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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유행했었던 행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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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행운의 편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행운의 편지라는 것을 들어보거나
실제로 받아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작성해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경우 행운이 찾아오고
편지를 무시할 경우 불행이 찾아온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혹시나 진짜 불행이 찾아오진 않을까 해서
편지를 작성해 보내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행운의 편지는 서양에서는 19세기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400년대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이미
행운의 편지가 유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470년의 조선은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하게 들었던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농사가 잘 되는 것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가뭄이 드는 것은 나라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죠

조선의 왕이었던 성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기까지 했습니다(성종 1년 3월 29일)


하지만 가뭄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문제가 지속되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한 귀신이 하늘로부터 능성(전남 화순) 부잣집에 내려와
한 번에 밥 한 동이와 두붓국 반동이를 먹고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고 떠났다는 것이죠
(성종 1년 5월 26일)

"잘 먹었고
내가 보니까 이번달에는 비가 안오고
다음달에는 비가 올거야
근데 만약에 다음달에 비가 안오면
올해 농사는 망했다고 봐야지"

 


그리고 귀신은 임진년, 갑신년, 신유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올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도 덧붙였습니다

이 귀신은 입은 세개인데 머리는 하나만 있다고 해서
삼구일두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만약 귀신의 말대로 다음달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의욕이 많이 떨어질 것이고

해당 연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게 될 수 있으니

성종은 나라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 퍼트린자를 벌하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가뭄은 끝나지 않았고
삼구일두귀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상황속에서
비슷한 종류의 다른 소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남 보성 부잣집에 키는 한 길(3m)이 넘으며
몽두만 쓴 귀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한 말의 쌀로 밥을 지어 먹은 뒤 예언을 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몽두는 죄인의 얼굴을 덮어씌우던 물건인데
다른 옷은 입지 않고 몽두만 쓰고 있었다 하여
단피몽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은 머리가 하나에
상투가 일곱이라고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곧 내 동생도 내려올건데
걔가 오면 풍년이 들거야 걱정하지마"

라는 내용의 소문이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명나라 원광사에 3년전에 죽은 149살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의 혼이 와서

올해(1470년)에는 바람과 비가 몹시 심해
악한 사람은 다 죽을 것이고
올해와 내년에 전염병이 돌고 전쟁이 일어나
집은 있지만 사람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이고
아홉 여자가 한 지아비와 함께 살며
열 집이 한 마리의 소를 함께 부리며
집에는 연기가 끊어지고 곡식은 쌓아두고 먹을 것이 없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눈이 멀게 될 것이고
이 글을 베껴 다른 한 명에게 전하는 자는
자신이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두 명에게 전하는 자는
집안이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세 명에게 전하는 자는 평안함을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유행하는 행운의 편지처럼 말이죠

심지어 이 글은 요동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라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문을 낸 사람들이 붙잡혀
곤장을 맞고 노비가 되는 벌을 받으며 마무리 됐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 최초로 소문을 낸 것이 맞는지
냈다면 무슨 목적으로 낸 것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왕의 귀에 전달되기도 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그 당시 사람들도 행운의 편지 때문에
꽤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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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언제부터 3일 연휴였을까(설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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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언제부터 3일 쉬었던 걸까

과거 농사가 중요시되던 때
달마다 좋은 날을 선택해

풍년, 건강, 행복 같은 것들을 기원하며
가족 친척들과 모여 덕담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날을
명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은 설날, 대보름,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동지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돼
명절이라고 하면 설날과 추석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설날과 추석은 3일이라는 긴 연휴가 있기 때문에
명절의 의미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날은 도대체 언제부터 3일을 쉬었던 것일까요



보통 설날이라고 하면 음력 1월 1일을 말하는 것이며
설날 전날, 다음날까지 해서 총 3일의 연휴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특정 날짜를 명절로 지정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삼국시대의 정사가 기록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238년), 책계왕(287년)때
한 해의 첫 번째 달인 정월에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수나라의 정사가 기록된 수서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 아침에 잔치를 열고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명절에 대한 의미가 더 커지게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설날,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로 삼았습니다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이 휴일이었으며
설날에는 7일, 정월 대보름에는 3일
그리고 추석에는 하루를 쉬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쉬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쭉 이어져 내려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서서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태양력이 들어오게 되면서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1896년 양력 1월 1일로 바뀌게 되었고
설날은 2월달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면서
조선 역시 일본처럼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지정해 버렸습니다

광복 이후 음력설은 명절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양력설이 공식적인 설날로 지정되면서
설날 다음날, 다다음날까지 휴일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때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 탄생한 양력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휴일이 아니었음에도 음력설에 더 크게 차례를 지냈습니다

