운동은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3월 1일 단 하루만 한 것이 아니라 수개월동안 지속됐습니다

 

아무래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보니

만세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특히 제암리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최악의 만행중 한가지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뒤 무차별 사격과 함께 교회를 불태워버린 사건입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석호필이라고도 불리는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에 의해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34번째 민족대표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죠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을 향한 국제 여론은 안좋아졌습니다

 

원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사건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사건을 주도한 아리타 중위를 재판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징계는 고작 30일 근신처분이었고

살인, 방화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독립 선언서 발표와 3.1 운동으로

세계 여러나라들에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혹은 독립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고종 황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을 이끌어줄 조직적인 단체(정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상하이)에 모였고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라고 말하며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러시아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힘이 분산되어있으면 좋지 않다는 의견과

상해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미국, 프랑스같은 세계 강대국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하게 됩니다

 

상해는 조계지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죠

 

1919년 9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민국이 된 것입니다

 

미록 이것은 임시정부였지만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수립된 민주정부였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을 분리하는 삼권분립까지 하면서

민주주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해서

일제강점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말이죠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이 조금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언론사가 창간되기도 했고 조선을 지배하는 정책들이 완화되기도 했죠

 

그래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를 문화통치기간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진짜 대한민국의 역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던 때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던 때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를 말할 때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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