나라에서는 이중과세(설을 두 번 지냄)라고 하며
음력설을 지내지 못하게 탄압하던 때도 있었는데
1981년의 조사에 따르면 음력설을 지내는 국민이 81.8%나 됐다고 합니다

 


결국 1985년 정부는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고 부르며
하루만 쉴 수 있도록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사용되다가
1989년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며
음력설이 다시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이때부터 음력설이 3일 연휴로 바뀌었습니다

양력설은 1989년까지 3일 연휴였다가
1990년부터 이틀만 쉬는 것으로 바뀌었고
1999년 이후로 하루만 쉬는 것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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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으로 전 재산의 90%(약 20억)를 날린 천재 과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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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의 90%를 날린 천재 과학자 이야기

최근 재테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해서
좋은 종목에 들어가 수익을 얻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본인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업의 가치가 하락해
수익을 내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주식을 잘 하려면 차트를 분석하고
재무제표를 봐야 하고
책을 통해 공부를 해야 하고
코스피, 코스닥, PER, PBR, ROE, EPS 등등
여러 가지 용어도 알아야 하니

똑똑해야만 투자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천재 과학자라고 평가받던 사람도
전 재산의 90%를 주식으로 잃었다고 합니다


1711년 영국은 가지고 있는 국채를 해결하기 위해
무역 독점권이 있는 남해회사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남해회사는 노예를 수송해 남미에 판매하는 기업이었는데
회사는 무역 독점권을 가지는 조건으로
나라의 국채를 어느 정도 떠안게 됩니다

회사는 주식을 상장해 국채 소유자들에게 주식을 줬습니다

회사가 이익을 얻으면 주가가 올라가게 될 것이고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득을 볼 것이니
이것으로 국채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당시 남미는 스페인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어도 회사는 큰 이득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1718년에는 스페인과 영국이 전쟁을 하는 바람에
무역은 불가능한 수준에 다다르게 됐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만든 회사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남해회사는 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영국의 국채를 더 떠안는 대신
주식을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남해회사는
정부에서 밀어주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1720년 주당 100파운드로 시작한 남해회사의 주가는
순식간에 200, 300파운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매일 남해회사 이야기로 도배되었고
남해회사 주식이 없으면 바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사람들은 주식을 사기 위해 매일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남해회사 주식을 샀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는 1624년 영국에서 태어나
반사거울을 이용한 반사망원경을 만들었으며
오늘날 미분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명했고

떨어지는 사과에 영감을 받아 중력 법칙을 수식화 해냈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연금술사였던 이 인물은
바로 아이작 뉴턴입니다



뉴턴은 남해회사 주가가 비싸지 않을 때 주식을 매수해
두 배의 가격으로 팔아 큰 이득을 봤습니다

하지만 뉴턴이 남해회사 주식을 팔자마자
주가는 끝을 모르고 계속 올라갔고
남해회사를 계속 존버했던 다른 사람들은
더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너무 높아져 버린 가격 때문에 뉴턴은 매수를 망설였지만
눈뜨고 일어나면 부자가 되어 있는 옆집 사람들을 보며
달리는 열차에 다시 올라타게 됩니다

뉴턴이 올라탄 뒤에도 주가는 계속 올랐고
뉴턴의 입꼬리도 언제나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영국은 남해회사 주식 자체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남해회사의 방식을 모방하는 다른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 문에 남해회사의 주식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거품 방지법을 제정해
무허가 주식회사들을 단속했고
남해회사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스페인과 조약을 맺어 남미 무역이 다시 가능해질 것이다
남미에 새로운 광산을 발견했다 라는 소문을 퍼트리게 됩니다

 


남해회사는 큰 실적이 없었지만
정부의 밀어주기와 사람들의 광기 어린 투자로
한 주당 1000파운드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영국 정부 관료들은 이쯤이면 되었다라고 생각한 것인지
슬슬 남해회사의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들리자 회사의 주식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남해회사에 대한 좋은 소문들도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000파운드까지 돌파했던 주식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급락하기 시작했고
뉴턴의 입꼬리도 끝을 모르고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천재 과학자 뉴턴의 선택
그는 물타기가 아니면 답이 없다는 생각에
떨어지는 주식을 추가 매수했고

회사를 믿으며 연말까지 존버 했지만
남해회사 자체가 거품 그 자체였기 때문에
주식은 다시 연초의 가격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나름대로 전략을 세워
주식을 분할매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지 않은 선택으로 작용하며
전 재산의 90%를 잃게 되었는데
이것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20억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줬던 남해회사 사건을
남해 거품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네덜란드 튤립 거품, 프랑스 미시시피 거품과 함께
세계 3대 거품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분석해 큰 업적을 남겼던 뉴턴은
떨어지는 차트를 분석하지 못해 재산을 날린 뒤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대중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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